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적어도 나는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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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적어도 나는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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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적어도 나는 진심
2022.05.01.

“말을 돌리다니, 누가 할 소리를.”
금방 단정해진 제 옷차림을 본 바스티안이 픽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이블린, 그대가 그리 말했지. 내 제안을 받아들였을 때부터 어떤 일이든, 그게 무엇이든 전부 각오했다고.”
가느다란 발목을 휘감은 커다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분명 그대 입으로 그리 말했어.”

“……제가 그러긴 했죠, 했지만! 아이라뇨. 그건 농담처럼 말할 게 아니잖아요.”

“농담?”
억울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이블린에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올라섰다.

“애초에 가짜 결혼인데 아이까지 갖자고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럼 진짜 결혼하고 다른 게 없……는걸요?”
이블린이 중요한 사실을 깨우쳐주려는 듯 차분하게 설득을 이어갔다.

“……가짜 결혼이라.”
가만히 듣고 있던 바스티안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벌써 그대의 입에서 두 번째 나오는 말이군. 어쩐지 서운해지는데.”
그러니까, 그게 사실인데 왜 서운해하시냐는 거죠.
이블린이 눈에 힘을 줬다.
여기서 바스티안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빼앗겼다가는 또 중요한 걸 듣지 못하고 넘어갈 확률이 높았다.
오늘만큼은 안 돼. 절대로 안 돼.

“그러니까 말씀해 주세요, 폐하.”

“하, 좋아. 대체 뭐가 듣고 싶은 거지?”
이블린의 고집스러운 입술을 물끄러미 보던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물었다.
이블린은 회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속으로 크게 심호흡했다.

“전, 폐하께서 이 결혼을 통해 원하시는 게 뭔지 알고 싶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어요, 제가 폐하께 드릴 수 있는 게 무엇인지.”

“…….”
티에르 가문을 등에 업어야 할 만큼 황실의 권력이 약한 것도 아니고, 심지어 언제 무슨 사고를 칠지 모르는 부친까지 딸려 있다.
바스티안이 대답하지 않자 묘한 침묵이 두 사람을 에워쌌다.

“저…… 폐하?”
이블린이 멋쩍어진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자, 그녀의 발목을 쥐고 있던 힘이 풀렸다.
스르륵 위로 올라온 바스티안의 손이 이블린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이블린. 정말, 몰라?”

“…….”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건가.”
바스티안이 낮게 읊조리며 이블린의 눈을 바라봤다. 투명한 눈동자가 사뭇 순진해 보였다.
그렇다면 알려주는 수밖에.
픽 웃은 바스티안이 고개를 움직였다.
쪽, 가벼운 소리와 함께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이게 내 답이야, 이블린.”
다정한 속삭임과 동시에 젖은 손이 이블린의 머리를 감싸 안아 제게 당겼다.
졸지에 단단한 가슴팍에 찰싹 달라붙게 된 이블린은 그의 품을 벗어나려다 말고 멈췄다.
맞닿은 귀를 타고 둥둥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렸다.

‘어, 그러니까…….’
날…… 좋아한다는 뜻인가?
원한다던 여인이…… 정말 나였어?
뭐라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머릿속이 혼몽했다.
뜨거운 물의 열기가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순식간에 치고 올라온 듯했다.
이런 식으로 진실을 확인하게 되다니? 갑자기 고백이라니!
먼저 질문하기는 했지만, 이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전개였다.
곧 이블린의 얼굴을 떼어낸 바스티안이 작은 턱을 손으로 받쳐 들어 눈을 마주쳐 왔다.
흔들리던 에메랄드색 눈동자가 어쩌지 못하고 아래로 툭 떨어지는 게 훤히 보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고민하는 모양이었다.
바스티안의 입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그대도 이미 아는 줄 알았는데? 설마 몰랐다고 말하려던 건가?”
그토록 수많은 힌트를 주었는데?

