56. 네가 기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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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네가 기어코
2022.04.13.


“이건 그냥…….”
이블린이 당혹스러운 얼굴로 변명을 시도했다.

“내게 그대를 위로할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건가.”

“……그런 건 아녜요. 그리고 이미 충분히 위로해주셨어요.”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눈가를 쓸며 낮게 읊조리자 이블린이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 모습에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그대가 이러니까, 혼낼 수도 없군.”
혼을 내다니?
이블린은 제가 무얼 잘못한 게 있나 싶어 기억을 되짚어야 했다.

“아까 화살이 날아오는 걸 보고도 몸을 던졌지. 그때 무척 화가 났거든.”

“아.”

“다시는 그런 짓 하지 마, 이블린. 내가 미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면.”

“그자가 죽으면 유일한 증거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그만……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이블린이 순순히 사과를 건넸다.
어쨌든 쓰러지기까지 했으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바스티안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깨나 팔에 화살 구멍이 생겼을 수도 있고.

“이블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뺨을 감쌌다.

“항상 명심해. 내게 중요한 건 그대의 안전, 그거 하나뿐이야.”

“…….”

“그대는 내게 그만큼 중요해.”
바스티안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다정하게 이블린을 담았다.
그 따뜻한 시선에 풍랑 치듯 요란하던 감정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는 게 느껴졌다.

“이제 마음이 진정 됐어?”
이블린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어. 아까 목격자를 감쌀 때 무슨 생각을 했지?”

“화살에 맞는구나, 그런 각오를…….”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아까, 마차 사고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고 했지?”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해요, 폐하.”
오늘이야 바스티안이 도와줬다지만, 그럼 마차 사고 때는?
그건 역시 꿈이었던 걸까?

“마차 사고 때의 기억, 말해줄 수 있겠어?”

“아.”
뒤늦게 떠오른 사고의 기억을 되새기자 서늘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듯했다.
미간을 좁힌 이블린이 기억을 더듬으며 장면을 설명했다.

“그 외에 또 떠오른 기억은?”
바스티안이 긴장하며 물었다.
혹 어릴 때의 기억도 돌아왔을까? 희망과 걱정이 뒤엉킨 기분이었다.

“아뇨, 그게 전부예요.”

“……그렇군.”

“그런데, 폐하. 그건 왜 물으시죠?”
이블린은 왜인지 진지한 바스티안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그리고 바스티안에게 돌아온 답은 의외의 말이었다.

“역시, 결혼식을 올렸으면 해.”

“!”
결혼식.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안 그래도 왜 그 건에 대해서 말이 없을까, 바스티안은 어쩌고 싶은 걸까 궁금했는데.
그런데 왜 뜬금없이 지금 그 얘기를 꺼내는 걸까?

“폐하, 결혼식과 이번 일에 무슨 관련이라도?”

“결혼식 때, 황제는 황후와 반려의 의식을 치르게 돼. 그리고 황후는 그때 황제에게서 힘을 넘겨받지.”
사실 반려의 의식은 이미 이블린을 살리던 때에 치렀다.
하지만…….

“오늘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 주십시오.”
오래전, 이블린의 금발과 똑 닮은 사내와 했던 약속.

‘언젠가 때가 되면…….’
비밀의 무게가 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무거워지기 전에.
바스티안은 입술이 버석하게 마르는 걸 느꼈다.

“그런 건 처음 들어요, 폐하.”

“황실의 일원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거니까. 알려지지 않은 많은 비밀 중 하나지.”

“그런 걸 저에게 알려주셔도 되는 건가요?”

“그대니까 말하는 거야.”
픽 웃은 바스티안이 손가락 끝으로 이블린의 콧등을 톡 쓸었다.

“그럼, 황후가 되면 정령을 다룰 수 있게 되는 건가요?”

“그런 경우는 없었어. 그렇지만, 그대가 예외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

“……!”

