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그대는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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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그대는 악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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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그대는 악마야
2022.06.01.

“나더러 관례를 깨라는 말입니까? 첫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황비를 들이지 않는다는 걸 모두 알 텐데.”

“이미 공녀는 아이를 가진 상태니, 따지고 보면 관례를 깨는 것도 아니지요.”

“다들 제정신이 아닌가 봅니다.”
바스티안이 쿡 웃음을 터뜨렸다.
평소 같으면 눈치를 보며 꼬랑지를 말던 이들이 이토록 강경하게 나오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공작의 입김이 작용한 듯한데.
마음 같아서는 깨끗하게 무시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되면 이블린이 인정받지 못하는 황후가 되고 만다.
아무런 잡음도 없이 축복만 받게 해도 모자랄 판에.

“폐하, 공녀의 건강을 언급한 건 여러 문제 중에 극히 일부일 뿐입니다. 티에르 가문이라고 모든 흠을 덮어줄 수는 없습니다. 이런 소문이 돈 것만 봐도 공녀가 황후에 적합한지 의문입니다.”

“맞습니다, 폐하. 제국을 걱정하는 저희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지요.”
냉랭해진 바스티안의 시선이 다시금 티에르 공작에게 닿았다.
.
.

“네? 그게 말이 됩니까?”
휴이터가 책상을 쾅 내리쳤다.
그 모습을 본 디에스티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곧장 아들에게 달려온 거였다. 기가 막힌 건 공작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헛소문인 거냐.”

“아버지! 이블린을 모르세요? 이블린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아요.”

“그러게 왜 이런 소문이 생기게 만들어!”
공작이 속상한 마음에 애꿎은 화를 냈다.

“상대가 폐하라 해도 혼전 임신이다. 이미 물어뜯길 만한 먹잇감을 내어 준 상태란 말이다.”
그간은 두 사람의 위치가 위치인지라 다들 축복하며 넘겼을 뿐이었다.

“이블린의 행실을 문제 삼으려 작정한 이들인…… 어딜 가려는 거냐.”

“폐하께요, 아니면 뭐라도 해야죠! 가만히 있을 수 없잖아요.”
그 때문에 이블린의 명예가 땅에 떨어지게 생겼는데.

“진정해라. 보아하니, 그냥 해프닝 정도는 아닐 거다.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생길 것 같구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무엇이 문제일까. 전에도 잇속대로 움직이던 귀족 사회지만 전에 없이 균열이 더욱 심해지는 듯했다.

“우리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수만은 없겠다. 대책을 세워야겠다.”

“…….”

“그러니 당분간은 이블린과 거리를 두어라.”
공작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단호하게 명령했다.
아, 이블린.
도움은커녕 네 발목을 잡아버리다니.
휴이터가 입술에 피가 나도록 짓씹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되짚어 보던 휴이터의 기억이 어느 한 시점에서 멈췄다.

‘그때 그 영애들. 우릴 보고 있었는데.’
어느 가문의 영애들이었지?
휴이터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 * *

“……황비를 들이라고요?”
귀족 회의 내용을 전해 들은 이블린이 눈을 깜빡였다.
날 황후로 올릴 거라면, 황비라도 들이라고?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을!

“폐하께서는요?”

“침실로 가시는 걸 보고 오는 길입니다. 그…… 화가 많이 나신 것 같았습니다.”
오단이 눈썹을 축 내리며 대답했다.

‘평소 같았으면 업무를 볼 시간인데.’
고민하던 이블린이 단장실 책상을 짚고 일어섰다.
이른 오후부터 시작해 늦은 밤까지 이어진 회의였다. 긴 시간 동안 시달렸을 바스티안이 걱정됐다.

“폐하께 가보시려고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단장님.”
오단이 살았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흘렸다.
.
.
침실로 돌아온 이블린은 금방 바스티안을 찾아냈다.
그는 침실 테라스에 긴 다리를 올리고 걸터앉아 어두워진 하늘을 보고 있었다.

“폐하.”
바스티안의 무표정한 옆얼굴을 가만히 지켜보던 이블린이 슬그머니 다가갔다.

