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너의 것이 된다
(71/95)
71. 너의 것이 된다
(71/95)
71. 너의 것이 된다
2022.06.05.

‘이제 어떻게 하지?’
막상 질러놓고 나니 무얼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어둠 속에 달빛을 받은 바스티안의 눈동자만이 야성적으로 빛나서, 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다.

“이런, 이블린.”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미세한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벌써 후회하는 건 아니겠지?”

“…….”
이블린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대답에 따라 이다음에 벌어질 일이 달라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후회한다고 하면 물러설 바스티안을 안다.
조금 짓궂게 장난이야 치겠지만…….
그럼 만약,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아마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겠지.
……눈앞의 이 사람과 함께.
바스티안이 경고한 것처럼, 연기를 핑계로 입을 맞추던 때와는 모든 것이 달라질지도.

“…….”
이블린은 제 대답을 기다리는 바스티안을 눈에 담았다.
여유로운 듯 미소 짓고 있지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보는 시선에서 바스티안이 긴장한 게 느껴졌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빽빽한 공기에서도.

‘어쩌면, 꽤 오래전부터 이 순간이 오는 걸 각오했는지도 모르겠어.’
그와 수없이 입을 맞추고, 그의 곁에서 잠드는 동안에.
갈수록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짙은 애정과 숨겨지지 않는 욕망으로 물드는 걸 보면서.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손을 슬며시 움켜쥐며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요. 후회 같은 거 안 해요.”
동시에 고개를 내린 바스티안이 그대로 이블린의 입술을 삼켰다.

“!”
바스티안의 무게가 더해지며 이블린의 몸이 테라스 밖으로 기울었다.
바스티안이 곧장 허리를 감싸 안았지만,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느낌에 목덜미가 오싹했다.
이블린은 본능적으로 바스티안의 목에 팔을 휘감으며 매달렸다. 몸이 밀착되며 열기 오른 입술이 더욱 깊이 얽혔다.
조마조마한 불안함 속에서, 바스티안만이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된 것 같았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그녀의 팔 안에 갇힌 남자가 더없이 소중해진 기분이었다.

‘세상에 하나뿐인 사람이야.’
이블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호흡이 점점 가팔라졌다.
그간의 입맞춤과는 많은 것이 달랐다.
다정하게 시작해서 조금씩 농밀하게 변해가고는 했는데, 지금은 잡아먹힐 것 같다는 기묘한 두려움이 몸을 지배했다.
그녀의 볼과 목덜미를 감싼 손의 뜨거운 온기도.
품에 안긴 몸이 점점 빈틈없이 밀착되어가는 것도.
입술을 건드리고 벌리며 밀고 들어오는 부드러운 힘도.
모든 것이 감각을 예민하게 일깨우는 느낌이었다.
바스티안은 이블린이 몇 번이나 가쁜 숨을 토해내고서야 입술을 떨어트렸다.
아직 정돈되지 않은 숨결이 젖은 입술 위에 흩뿌려졌다.

“잘 생각해, 이블린. 난 놔 주지 않을 거니까.”
바스티안이 이마를 맞댄 채 속삭였다.
이미 온몸을 속박하고 있으면서 말은 다정하기만 하다.
늘 선택권을 그녀에게 주는 바스티안의 배려가 새삼 피부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어차피 놔 줄 생각도 없으면서.’
그러면 나도 그 마음에 더 부응해주고 싶어지잖아.

“폐하, 생각해 봤는데요…….”
이블린도 바스티안에게만 들릴 만큼 작게 속삭였다.

“저희 계약의 의미는…… 이미 퇴색된 지 오래인 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렇군.”
수긍한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단번에 안아 올렸다.
이블린의 다리와 몸을 받쳐 가볍게 안아 든 바스티안이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망설임 같은 건 없었다.

‘어쩌지.’
이블린은 새로운 긴장감이 몸을 에워싸는 걸 느꼈다.
침대까지 가는 짧은 몇 걸음이건만, 세상에서 가장 긴 거리를 걷는 듯했다.
이 밤을 버틸 수 있을까.
내가 그럴 수 있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누군가 심장을 억지로 쥐어짜는 기분이었다.
이블린은 그만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감은 눈 위로 따뜻한 입술이 닿았다.
콧날과 이마에도, 볼과 입술에도 차례로 나비가 앉았다가 날아가듯 연신 온기가 닿았다.
바스티안이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는 순간, 이블린의 등에 닿는 공간이 물결치듯 출렁였다.

“왜 그래?”
서서히 이블린의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던 바스티안이 나긋하게 읊조렸다.
여기저기 요동치는 연녹색 눈동자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너무 밝아서, 부끄러운데요.”

“난 그대 얼굴이 보고 싶은데.”
물론 얼굴만 보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부끄러워서 정신을 잃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요? 지금 기절할지도 몰라요…… 전부, 기억하고 싶은데…….”

“…….”
바스티안은 입안이 마르는 걸 느꼈다.
이렇게까지 사랑스러울 수 있나.
대체 넌 어떤 존재이기에 이토록 사람을 흔들어 놓는지.
바스티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상체를 일으키자 동시에 침실의 모든 빛이 사라졌다.
가라앉은 어둠 속에서 심장 박동 소리만 들렸다.

“사적인 일에 힘을 쓰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어쩐지 민망해진 이블린이 일부러 다른 말을 꺼내자 쿡 웃는 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들렸다.

“이게 어떻게 사적인 일이야, 제국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일인데.”

“……너무 과해요, 그런 의미를 부여하시는 건 좀…….”
진짜 부끄러워 미칠 것 같으니까.

“안 할 수가 없어.”
바스티안의 목소리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지금껏, 오늘처럼 떨린 적은 없었으니까.”