“오늘 보니 그대에게 재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어. 내 곁에 있으면서 뒤늦게 발현된 걸 수도 있고.”
이블린의 연녹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빛이 찰나로 스쳤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말했잖아. 내 곁에 붙어 있으면 된다고. 앞으로 한 시도 떨어지지 마.”

“이미 지금도 그러고 있는걸요.”
이블린의 대답에 바스티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마음속을 답답하게 만들던 그늘이 이블린의 말 한마디에 사라지고 만다.

“단장님이 이 힘을 다스리는 법만 제대로 익힌다면, 폐하께서 걱정하셨던 그런 부분들도 해결되겠지요.”
다트의 말을 생각하며 바스티안은 자꾸만 피어나는 기대감을 다스리려 애썼다.
곁에서 천천히 지켜보면 되겠지.
어느 쪽이든, 이블린이 위험한 것만 아니라면 된다.

“어쨌든 늘 그렇듯, 강요는 아니야. 어디까지나 제안일 뿐이지.”

“이미 폐하의 제안을 받아들였던 때부터 각오했던 거예요. 그게 무엇이든지요.”
이블린은 제 선택이 옳다고 믿기로 했다.
조금은, 그의 곁에 더 머무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이렇게 마음이 고통스러울 때, 바스티안의 다정함에 조금 기대도 되지 않을까.

“폐하, 그래도…….”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손을 붙잡으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지의 일부터 먼저 해결했으면 해요.”
아직 붉은 기가 남은 눈가에 결의가 찼다.
잊고 있던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이 어땠는지, 계속해서 떠올랐다.
사랑한다는 말에 웃기만 했다.
그렇게 허망하게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더라면, 나도 사랑한다고 말할걸.

“전 이제 아버지가 공작위를 내려놓게 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됐어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게 어떤 건지, 느끼게 해주고 싶어졌다.
그리고 눈앞의 황제는 그녀가 어떤 선택을 하든 든든하게 지지해 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말해, 이블린. 난 그저 그대의 마음이 정해지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야.”
역시나 단호한 말이 그녀에게 힘을 실어준다.

“제 계획은…….”
이블린의 붉은 입술이 열렸다.
* * *

“황제 폐하와 단장이 오펜 자작에게 갔다고?”
알피도 자작이 와락 표정을 구겼다.
티에르 공작의 명으로 황제의 뒤를 쫓은 길드원이 가져온 정보였다.
실상 그가 관리하는 길드니 공작이 시키는 명령은 그의 귀에도 자연스레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공작은 왜 공녀의 뒤를 쫓으라 한 거지?”

“누구를 만나는 건지 보고하라고 했습니다.”
마차 사고 목격자를 열심히 찾는 것도 그렇고.
갑자기 딸에게 고가의 선물을 주는 것도 그렇고.

‘그래, 지금 생각해 보면 공녀의 반응이 모호하기는 했어.’
그 정도의 보석을 본 보통 영애라면 좋아서 까무러쳤을 텐데.
어쩌면 두 사람의 사이가 소문 같은 부녀관계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럼 내가 공작과 공녀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건데?’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듯했다.

‘이러면 당장 오펜 자작의 자리를 뺏고 말고의 문제가 아닌데.’
공작과 공녀의 대결 구도인데, 황제가 공녀의 편이고…… 그러면 당연히 공작보다는 황제가 우위지.

‘과연 공녀가 또 언제까지 황제의 사랑을 받을 거냐 이거지.’
만약 공녀가 뒷방 신세로 전락하면 끈 떨어진 신세가 되는 건데.
당분간은 눈치를 살피면서 양쪽의 신뢰를 얻는 수밖에 없었다.

‘공녀를 광산으로 초대하는 건 신중하게 생각해야겠군.’
자신 있게 초대장은 던졌으니, 오히려 의심은 사지 않겠지.

‘흥, 내가 눈치로 여기까지 온 사람이라고.’
알피도 자작이 안도의 한숨을 쉴 때였다.