“아…… 이블린.”
차가웠던 얼굴에 금세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바스티안이 긴 다리를 내려 자리를 만들어 주자 이블린은 차가운 테라스를 짚으며 걸터앉았다.

“회의 내용, 저도 들었어요.”

“그런데 왜 내 눈치를 살피는 거지? 눈치를 봐야 하는 건 내 쪽 아닌가.”

“전부 저 때문인걸요.”
이블린이 미안한 기색을 드러냈다.
[……그대가 말한 추억의 장소는 찾을 수 없었어요. 존재조차 하지 않는 것 같아요. 새로운 선물을 기다릴게요……]
에바와 소통하던 사내에게서 찾아낸 건 작은 종이였다.
연애편지를 가장했지만, 암호라는 걸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로써 부친이 황궁 내에 찾는 게 있다는 건 확실해졌다.
그녀를 통해서는 불가능하고, 에바도 찾을 수 없는 것.
마르다의 모친을 버렸으면서 마르다를 버리지 않은 이유가 어쩌면 거기 있을지도 모른다.
마르다를 황궁으로 들인다면 그 정체를 확실히 알 수 있을 듯했다.
이블린이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

“폐하, 귀족 회의의 뜻을 따르는 게 어떨까요?”

“……뭐?”
바스티안의 표정이 형용할 수 없이 구겨졌다.

“지금 내게, 황비를 들이라는 건가?”

“그건 아니고…… 황후를 심사로 결정하자고 하면 어떨까요? 가장 황후에 적합한 사람을 찾아 검증하자고요.”

“…….”

“이기적인 말이라는 걸 잘 알지만, 지금으로서는 이게 가장 좋은 방법 같아서요. 폐하께서 저 때문에 계속 귀족들과 부딪치는 건 원치 않아요.”

“이블린, 그건 그대가 신경 쓸 문제가 아니야.”

“제가 아니었다면 벌어질 일도 아니었죠.”

“난 그대 일에 한해서는 어떤 것도 양보하고 싶지 않아.”
바스티안이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그대는, 내가 다른 여인들과 함께여도 아무렇지도 않은가 봐.”

“……네?”
아니, 그런 게 아닌데…….

“나를 그렇게 타인과 공유하고 싶은 건가. 난 있지도 않은 아이의 부친으로 다른 이가 거론되는 것도 화가 났는데.”
당황한 이블린의 눈동자가 바스티안의 얼굴 위를 헤맸다.
바스티안이 이토록 적나라한 감정을 드러내는 건 처음이었다.

“이블린, 나 지금 화가 많이 났어.”

“폐하, 그게 아니라…… 이건 이유가 있어서 받아들이자고 한 건데…….”
이블린이 난감해하며 볼을 붉혔다.
바스티안이 화를 내니 갑자기 머릿속이 엉켜버린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저도 폐하를 빼앗기고 싶은 마음은 없는데요…….”

“……그래서?”
이블린이 변명을 시도하자 바스티안의 말투가 조금 너그러워졌다.
이블린이 쩔쩔매는 건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니 이참에 누려 볼 참이었다.

“그래서, 그러니까…….”
어떻게 하면 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이블린은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말들을 고르고 골랐다.
처음부터 아버지에게 공작위를 돌려받는 것 외에 다른 목표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 가지 욕심이 생겼다.
바스티안의 애정도 따스한 눈빛도 전부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
지극히 개인적인 바람이자 욕망이었다.

“그래서, 화를 어떻게 풀어 줄 거지?”
바스티안이 채근하는 말에 이블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아무리 봐도 답은 하나였다.
지금은 이기적으로 뻔뻔하게 나가는 수밖에.

“저, 생각해 봤는데요, 폐하. 조금 늦었지만,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은 게 있는 것도 같아요.”

“……그게 뭐지?”
바스티안의 한쪽 눈썹이 위로 솟았다.

“아버지에게 공작위를 돌려받을 예정이니까…….”

“…….”

“……물려 줄 아이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
가만히 듣고 있던 바스티안의 입술이 곧 길게 늘어졌다.
아, 그러니까, 지금 그 말은…….

