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선택은 네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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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선택은 네 몫
2022.05.11.
이블린이 황궁으로 떠난 후, 황량할 정도로 조용했던 공작가에 모처럼 활기가 돌았다.
초대받은 손님들의 마차가 연신 공작가의 정원을 가로질렀다.

“공작가에서 연회가 열리는 건 실로 오랜만이군요.”

“그러게 말이에요, 게다가 이렇게 큰 규모라니. 티에르 공작께서 단단히 벼르고 있었군요?”

“호호, 딸 사랑 지극한 공작님다운 행동이네요.”

“하긴. 나라도 공녀가 내 딸이었다면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았을 거예요.”
황궁의 화려한 마차가 도착한 건 손님 대부분이 홀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공녀님이 도착하셨습니다.”

“어머나, 세상에!”
삼삼오오 모여 대화하던 이들이 호위기사단을 양옆으로 대동하고 나타난 이블린을 보며 압도당했다.

“이블린, 나의 사랑스러운 아가. 어서 오거라.”
육중한 문을 넘어오던 이블린은 두 팔 벌려 다가오는 부친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아가?’
환하게 웃는 부친을 보자 온몸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이블린은 손바닥을 파고드는 아릿한 통증을 깨닫고 손의 힘을 풀었다.
그래, 똑같이 웃으면서 대해드려야지.
당신처럼 끔찍한 사람이 되지는 않을 거지만, 적어도 이 말도 안 되는 놀이에 어울려 줄 마음은 들었으니까.
이블린은 공작에게 안기는 대신 드레스 자락을 잡으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버지.”

“하하, 이블린, 내 딸아. 이런 자리에서까지 예의를 갖출 필요는 없지 않니.”
남들이 보면 예법을 따르는 정숙한 영애처럼 보이겠지만, 공작의 눈에 좋게 보일 리는 없었다.
연기하는 자신을 고깝게 여겨 저런 식으로 거리를 둔다는 걸 어떻게 모를까.
공작이 태연한 척 이블린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좌중을 둘러 보았다.

“모두 갑작스러운 초대에도 흔쾌히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쨌든 지켜보는 사람들의 표정이 밝아서 공작은 마음 편히 말을 이었다.

“품에서 떠나게 된 딸의 생일을 마지막으로 축하해주고 싶은 욕심에 실례를 무릅쓰게 됐습니다.”
이블린은 부친이 하는 말을 잠자코 듣기로 했다.
목적 없이 이런 일을 벌일 사람이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공작이 갑자기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건강 문제로 사교계 데뷔도 못 하고, 몇 년간은 늘 가족끼리만 조촐하게 생일을 축하하고는 했지요.”
공작의 슬픔에 감화된 여인들 몇 명이 덩달아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는 게 보였다.

‘차라리 연극배우가 되셨으면 좋았을지도.’
저런 식으로 어머니의 마음도 샀을까.
어머니는 당신이 사랑하던 남자의 손에 목숨을 잃게 될 줄 아셨을까.

“그렇게 저를 걱정하게 만들던 딸이 기사단장직도 훌륭히 수행하고, 또 한 아이의 엄마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이 행복한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더군요.”
공작이 여유롭게 웃으며 시종이 가져온 쟁반 위의 잔을 집어 들었다.

“소중한 제 딸의 행복을 위하여.”
동시에 손님들의 손에도 잔이 들리자 공작이 잔을 높이 치켜들었다.
이블린은 인형처럼 미소 지으며 사람들의 축하 인사에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시선이 흩어질 때쯤, 공작이 낮게 속삭였다.

“모쪼록 즐겨주면 좋겠구나, 이블린. 널 위해 준비한 자리니 말이다.”

“절 그토록 생각해주신다니, 영광이네요.”
이블린이 픽 웃으며 몸을 옆으로 틀 때였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블린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있었다.
얼마 전, 그녀가 황궁으로 티파티에 초대했던 영애들이었다.