“그야, 직접 말씀하신 적은 없었으니까…….”
혼자 계속 긴가민가했죠.
말하면서도 부끄러운 듯 이블린의 얼굴이 점점 붉게 물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꼭 수줍게 터지는 꽃망울 같았다.
짙은 향기를 뿜어내는 착각이 들 만큼 예뻐서 바스티안은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길 수 없었다.

“이블린. 나는 그런 마음을 키운 지 꽤 오래됐어.”
정말 오래.

‘오래됐다니.’
입술을 어름거리던 이블린이 뒤늦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이블린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무리 기억을 되짚어봐도 바스티안과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기사단장직에 임명된 이후에도, 솔직히 반한 여인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대체 언제부터…….”

“그게 중요한가? 그럼 숙제야. 그대가 한번 잘 생각해 봐.”
적어도 잃어버린 열쇠를 이블린이 직접 찾을 때까지, 바스티안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폐하, 왜 저에게 계약 결혼을 제안하신 건가요?”
이블린은 떠오르는 궁금증을 전부 묻기로 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처음부터 공식적으로 청혼을 넣는 방법도 있었을 텐데.

“질문이 많군. 역시 내 말을 믿지 못하는 건가?”

“그게 아니라…….”

“하나 묻지. 만약 내가 청혼을 먼저 했더라면, 그대는 흔쾌히 받아들였을까?”

“아…….”
아버지의 일이 해결되지 않은 채로 황실의 청혼을 받았다면, 꽤 곤란했을지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내가 그대를 ‘왜’ 좋아하는지 묻는 게 어때. 이런 상황에도 따져 묻는 게 그대답기는 하지만.”
입꼬리를 슬며시 끌어 올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머리칼 끝을 쥐어 입을 맞췄다.

“이블린, 난 그대가 예뻐. 달빛을 닮은 이 머리칼도 사랑스럽고, 검을 쥐는 손가락까지도 소중하지.”

“…….”

“사뿐히 걷는 걸음걸이도, 동그란 눈과 코는 말할 것도 없지.”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바스티안이 목소리를 낮출 때마다 주변의 공기가 바뀌는 듯했다.
그녀의 얼굴을 오목조목 뜯어보듯 훑고 내려가는 진득한 눈빛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가슴 한구석이 꽉 조여드는 기분이었다.

“늘 고집스러운 말만 해대는 이 입술도 꽤 귀엽다고 생각해. 무엇보다…….”
이블린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조금만 더 들으면 얼굴이든 심장이든 어딘가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모두에게 우아하고 어른스럽게 구는 그대가 내 앞에서만 흐트러지는 것도 좋아.”

“그만……!”
듣다 못한 이블린이 두 손으로 바스티안의 입을 막았다.

“왜, 밤새 말할 수 있는데.”
맞닿은 손바닥에서 바스티안이 웃는 게 느껴졌다.

“……충분히 알았으니, 그만요.”
바스티안이 어느새 물기가 말라버린 손끝으로 이블린의 볼을 쓸었다.

“지금 그대의 답을 요구할 생각은 없어. 다만, 우리의 결혼에 적어도 나의 진심 정도는 들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었어.”
바스티안의 손이 미끄러지듯 이블린의 볼에서 목덜미로 내려갔다.

“그러니, 그대는 해야 할 일에 먼저 집중하도록 해. 그대 가문의 일이 해결되고, 그대 마음 한편에 남은 작은 티끌조차 없을 때.”

“…….”

“난 그대의 마음을 온전히 가질 거야.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전부.”
바스티안이 하는 말 한마디가 전부 심장에 콕콕 박혔다.
그의 애정 표현을 그냥 연기라고 치부할 때와는 전혀 달랐다.

“…….”
이블린은 마치 귀한 보물을 다루듯 제 손을 잡고 손등에 입술을 묻는 바스티안을 숨죽이며 지켜봤다.
자칫하면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요란하게 뛰는 심장은 바스티안에게서 옮은 게 분명했다.