“유혹하는 말이 무척 티에르 답군.”
아주 우직하고 강직해.
이블린의 귓불까지 순식간에 물들었다.

“어디 봐.”
바스티안이 손을 뻗어 이블린의 얼굴을 제 쪽으로 돌렸다.

“음, 그대가 이런 식으로 유혹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는데.”
확인 사살하듯 한 마디를 더 붙이니 이블린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입술을 말아 물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결혼식을 늦추고 황비를 들이라는 말을 하기에 일부러 더 서운한 감정을 드러냈다.
그래도 솔직히 이블린이 이런 식으로 반응할 줄은 몰랐다.
더 많이 재고 고민하리라 여겼는데, 이것저것 과정은 건너뛰고 곧장 결론으로 치달을 줄은 몰랐으니까.
조금 전의 서운함은 어디로 가고 즐거운 행복이 머리와 가슴을 채우는 기분이었다.

“이블린, 이 상황을 벗어나려고 수를 쓰는 거라면 곤란해.”
바스티안은 짐짓 표정을 숨기며 엄포를 놓았다.

“이런 식으로 유혹하면 내가 못 이기는 척 넘어가리라 여긴 건가?”

“폐하, 저는…… 진심으로 말한 건데요.”
이블린이 부끄러움을 걷어내고 한층 더 진지해진 얼굴로 대답했다.

“갑자기 드리는 말씀은 아니에요.”
이블린은 몸을 돌려 바스티안과 본격적으로 마주 봤다.
여기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으면 자칫 이상한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바스티안이 제 진심을 오해하게끔 둘 생각은 없었다.

“처음에는 의심하고 경계했어요.”

“……나를?”

“네.”
바스티안의 눈이 가늘어지자 이블린의 콧잔등에 살포시 주름이 졌다.

“그러다 감사하는 마음이 커졌고, 그 후에는 안도했어요. 곁에서 지켜보고 겪은 폐하가 정말 믿어도 될 좋은 분이라서요.”

“…….”

“눈치채셨겠지만, 저도 계속 혼란스러웠어요. 고민했어요. 폐하께서 제게 하시는 게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어서.”

“그건…….”

“그런데, 제게 하시는 말 한마디, 행동 하나가 어느 순간부터는 진심으로 느껴졌어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다가 조금 부끄러운 듯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사소한 모습까지도 사랑스러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바스티안이 계속하라는 듯 잠자코 기다리자 이블린이 다시 입술을 열었다.

“그게, 싫지 않더라고요. 오히려…… 좋았던 것 같아요.”

“…….”

“네, 좋았어요.”
이블린이 제 말에 확신을 더하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고, 상황이 정리된 건 아니라서 망설였지만…… 확실히 하고 싶었어요.”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또렷한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큰 소리는 아니지만 청아한 음색에는 이블린의 올곧은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고는 했다.
그러니 지금 이블린이 하는 말에 의심 한 올 품는다는 게 불가능했다.

“……그렇군.”
바스티안의 입꼬리 끝이 미끄러지듯 올라갔다.

“그랬군.”
다시 한번 읊조린 그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이블린의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블린은 바스티안을 따라 고개를 한참 위로 올려야 했다.
바스티안의 커다란 그림자가 이블린의 몸을 에워쌌다.

“그대는 날 기쁘게 하는 법을 잘 아는듯해.”
바스티안이 상체를 기울이며 속삭이는 말에 이블린은 조금 안도했다.
그녀의 마음이 잘 전해진 모양이었다.

“이런 때에 솔직하게 나오다니, 그대는 악마야, 이블린.”
이블린은 반박하지 않고 난감한 웃음만 흘렸다.
이기적으로 굴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블린, 내 마음은 풀렸는데…….”
바스티안의 손끝이 스치듯 이블린의 귓불을 어루만졌다.

“이제 어떻게 할 생각이지?”

“……네?”

“내게 유혹의 손길을 뻗은 건 그대였잖아.”

“아.”
바스티안이 한층 더 짙어진 눈빛으로 이블린을 바라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