“공녀님, 생일 축하드려요.”
차례를 기다리던 영애들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모두.”
영애들과 눈인사를 나누던 이블린은 곧 못 보던 얼굴을 하나 발견했다.
처음 만나지만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설마?’
눈이 마주치자 갈색 머리의 영애가 당황한 듯 몸을 움츠렸다.
그러다가 무언가 결심한 듯 당당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에 힘을 주었다.
비열하면서도 오만한 그 모습이 아주 익숙했다.

“아, 페런 영애. 이리 와서 인사해요.”
마침 이블린의 시선을 눈치챈 피오넬이 마르다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마르다…… 페런이에요.”
마르다가 고개를 까딱 숙이며 제 소개를 마쳤다.

‘맙소사, 여기에 오다니.’
이블린은 헛웃음을 참으며 아직 옆에 붙어 있는 부친의 얼굴을 쳐다봤다.
분노가 터질듯한 얼굴을 부친이 겨우 수습하는 게 느껴졌다.
아무래도 마르다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나 보다.

‘하긴, 눈치가 있다면 여기가 제가 올 자리가 아니라는 걸 알았을 텐데.’
혹은 부친의 속을 긁어놓을 동지인지도 모르고.

“와줘서 고마워요, 페런 영애. 이렇게 만나게 되어 무척 반갑군요.”
이블린은 부친에게 보란 듯이 마르다의 손을 쥐었다.
마르다가 어느 쪽인지는 대화해 보면 될 일이었다.

.
.

“그래, 지참금 문제로 상의하고 싶다고?”
집무실 테이블에 이블린과 마주 앉은 티에르 공작이 본론을 꺼냈다.

“네, 폐하께서 결혼식을 서두르겠다고 하셔서요.”
이블린은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찻잔에서 눈을 떼며 부친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마르다와 함께 있는 게 불안했는지 부친은 의논할 일이 있다며 이블린을 불러냈다.
집무실 바깥에는 그녀가 데려온 호위기사들이 긴장한 채 서 있을 터.
위험한 일이 생기면 바로 대응할 수 있도록 이블린 또한 드레스 아래 검을 숨기고 있었다.

“이런, 꼭 그렇게 서둘러야 하는 거냐, 네 몸도 약한데.”

“그리 제 걱정을 하시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이블린, 네가 내게 서운해한다는 거 잘 안다.”
이블린은 찻잔에 손도 뻗지 않고 표정 없이 부친의 말을 들었다.

“너도 내가 티에르 가문에서 어떤 푸대접을 받았는지 잘 알지 않니. 그런 상처 때문에 어린 네게도 원망이 조금은 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머니를 죽이셨어요? 고작 그런 이유로?
이블린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부족한 아버지를 용서해다오, 그래도 네가 내 딸이라는 건 변함 없는 사실이란다.”

“…….”
공작의 가느다란 입술이 길게 늘어지는 걸 보며 이블린은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그래서, 내가 당신의 딸이라서 더 끔찍하다는 사실을, 모르시나요.

“마르다, 말씀하셨던 딸이 맞죠?”
이블린이 공작을 일깨우듯 이름을 입에 담았다.

“공작가로 데려오겠다 하시더니, 페런 백작가로 보내셨군요. 혹 제가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하신 건가요?”
이블린은 표정을 숨기려고 애쓰는 부친의 얼굴을 유심히 지켜봤다.

“크흠, 그럴…… 그럴 리가. 그저 네가 황궁으로 들어간 마당에 잡음을 일으키기 싫었을 뿐이다.”

“…….”

“그렇다고 혼기도 찬 아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도 없고.”

“정말 아버지와 똑 닮았더군요, 저와는 다르게.”
이블린 저게 뭘 알고 하는 말은 아니겠지?
공작은 연신 긴장하며 이블린의 의도를 파악하려 애썼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너무 닮아서 누군가는 금방 눈치챌 것 같은데.”

“그건 네가 걱정할 부분은 아니다, 이블린.”

