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각자의 선택 2022.05.08.
가엾은 아가씨. 한참을 훌쩍이던 알리에타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이블린을 보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이블린이 참는데, 그녀가 눈치 없이 계속 울 수는 없었다. 부친에게 직접 벌을 줘야 하는 그 심정이 어떠할까. 손을 더럽히라고 할 수도 없고, 더럽히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공녀님, 어떤 선택을 하시든 제가 곁에 있을게요.”
그 외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알리에타가 이블린의 손을 꽉 감싸 쥐었다.
“곁에 있어 주겠다는 사람이 많아서 든든하네.”
이블린이 고요히 미소 지었다. 전에는 알리에타와 휴이터 뿐이었는데, 지금은 떠오르는 얼굴이 한 명 더 있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잡아주고 따뜻하게 위로해 줄 사람이.
“참, 공녀님. 그럼, 그 마부 놈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알리에타가 눈을 부릅떴다.
“처음부터 인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요, 눈과 턱에 욕심이 가득해서는! 당장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일단은 아버지의 악행을 밝힐 증인이니 보호해야겠지.”
“그럼 역시 황궁 감옥으로…… 잠, 잠깐만요, 공녀님.”
씩씩대던 알리에타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감옥에 가뒀다가 보니카 때처럼 되면 어떡해요?”
보니카도 감옥에 있다가 죽을 뻔했는데.
“안전한 곳에 둘 거야. 참, 에바는?”
“아, 에바!”
에바를 잊고 있었네.
“공녀님, 중요한 말씀을 드리는 걸 잊었어요. 안 그래도 에바가 수상하게 행동하는 걸 확인했어요.”
“아.”
이블린이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마음이 그만큼 단단해진 탓일까, 아니면 예상했던 일이기 때문일까. 에바에게 베푼 호의가 적의로 돌아온 것에 대해 분노조차 일지 않았다.
“제가 다리를 다친 날, 저를 재워놓고 나가려 하더군요. 공녀님의 지시대로 기사단에 부탁해 뒤를 밟아달라고 했거든요.”
알리에타가 침을 꼴깍 삼키며 낮게 속삭였다.
“사람들 눈을 피해 특정 장소에 반복해서 들렀다고 해요. 무언가를 찾는 느낌이라고도 했어요.”
“무언가를 찾는다?”
“네에.”
“……아버지가 에바에게 내린 지시가 무엇일까.”
굳이 그녀의 곁에 붙여 둔 이유. 에바가 그녀를 해치려고 어떤 움직임을 보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소식을 전해 들으려고 한 것만은 아닐 텐데.’
보니카는 역시 에바의 짓이었을까.
“공녀님, 역시 너무 위험해요. 에바를 황궁에 두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밖으로 내보내는 게 좋겠어요.”
“바로 내보내면 아버지가 의심할 거야. 아버지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만 모르는 척해.”
“저는 영 불안한데…….”
“괜찮아. 계속 사람을 붙여 둘 거니까.”
“공녀님께서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지만…… 아, 이것도 받으세요. 어제 공작가에서 온 편지에요.”
알리에타가 찝찝해하면서도 이블린에게 갈색 봉투를 건넸다. 티에르 가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열어 내용물을 확인한 이블린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생각보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 듯했다.
“……유모, 나 알피도 자작을 만나러 다녀올게.”
“네? 공녀님, 여독이라도 좀 푸시지 않고요.”
“괜찮아. 그렇게 여유 부릴 때가 아니니까. 폐하께서도 바로 업무에 복귀하셨는걸.”
“어휴, 그렇지만 …….”
“참, 곧 결혼식 준비가 시작될 거야.”
“……네? 결혼식이라고 하셨어요, 지금?”
“응. 꽤 이른 시일 안에 올리게 될 거야. 누군가의 방해만 없다면.”
“공녀님, 잠시만요!”
그 말만 하고 가버리시면 어떡해요! 알리에타가 황급히 이블린의 뒤를 쫓았다. 울었다가 놀랐다가 화가 났다가. 짧은 시간 동안 감정이 하늘과 땅을 오가는 기분이었다.
. .
“단장님!”