“…….”
아, 나만 긴장한 건 아니구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리 생각하니 떨림이 좀 잦아드는 듯했다.

“그대는…… 그대의 할 일을 해, 이블린.”
읊조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잡아 제 셔츠 단추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이블린의 몸을 당겨 제 무릎 위에 앉혔다.
침을 꼴깍 삼킨 이블린이 떨리는 손끝으로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셔츠가 벌어질 때마다 그간 애써 못 본 척 외면했던 탄탄한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봐야지, 이블린. 그대 거잖아.”
바스티안이 눈을 돌리려는 이블린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블린의 볼과 귓불이 불이 번지듯 붉게 물들었다.

“똑똑히 눈과 기억에 새기도록 해, 이블린. 오늘 밤, 내가 어떻게 그대의 것이 되는지.”
정염에 젖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대를 어떻게 만지고, 소중히 여기는지.”
그리고 미끄러지듯 입술로 내려왔다.
몸을 가리고 있던 허물이 사그락거리며 벗겨지는 게 느껴졌다.

“…….”
이블린은 맨 어깨에 닿는 공기를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루만지는 손길이 질척하고 끈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어쩐지 그 손길에 울며 매달리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또 잠들어 버렸나.’
잠에서 깬 바스티안이 픽 웃음을 흘렸다.
전에는 그토록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았는데, 이블린의 곁에 있다 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기 일쑤였다.
바스티안은 팔에서 느껴지는 무게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블린은 두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은 채 기절한 듯 잠들어 있었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이블린을 몰아붙이고 나니 어느새 새벽이었다.

“폐하, 그만…… 정말 더는…….”
울먹이는 이블린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추고, 보드라운 몸을 욕심껏 안은 뒤에야 놔주었다.
계속 젖어 있던 눈가가 붉었다.

‘무리하게 했나.’
뒤늦게 죄책감이 일었지만,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는 안도감을 주었다.
바스티안이 손끝으로 이블린의 눈가를 부드럽게 문지르자 이블린이 살짝 짜증 섞인 신음을 흘렸다.

‘이런.’
서둘러 손을 떼어냈지만, 늦은 모양이었다.
몇 번 깜빡이던 눈이 흐릿하게 그를 보는 것 같더니 금방 빛을 찾았다.

“……아침인가요?”
가라앉은 목소리가 낯선지 이블린이 제 목을 어루만졌다.

“아니, 아직 밤이야. 더 자.”
거짓을 속삭인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래도 이블린은 밀어내지 않는다. 전처럼 온몸이 딱딱하게 굳는 것도 아니었다.
당연하다는 듯 얌전히 몸을 맡기는 이블린을 보며,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이제 정말 이블린이 자신의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이블린이 그를 전부 받아주었다는 것도.
더없이 소중한 존재를 조심스레 그러안으며 눈을 감던 바스티안이 흠칫 몸을 굳혔다.
그의 품에 안긴 몸이 뜨거웠다.
……뜨거워?
바스티안이 눈을 번쩍 떴다.

“이블린?”

“네.”
대답하던 붉은 입술이 끙 앓으며 열기 어린 숨을 토해냈다.
이블린에게서 미열이 느껴졌다.

‘설마.’
황급히 몸을 일으킨 바스티안이 침실 문을 벌컥 열었다.

“!”
마침 노크를 하려던 알리에타가 화들짝 놀라 바스티안을 올려다봤다.
바스티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폐하?”

“다트, 다트를 불러.”
.
.

“…….”
침실 내에 숨이 막힐 것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다트는 이블린의 손목을 쥔 채 집중하고 있었고, 침대 곁에 선 바스티안은 초조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블린은 뾰로통하게 있다가 바스티안을 노려보다시피 쳐다봤다.
나이트가운이 바스티안의 한쪽 어깨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
다트 앞이라지만, 흐트러진 차림을 보이다니 평소답지 않았다.

“폐하, 전혀 아무 문제 없습니다.”
잠시 후, 손을 떼어낸 다트가 한숨 쉬듯 말했다.

“제대로 확인한 건가.”

“네, 그렇습니다. 오히려 더 좋아진 것 같군요.”
다트가 한 마디마다 힘을 실으며 상관을 올려다봤다.
바스티안이 어릴 때부터 봐왔지만, 그가 이토록 당황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아.”
바스티안이 머리를 짚으며 짙은 한숨을 토해냈다.

“제가, 괜찮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블린이 민망함을 숨기지 못하고 입을 비죽였다.

“미안해요, 다트.”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끌려 나온 다트는 바스티안 못지않게 옷차림이며 꼴이 엉망이었다.

“이블린. 이상한 기분이 든다거나, 속이 울렁거린다거나…….”

“전혀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뭔가 낯선 감각은 있지만, 그 이유는 알 것 같고.
그걸 제외한다면 오히려 기분이 더 좋았다.
익숙한 상쾌함이었다. 종종 단장실이나 침실에서 느꼈던.

“정말 괜찮은 건가?”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표정에 떠오른 원망을 못 본척하며 물었다.

“네. 그러니까, 제발 이제 이 소란을 정리 해주시겠어요?”
우리가 평소와 다른 밤을 보냈다고 동네방네 소문이라도 낼 작정이 아니라면요.
이블린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 * *

“아침부터 어딜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아, 후작님.”
혼자 낄낄대며 돌아가던 다트가 곁에 따라붙은 다베르 후작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잠깐 황제궁에 들렀습니다.”

“황제궁?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폐하께서 또 단장의 건강을 염려하셔서요.”

“……그렇습니까?”
그러고 보니, 함께 진료일지를 보고 있었지.
그저 지나치게 아껴서 걱정하는 것만은 아닐지도.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건가.’
잠시 생각하던 다베르가 다트의 곁에 따라붙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