“자작님, 자작님!”
상단의 일꾼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왔다.

“왜? 무슨 일이야?”

“황궁에서 기사단이 왔는데…….”

“황궁? 기사단?”
혹시 공녀가 나를 찾나?
알피도 자작이 반색할 때였다.

“벼, 병사들을 이끌고 왔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자작이 상황 판단을 끝내기도 전, 집무실로 한 무리의 병사들이 들이닥쳤다.

“이, 이게 무슨!”

“알피도 자작, 그대의 상단에서 밀수 거래를 한다는 제보가 있었습니다.”

“!”
자작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설마 공작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러면 본인에게도 득이 되지는 않을 테니까.

“일단 조사를 해야 하니 함께 황궁으로 가야겠습니다. 얌전히 응하는 게 서로 좋겠군요.”
공작에게 이 상황을 알려야 하는데.
하지만, 서슬 퍼렇게 눈을 뜬 기사단 앞에서 입을 함부로 놀릴 수는 없었다.

“외부에는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운 거로 하시죠. 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좋을 건 없을 테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안다는 듯 한마디가 더 돌아왔다.

“…….”
자작의 눈 밑이 순식간에 퀭해졌다.
* * *

“그자는 왜 소식이 없어?”
공작이 짜증을 내며 보좌관을 다그쳤다.
알피도 자작을 불러들인 지가 며칠인데, 오겠다던 자가 말이 없었다.

“그게, 급한 일정이 있어 외부로 떠났답니다.”

“급한 일? 어디를 갔는데?”

“상단 사람들도 잘 모르더군요.”

“그간 내가 너무 잘 해줬군.”
그의 명령보다 다른 일을 우선시하다니.
황궁에 몇 번 드나들더니 헛된 꿈을 꾸기라도 하는 모양이지.

“그 목격자 놈은!”

“아직…….”

“정신 똑바로 차리지 못해?”
공작이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집어 던졌다.
이렇게 중요한 때에!
공작이 씩씩대는데 시종 하나가 쭈뼛대며 집무실 입구에 나타났다.

“또 뭐야!”

“고, 공작님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 누구.”

“공녀님의…….”
보좌관이 시종의 손에 들린 편지를 가져와 공작에게 내밀었다.
공작이 거칠게 봉투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황궁에 돌아오는 대로 뵀으면 해요, 지참금 문제로 상의 드려야 할 것 같아요. 폐하께서 결혼식을 서두르길 원하셔서요.]

‘네가 기어코.’
공작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 * *

“저희가 늦은 건 아닌가 봐요, 다행이네요.”
말 고삐를 당긴 이블린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더 쉬어야 한다는 바스티안을 겨우 설득해 루체이로 온 참이었다.
지금 부친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까.
수해 지역만 둘러보고 나면 황궁으로 돌아간다. 그 후의 일이 기대됐다.

“미리 기별해 놓길 잘했네요.”

“길목에서 기다렸다가 합류하지.”

“네, 폐하.”
망토로 몸을 가린 일행이 주변을 경계하며 숲길을 천천히 가로지를 때였다.
멀리서 말발굽 소리와 마차 바퀴가 구르는 소음이 희미하게 들렸다.

“도착했군.”
기척을 알아차린 바스티안이 이블린과 다트에게 턱짓했다.
말을 빠르게 달려 낮은 언덕에 이르자, 그 아래쪽에 멈춰서는 오단 일행이 보였다.
일행을 눈으로 훑던 때, 마차에서 내리는 누군가가 보였다.
레이스로 장식된 망토 사이로 금빛 머리가 보였다.

‘여자?’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기까지 에스코트해 올 레이디가 있던가? 금시초문이었다.
눈을 좁혀 여인의 얼굴을 확인한 이블린은 곧 경악하고 말았다.

‘다베르 후작? 아니, 후작님이 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