초조하게 이를 다닥다닥 부딪치던 알피도 자작이 이블린을 보자마자 반색하며 몸을 일으켰다.
“자작, 며칠 사이에 얼굴이 말이 아니군요.”
이블린이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밀수라니요, 자작. 내가 그대를 황궁으로 불러들였는데, 하마터면 폐하께도 큰 피해가 갈 뻔했어요.”
“그게…….”
알피도 자작이 눈을 피하며 입을 더듬거렸다. 며칠 내내 강도 높은 조사를 받기는 했지만, 대체 어디까지 들킨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하는 밀수라고 해봐야 티에르 공작의 자산을 불려주려 보석을 불법 루트로 판매한 게 전부긴 했다.
“자작, 일단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요.”
“네, 말씀하시면…….”
무얼 물으려는 걸까. 알피도 자작이 긴장하며 침을 삼켰다.
“자작이 내게 전해 준 아버지의 선물, 그것도 밀수품과 관련되어 있나요?”
“그것이…….”
자작이 주춤대며 이블린을 훔쳐보듯 힐끔거렸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
며칠만에 나타난 이블린은 예전처럼 멍청하고 얼굴만 예쁜 공녀의 느낌이 아니었다. 이블린은 티에르 공작에게서조차 느껴보지 못했던 위압감을 풍겼다. 모른 척 빠져나갈 구멍 같은 건 없을 듯했다.
‘내가 어리석었어.’
이렇게 된 이상, 그도 승부수를 던져야만 했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단장님.”
“이야기가 빨라 좋군요, 자작.”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자작의 맞은편에 앉은 이블린이 조용히 몸을 기울였다.
“아버지가 부적절하게 모은 재산. 그 전부를 원해요.”
“!”
* * *
“다베르, 국경 지역에서 올라온 보고서 다시 검토해. 최근 2년 치 전부.”
“네? 전부를요?”
의아해하는 다베르를 보며 바스티안은 의자 깊숙이 몸을 묻었다.
“아무래도 황성으로 오는 보고서 중에 누락 된 것들이 있는 듯한데. 특히 밀거래 관련으로.”
“…….”
“확인해 봐. 그리고 국경 수비대에 말해서 밀거래하는 자들 전부를 잡아들이지는 말고 몇은 놓아줘서 뒤를 쫓게 해.”
“……네, 폐하.”
반 박자 늦게 답하며 내용을 받아 적던 다베르가 슬쩍 고개를 들었다 움찔했다. 손가락을 마주 얽은 바스티안이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
“……폐하?”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손을 풀었다.
“다베르. 그대가 내 곁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됐지?”
“5년쯤 된 것 같군요.”
“날 따라 제국까지 오는 게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제게는 좋은 기회인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곁에서 지켜본 나는 어떻던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으십니까, 폐하.”
“그냥 궁금해져서.”
바스티안이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토독토독 두들겼다.
“다베르, 그대는 눈치가 빠르고 영민하지.”
“……감사합니다?”
“그래, 그대의 장점이니까 잘 활용해.”
“네, 명심하겠습니다.”
다베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귀족회의가 다가오지? 결혼식을 안건으로 올려, 이른 시일 안에 올리겠다고. 예산을 급히 뺄 수는 없을 테니 사유 재산을 쓰겠다고 해.”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겁니까?”
다베르가 고개를 갸웃댔다. 어차피 진짜 임신도 아니고, 정작 공녀를 황후 자리에 올리려 하지 않던 이는 황제 본인이었다.
“이블린이 날 조금은 좋아하게 된 것 같아서?”
바스티안이 씩 웃으며 하는 말에 다베르는 입을 다물었다. 황제가 저런 식으로 농담처럼 던질 때는 무언가 속내를 숨길 때였다.
‘루체이에 다녀오고 마음이 바뀌셨다는 말이지.’
“알겠습니다, 폐하.”
다베르가 일단 수긍하며 서류를 정리할 때였다.
“폐하.”
“이블린.”
“제가 방해한 건가요?”
“아니, 적절한 때에 왔어.”
이블린을 보자마자 바스티안의 얼굴이 사르르 녹아내리듯 부드러워졌다. 갈수록 두 사람의 관계는 불이 붙은 듯 가까워지는 게 보였다.