* * *

“간밤은 편안하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인사차 묻는 휘스턴에게 이블린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하면 편안하기는커녕,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그런 고백을 받아 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같은 침대를 쓸 만큼 뻔뻔하지 못했다.
어쩌면 황궁으로 들어가 처음 같은 침실을 썼을 때보다 더욱 신경이 쓰였던 것도 같고.
이블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오단과 대화하는 바스티안을 힐끗 쳐다봤다.
그동안은 어떻게 의식하지 않고 잤는지 자신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다른 침대에서 자겠다는 말에 바스티안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따로 자겠다고? 이런,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협박인데. 그대가 없으면 난 잠을 잘 수가 없는데.”
물론 말과는 달리 무서워하는 얼굴은 전혀 아니었다.

“걱정 마. 우리의 소중한 첫날 밤을 아무 데서나 보낼 생각은 없으니까. 물론 그대가 원한다면 거절하지는 않겠지만.”

“!”

“그러지 말고 이리와, 이블린. 내가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그대 곁이라는 거, 잘 알지 않나.”
이블린의 입술이 비죽 앞으로 나왔다.
아주 사람을 들었다 놨다, 평생 바스티안에게 말로는 이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단장님!”
이블린의 주변으로 마을 여인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거, 이거 가져가세요!”

“이게 뭔가요?”
반사적으로 손을 뻗은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향유입니다. 배가 불러올 때쯤부터 발라주면 좋아요.”

“이건 임산부에게 좋은 약초예요, 루체이 사람들만 쓰는 거라 어디 가서도 못 구한다고요. 속이 안 좋을 때 차로 끓여 드세요.”
이블린 두 손으로도 모자라서 곁에 있던 기사단원이 함께 작별 선물을 받아 들었다.

“꼭 예쁜 아가를 낳으세요. 그리고 루체이에 또 와주시면 기쁠 거예요.”

“루체이에 오시지 않으셔도 괜찮으니 건강하게만요!”

“……모두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하고요.

“고맙기는요!”
이블린은 마음을 가득 채우는 죄책감을 숨기며 미소 지었다.

“인사는 다 나눈 건가?”
어느새 다가온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에 있던 짐을 덜어주며 물었다.

“그만 돌아가지.”

“네, 폐하.”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 올랐다.

“아쉬워 보이는군.”

“네, 생각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는데 벌써 정이 든 건가.”
선물을 받는 바람에 또 미안해졌다는 말은 삼키기로 했다.
어제 그런 말을 꺼냈다가 아이를 갖겠냐는 엉뚱한 말을 들었으니까.

“그대는 마음을 쉽게 준단 말이야, 나만 빼고.”
불만을 토로한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볼을 꾹 눌렀다가 놔주며 돌아섰다.
이블린은 힘 빠진 사람처럼 웃어버렸다.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는 거 뻔히 알면서.
아마 모르는 척 해 주는 걸 테지.
그마저도 지금의 제 상황을 고려한 바스티안의 배려라는 걸 알았다.
마지막으로 마을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서야 마차 문이 닫혔다.

“…….”
다시 고요한 적막 속에 남겨진 느낌이었다.
하지만, 황궁을 떠날 때와는 달리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마차사고의 진실을 알게 됐고, 그녀를 아껴주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리고, 황제의 마음을 알게 됐다.
천국과 지옥을 동시에 오가는 게 이런 기분일까.
이블린은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 * *

“만나서 반가워요, 영애. 마르다 페런이에요.”

“어서 와요, 영애.”
햇살 좋은 오후, 피오넬 자작가에 손님이 찾아왔다.

“아, 이건 제가 준비한 선물이에요.”

“어머, 세상에나.”
피오넬은 마르다가 건네는 꽃바구니를 보며 두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마르다는 빠르게 피오넬의 모습을 눈으로 훑었다.
황성으로 올라온 지 얼마 안 됐다는 신흥 귀족 가문이지만, 사교계 데뷔는 무사히 마친 영애.
부친이 가까이 지내보라며 추천해 준 영애였다.

‘맞아, 아버지는 날 아끼시지. 적어도 이블린 언니보다는 말이야.’
마르다가 생긋 웃으며 피오넬의 뒤를 따랐다.
사교계로 향하는 발판이 되어 줄 영애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