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진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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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진심
2022.05.22.
“뭐긴, ‘진짜’ 생일 축하 연회지.”
“……네?”
이블린이 뻣뻣해진 목을 움직여 바스티안을 올려다보자 바스티안이 쿡 웃으며 이블린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진짜 연회?’
이블린의 눈동자가 다시금 연무장 한가운데로 향했다.
평소라면 텅 비어 있을 공간은 테이블로 가득 차 있었고, 그 위에는 많은 음식이 준비되어 있었다.
“어서 오세요! 나의 사랑스러운 공녀님.”
알리에타가 달려와 이블린을 꼭 끌어안았다가 놔 주었다.
공작가에서 함께 온 식솔들은 물론이고, 다트처럼 황궁 내에서 가깝게 지낸 이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감동하기엔 아직 일러, 이블린. 그대의 생일도, 내 선물도 이제 시작일 뿐이야.”
고개를 숙인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자고로 기쁜 날은 좋은 사람들과 편안하게 즐겨야 하는 법이거든.”
여기 모인 모두가 그대를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이들이니까.
“네, 그렇고 말고요. 이리 오세요, 공녀님. 편한 옷을 준비해 두었어요!”
알리에타가 아직 얼어 있는 이블린의 손을 잡아끌었다.
이블린은 고개를 돌려 덩달아 제 등을 떠미는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회녹색 눈동자에 담긴 건 깊이를 알 수 없는 다정함이었다.
어쩐지 눈물이 울컥 샘솟는 기분이라 이블린은 눈에 힘을 꾹 주고 말았다.
* * *
“다들 지켜만 볼 겁니까? 이대로 가다가는 티에르 공녀가 황후 자리에 앉게 생겼습니다!”
누군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탕 내려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내 말이 그 말입니다. 아까 티에르 공작 의기양양한 거 봤지요?”
술잔이 빠르게 비는 만큼 사내들의 목소리도 더욱 커졌다.
티에르 공작가를 떠나 따로 자리를 만들어 모인 귀족들이었다.
“그 꼿꼿하던 디에스티 공작조차도 요즘은 티에르 공작과 가깝게 지낸답디다. 그 요망한 티에르 공작이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덕이지요.”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그 출신도 하찮은 이한테 굽신거리게 생겼군요.”
모인 이들 전부 친황제파도 아니고 티에르 공작의 세력도 아니었다.
어중간하게 사이에 끼어서 이래저래 피를 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젊은 황제가 즉위했으니 무언가 판도가 달라지지 않겠냐며 기대한 게 엊그제 같은데, 하필 티에르 공녀라니.
사람들의 대화를 지켜보던 아쉴브 후작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아버지. 오늘 연회에서 말이에요, 티에르 공녀의 아이가 폐하의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어요.”
후작은 조금 전 보니카와 나눴던 대화를 한참이나 곱씹었다.
잠시 후.
“내게 한 가지 묘안이 있긴 하오만.”
눈을 뜬 후작이 침착하게 말을 꺼냈다.
“어떻게, 다들 들어볼 생각이 있소?”
.
.
“하, 지참금, 지참금…….”
공작이 피곤한 듯 단어를 중얼댔다. 그는 연회가 끝난 후, 내내 집무실에 틀어박혀 혼자 끙끙 앓고 있었다.
“황실로 귀속되면 되찾을 수도 없는데.”
안 돼, 그럴 수는 없지. 어떻게 손에 넣은 건데.
역시 이블린을 없애는 게 나을지도 몰라.
저대로 두면 언젠가는 내 머리 꼭대기 위에 서서 날 없애려 들 거야.
오늘만 봐도 그를 제 입맛대로 요리하려 들지 않던가.
“기껏 화해의 손길을 내밀었더니, 그걸 뿌리쳐? 건방지게.”
공작이 팔걸이를 부술 듯 움켜쥐었다.
“그렇다고 지금 없애 버리면, 유언장이 공개됐을 때 내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가 될 텐데.”
아직 마차 사고 목격자도 손에 넣지 못한 상태니 더욱 위험했다.
황제의 철통같은 보호 때문에 적당히 사고사로 위장할 방법도 마땅치 않았고.
“지긋지긋한 티에르의 핏줄 같으니라고. 유언장만 빨리 찾으면 되는데.”
어떻게 할까.