“그럼, 가보겠습니다.”
두 사람을 관찰하듯 보던 다베르가 집무실을 떠났다.
“알피도 자작과는 유익한 대화를 나눴나.”
“네, 계산이 빠른 자니까요.”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오는 이블린의 미소가 의기양양했다.
‘여기서 귀엽다고 말하면 안 되겠지.’
바스티안이 몸을 일으켜 이블린에게 다가갔다.
“말한 대로 공작을 만나러 갈 건가?”
“음, 당장은 안 될 것 같아요.”
이블린이 난감하다는 듯 미간을 좁히자 바스티안도 덩달아 표정을 굳혔다. 저를 따라 반응하는 바스티안의 표정이 싫지 않았다. 이블린이 피식 웃으며 품에서 꺼낸 편지를 내밀었다.
“……생일 축하 연회?”
“네, 아버지가 열어 주겠다고요.”
“이런, 내가 선수를 빼앗겼군.”
바스티안이 어이없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로, 공작가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제 생일 파티예요.”
“그건 기념할 만하군.”
“그러니 어울려 줘야겠지요?”
“그래, 광산까지 미리 선물로 받았으니까.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되면 공작의 속이 말이 아니겠군.”
“당분간은 모르는 게 낫겠죠.”
이블린이 제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말았다 풀기를 반복하는 바스티안의 손을 붙잡았다.
“폐하, 아버지가 부정으로 축적한 재산은 국고로 환수할까 해요.”
“굳이. 훗날 더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쓸 일이 생길지도 모르고.”
“……그럴까요?”
“그래, 굳이 티에르 가의 흠결이라고 생각해서 그대가 책임을 느낄 필요 없어.”
이블린은 물끄러미 바스티안을 보다가 작게 웃었다.
“폐하는 정말…… 손해 보는 성격이시네요.”
눈썹을 까딱인 바스티안이 다시 손의 방향을 바꿔 이블린의 손을 붙잡았다.
“……딱히 그렇지도 않아.”
그리고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 * *
“처음 뵙겠어요, 마르다 페런이에요.”
“반가워요, 보니카 아쉴브예요.”
마르다는 눈앞의 육감적인 여인을 보며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어떤 멍청한 여자인가 했는데, 보니카는 그녀가 지금껏 봐왔던 어느 여자보다도 아름다웠다.
‘이런 여자를 두고도 이블린을 선택했다고?’
이블린의 실물이 더 궁금해졌다. 정말 기사에 나온 것처럼 그 정도일까. 그녀와 자신이 같은 아버지를 둔 게 맞긴 한 걸까? 그런 거라면 정말 억울해지는데.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아쉴브 영애. 페런 영애는 얼마 전에 황성으로 올라왔기 때문에 소개해주고 싶었어요.”
피오넬이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호호 웃으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괜찮아요.”
보니카의 표정은 차가웠지만, 적개심도 호기심도 딱히 없어 보였다. 외모와는 다르게 성격은 그리 세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까 그런 멍청한 짓을 서슴없이 했겠지.’
마르다는 단번에 보니카를 얕잡아 보게 됐다.
“그런데 왜 마담 디의 살롱으로 안 가고, 여기로 온 거예요?”
피오넬이 적당한 때에 보니카를 떠보듯 물었다. 알면서도 꺼낸 질문이었다. 그곳은 황실에 드레스를 납품하는 곳이니까, 이블린 티에르와 겹치는 게 싫었겠지. 역시나 보니카의 표정이 대번에 찌푸려졌다.
‘봐요, 그때 기 싸움이 장난 아니었다니까?’
피오넬이 마르다에게 거보라는 듯 눈짓했다.
“참, 곧 공작가에서 티에르 공녀의 생일 파티가 열린다죠? 다들 참석하나요?”
피오넬의 질문에 마르다와 보니카의 얼굴에 각각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가야겠죠.”
보니카가 체념하듯 한숨을 흘렸다.
“페런 영애는요?”
“아, 저는…….”
‘아버지는 오지 말라고 했는데…….’
마르다가 입술을 움찔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