“뭐, 아버지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야.”
마르다의 존재감이 사교계에서 커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그래야 부친의 진면목이 드러나게 될 때 더욱 극적일 테니까.
그녀가 굴리지 않아도 눈덩이는 착실히 커지고 있었다.

“어쨌든, 지참금으로 원하는 목록이에요. 한 번 확인해 보시겠어요?”
이블린이 작은 종이를 꺼내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공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집어 들었다.

“지참금으로 원하는 영지예요.”

“……이게 무슨!”
헛기침하며 서류로 시선을 내린 공작은 곧 사색이 됐다.
달레나부터 에버너까지. 공작가의 중요한 핵심 영지가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이블린, 제정신이냐!”

“네, 아주 멀쩡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가문을 황실에 바치기라도 하라는 뜻이냐! 지금껏 어느 가문도 이렇게까지 한 적은 없었다!”

“어머나, 역대 황후를 배출한 가문하고는 다르지요. 저희는 티에르 가문이잖아요, 아버지. 대대로 황실에 충성해 온. 그게 티에르의 이름값이지요. 안 그런가요?”

“…….”
순 날강도가 아닌가!
공작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하얗게 질렸다.
.
.

“재수 없어!”
작은 응접실을 찾아 숨어든 마르다는 참았던 분통을 터뜨렸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백작가로 초대장이 왔지만, 부친은 알피도 상단을 통해 몰래 전언을 보냈다.
무슨 핑계를 대도 좋으니 오지 말라고.
그걸 무시하고 온 거였다.

‘차라리 안 오는 게 나았을까.’
막상 와서 보니 공작가의 화려한 외관에 주눅이 들고 샘이 났다.
나도 아버지의 딸인데, 티에르 공작가의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인데.
황궁의 마차에서 내려 걸어오는 이블린을 처음 본 순간, 본능적으로 패배감 같은 게 느껴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와 닮은 구석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언니, 언니는 하나뿐인 동생이 궁금하지 않으셨나요? 한 번도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싶지 않으셨어요?”
마르다는 결국 참지 못하고 영애들이 없는 틈을 노려 이블린에게 서운함을 토로하고 말았다.
그러자 인형 같은 얼굴이 고개를 갸웃하더니 보석 같은 눈동자에 의아함을 드러냈다.

“언니? 음, 페런 영애. 한 가지 묻고 싶군요.”

“……네?”

“오늘 이곳에 페런 백작가의 여식으로 온 게 아니었나요?”
미소짓고 있었지만, 말투는 사무적이었다.

“영애가 원하는 게 뭐죠? 티에르 공작이 숨기려고 애쓰는 딸인가요, 아니면 페런 백작가의 영애인가요?”

“그게 무슨…….”

“영애의 선택에 따라 영애를 대하는 내 입장도 달라질 거예요.”
고요히 웃은 이블린은 한마디를 남기고 몸을 일으켰다.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군요. 잘 고민해 봐요, 어느 쪽이 영애에게 더 이득이 될지.”
의미를 이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날 멍청이 취급해도 유분수지! 한마디로 까불지 말라는 거 아닌가?
누가 모를까 봐? 페런 백작가 정도면 감지덕지하고 살라 이거잖아!
그래, 그렇게 전부 혼자 독차지하고 싶다 이거지.
저를 보자마자 병균 취급하듯 표정을 찌푸리던 부친에게도 서운했다.
이런 생일 연회, 나는 열어 준 적도 없었으면서.
마르다가 울컥울컥 샘솟는 서러움을 곱씹을 때였다.
갑자기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마르다는 풍성한 곱슬머리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앗, 실례합니다. 사람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벽안의 남자가 미안해하며 눈을 휘었다.

“그런데 영애, 혹시 무슨 문제라도? 길을 잃었다면 제가 안내해드릴 수 있어요.”
마르다는 어렵지 않게 사내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휴이터 디에스티. 맞지?’
잠시 생각하던 마르다가 처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