공작이 머리를 싸맬 때였다.
“공작님.”
“뭔가!”
“아쉴브 후작이 찾아왔습니다, 후작뿐만 아니라 피오넬 자작과 다른 분들도 함께입니다.”
“그자들이 나를 왜?”
연회도 끝난 마당에 왜 갑자기 돌아온 거지?
지금 엉뚱한 이들과 담소나 나눌 기분이 아니었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돌려 보…….”
“급한 일이니 빨리 뵈어야 한답니다.”
“……들어오라 해.”
어쩔 수 없다는 듯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허락이 떨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사내들이 우르르 집무실로 들이닥쳤다.
일부는 거만하다 싶을 만큼 어깨에 힘을 줬고, 일부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아니, 이 늦은 밤에 다시 찾아오신 이유가 뭡니까?”
“공작께 확인하고 싶은 게 있소이다. 사안이 사안인지라.”
공작이 애써 미소 지으며 묻자 아쉴브 후작이 어깨를 들썩이며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 뒤로 페런 백작의 얼굴도 보였다.
……혹시 마르다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겠지?
‘이런.’
눈 뜨고 재산을 빼앗기게 된 상황이라 제 명을 거역하고 연회에 나타난 마르다는 까맣게 잊고 말았다.
“무슨 일인데 그러오?”
공작이 태연한 척 턱을 치켜들자 아쉴브 후작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공녀의 아이가 휴이터 디에스티의 아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공작께서도 알고 계셨습니까?”
“……뭐라?”
이건 또 무슨 소리람.
티에르 공작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아니,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요? 기가 막히는군요.”
티에르 공작은 일단 짐짓 모른 척 시치미를 뗐다.
불쾌한 듯 인상을 쓰는 것도 물론이었다.
“소문의 출처가 어디입니까.”
“추, 출처가 뭐가 중요합니까? 소문이 있다는 게 더 문제인 거지요!”
아쉴브 후작이 괜히 더 큰 소리를 냈다.
제 딸에게 들은 이야기라는 걸 밝힐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소문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티에르 공녀가 황후가 되지 않게끔 잡음만 일으킬 수 있으면 되는 거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그런 소문이 나올 법도 하지요, 공녀가 호위기사단장직에 앉기 전까지는 폐하와 어느 접점도 없었고, 그동안 디에스티 가문과 가까이 지낸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공작께서도 최근 디에스티 공작과 자주 만나시지 않았습니까.”
함께 온 귀족들이 하나둘씩 말을 얹기 시작했다.
“그게 무슨……! 지금 내 앞에서 내 딸을 모욕하는 거요?”
“모욕이라니요? 오히려 공녀의 명예를 위해 미리 언질 드리는 거지요. 일이 커지기 전에 조용히 수습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흥.”
티에르 공작이 못마땅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물론 속으로는 웃고 있었다.
‘내가 손 쓰지 않고도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됐군. 휴이터, 네가 큰 역할을 해주는구나.’
공작가에 드나드는 휴이터가 거슬렸지만, 디에스티 공작의 눈치가 보여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옳은 선택이었던 거다.
“……좋소. 다들 내 딸의 자격을 의심하는 모양인데, 조만간 귀족 회의가 열리니까 거기서 이야기합시다.”
공작이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가지고 이렇게 몰려온 이유가 뭐겠나.
다들 자기 자식을 황후로 들이밀고 싶어 그런 걸 누가 몰라.
“이블린이 황후 자리에 적합한지 아닌지 다수의 의견을 들어보자는 말이오!”
“…….”
오히려 당황한 건 귀족들이었다.
다수의 의견이라니? 인원수로 밀어붙이면 공작도 별수 없을 텐데.
게다가 그런 불쾌한 소문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논하겠다고?
뭔가 믿는 구석이 있나? 그러지 않고서야.
다들 시선을 주고받으며 공작의 뜻을 짐작하려 애썼다.
하지만, 공작이 되레 당당하게 나오니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자, 결론에 만족했으면 그만 돌아가시오. 내 불쾌해서 더는 그대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구려. 손님들을 밖으로 안내해드리게.”
공작이 인상을 쓰며 보좌관에게 명령하자 서로 눈치를 보던 귀족들이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그리고 얼마 후, 한 명의 사내가 공작을 찾아왔다.
페런 백작이었다.
“허, 아직도 내게 할 말이 남았소?”
“아닙니다, 사실 저는 다른 이유로 찾아온 겁니다.”
백작의 쩔쩔매는 태도를 본 티에르 공작이 경계를 조금 풀었다.
“그래,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그…… 제가 얼마 전에 딸 아이를 입양한 걸 아시는지요?”
“듣기는 했소만…….”
“실은, 그 아이가 공작님의 먼 친척 아이랍니다.”
“!”
공작이 짐짓 놀란 척 눈을 크게 떴다.
모를 리 없었다. 그가 마르다를 백작가로 보내기로 하면서 적당히 포장한 정보였으니까.
“……그랬소?”
“그래서 말인데…….”
백작이 쩍쩍 갈라진 입술을 할짝대며 눈치를 살폈다.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지만, 귀족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제 딸 아이를 꼭 기억해 주십사 하고…….”
“지금 나더러 내 딸을 버리고 그대의 딸을 선택하라 이거요?”
“그럴 리가요! 공작께서 따님을 무척 사랑하신다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페런 백작이 펄쩍 뛰었다.
“당연히 공녀가 황후가 되겠지요! 하지만, 그 과정까지 귀족들의 반발도 클 겁니다!”
“그래서?”
“……그러니 제 딸 아이에게도 힘을 실어 주셨으면 할 뿐입니다. 적당히 황비 정도면 어떨까 하는 게 제 생각입니다.”
“…….”
“먼 친척이니 문제 될 것도 없고, 공녀에게도 든든한 편이 생기니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참고는 하겠소.”
공작이 웃음을 삼키며 목소리를 깔았다.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하단 말이야.
이렇게 먼저 욕심을 드러내 주시니.
“그 전에, 내가 그 아이를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어떻게, 가능하겠소?”
“무, 물론 가능하고 말고요. 감사합니다, 공작님.”
페런 백작이 육수처럼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만족스러운 얼굴로 사라졌다.
혼자 남은 공작은 내내 참았던 웃음을 마음껏 터뜨렸다.
“이블린, 봐라. 하늘은 내 편이다.”
네가 그리 소중히 여기던 놈이 네 발목을 잡을 줄은 너조차도 몰랐겠지.
“네 삶도 참 고약하기 짝이 없구나, 이블린.”
이 모든 것이 네가 부모를 잘못 만난 탓이니, 날 원망하지는 말아라.
* * *
“언제 그 많은 걸 준비한 거야. 바빴을 텐데.”
이블린이 아직 꺼지지 않은 배를 문지르며 눈꼬리를 내렸다.
늦은 새벽까지 황제궁 사람들과 먹고 마시며 어울리다가 돌아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던 참이었다.
“전 아무것도 안 했어요, 전부 폐하께서 준비해 주셨는걸요.”
“…….”
알리에타가 손사래를 치자 이블린의 시선이 대각선에 있는 바스티안에게 향했다.
응접실 소파에 길게 눕듯이 앉은 그는 알리에타가 이블린을 돌보는 걸 지켜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오늘, 공녀님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마님 돌아가신 이후로는 처음 이었잖아요.”
공작가에서는 늘 하녀 몇 명이 몰래 모여 케이크를 만들어 먹는 게 고작이었는데.
당사자보다 더 감격한 듯 연신 눈물 콧물을 뺀 알리에타의 얼굴은 퉁퉁 부어 있었다.
“공녀님, 다시 한번 생일 축하드려요. 부디 편안한 밤 되시기를.”
알리에타는 이블린의 손에 입을 맞추고 한 번 더 안아준 뒤에야 침실을 떠났다.
“아무래도 그대보다 하녀장이 더 감동한 것 같군.”
“감사해요, 폐하. 저도 물론 기뻤지만, 알리에타가 기뻐하니 더 좋아요.”
“아하, 앞으로 하녀장을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건가.”
깨달았다는 듯 감탄사를 흘린 바스티안이 몸을 일으켜 이블린의 곁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런데 이블린, 아까부터 궁금했는데 말이야.”
팔을 이블린의 등 뒤로 뻗은 바스티안이 낮게 읊조리며 고개를 숙였다.
“이건 언제까지 품에 안고 있을 생각이지?”
날카로운 눈동자가 씹어 삼킬 것처럼 아래로 향했다.
“그것도, 내가 아닌 다른 남자에게 받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