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 부부싸움
(72/95)
72. 부부싸움
(72/95)
72. 부부싸움
2022.06.08.

“……가만 보면, 폐하께서는 유독 단장의 일에만 예민하십니다. 특히 건강 관련으로요.”
바스티안이 어떤 사람인지는 곁에서 오랜 시간 지켜보며 파악했다.
차갑고 냉철한 군주.
그가 지켜본 바스티안은 그랬다.
그런 바스티안이 이블린과 관련되면 낯선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그런 제 모습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이고.
아니, 오히려 이블린 외의 이들에게 더 잔인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애정이 커서 그런 거 아니겠습니까? 젊음이 좋지요.”
다트가 껄껄 웃으며 농담으로 넘겼지만, 후작의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폐하를 옆에서 모셔야 하는 저로서는 마냥 웃을 수만은 없군요.”
다베르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솔직히 폐하의 저런 모습이 낯설기만 합니다.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요. 게다가 은근히 비밀이 많으시단 말입니다.”

“글쎄요, 워낙 혼자인데 익숙하신 분이셔서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트가 뒤늦게 미안한 기색을 드러내며 진지하게 대화에 임했다.

“그런데, 단장의 건강에 그토록 신경 쓰시는 이유가 있는 겁니까?”
다트의 달라진 태도에 다베르가 뜸을 들이다 궁금했던 주제를 꺼냈다.

“얼핏 보니, 황실의 지난 진료 기록을 보고 계시던데…… 혹 두 분께 무슨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선 황후 폐하가 일찍 돌아가셨잖습니까. 그러다 보니 폐하께서 조금, 두려움 같은 걸 갖고 계신듯합니다.”

“……그렇습니까?”
그 두려움과 진료 일지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걸까.
하지만 다트는 그 이상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단장과 관련해서 제가 알아둬야 할 건 없습니까? 후에 문제가 생기기 전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하니까요.”

“음, 후작께서 딱히…….”

“아, 제가 그 황실 진료 기록을 봐도 되겠습니까?”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폐하의 허락 없이는 볼 수 없는 기밀 자료이기도 하고요.”

“……그렇군요.”

“혹 폐하께 여쭤보심이?”

“아…… 아닙니다. 그럼, 또 뵙지요.”

“네, 후작님.”
다베르가 웃으며 몸을 돌렸다.
곧 제 침실로 돌아온 다베르는 문을 걸어 잠그고,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를 걷어냈다.
태피스트리 뒷면에 두껍게 덧댄 천을 뜯어낸 다베르가 서류 뭉치를 꺼내 들었다.
바스티안을 따라 제국으로 넘어온 후, 바스티안은 그에게 여느 귀족들처럼 지낼 집과 재산을 주려 했다.
하지만, 다베르는 그 제안을 거절하고 황궁에 머무르길 선택했다.
그의 손에 들린 서류가 바로 그 이유였다.

“아무나 황후가 되는 건 아닌 건가.”
다베르는 서류를 빠르게 눈으로 훑었다.
바스티안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가 정령의 힘에 대해 알아낸 것들이었다.
아직 확인하지 못한 추측과 가설도 많았다.

‘그냥 좋아서 곁에 두신 것만은 아닌 듯하군.’
다트와 나눈 대화에서 특별히 얻어낸 건 없었지만, 충분히 짐작 가능한 부분이었다.
이블린 티에르가 황제의 힘과 어느 쪽이든 연관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

‘어떻게 해야 들키지 않고 확인할 수 있을까.’
오래도록 제국을 대륙의 패자로 만들어 준 비밀스러운 힘.
그 비밀에 접근할 수만 있다면.

‘서두르면 안 돼.’
어금니를 아득 문 다베르가 서류를 다시 숨겼다.
* * *

“혹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세요.”

“그러지.”
침대 옆의 작은 티테이블 위에 쟁반을 내려놓은 알리에타가 허리를 꾸벅 숙인 뒤 뒷걸음질로 빠져나갔다.
아침부터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난 뒤, 바스티안의 명령으로 이블린의 아침을 준비해 온 거였다.
쟁반을 든 바스티안이 커다란 베개에 파묻히듯 앉아 있는 이블린에게 다가갔다.
쟁반 위에는 묽게 만든 수프와 부드러운 빵, 과일 몇 종류가 골고루 담겨 있었다.

“대체, 아침부터 이게 무슨 창피인가요.”
무릎을 끌어안고 있던 이블린이 가까워진 인기척에 고개를 휙 들어 올렸다.

“그, 음…….”

“…….”

“놀라서 그랬어. 열이 나니까, 잘못된 줄 알고…….”
말끝을 흐린 바스티안이 슬쩍 이블린의 표정을 확인했다.
이블린은 여전히 어이없다는 듯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새하얀 얼굴이 어젯밤과는 여러모로 다른 의미로 붉게 물든 걸 보니,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이블린이 씨근대며 중얼댔다.

“미안해, 이블린. 내가 잘못했어.”
곧장 이블린의 손을 붙잡아 펼친 바스티안이 손바닥에 제 볼을 묻었다.

“처음인데…… 적당히 해야 했는데…… 미안.”
이블린은 시무룩한 바스티안을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제 눈치를 살피며 애교를 부리는 모습이 꼭 커다란 강아지를 보는듯했다.
아니, 똑똑하고 능글맞은 늑대쯤?
어쨌든 바스티안이 저답지 않게 저자세로 나오는 걸 보니 민망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폐하, 사람은 그렇게 쉽게 다치지 않아요.”
적어도 남녀관계 문제로는 그렇지 않을까요.

“너무 과한 걱정이었어요, 제가 무슨 검에 맞은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비슷…….”
이블린이 째려보자 바스티안이 입을 다물었다.

“음, 이블린. 일단…… 좀 먹을까?”
바스티안이 서둘러 옆에 두었던 쟁반을 끌어왔다.
이미 적당히 식은 수프를 숟가락으로 떠서 호호 불기까지 한 뒤에야 이블린의 입가로 가져갔다.

“자, 먹자.”
바스티안은 잠자코 입을 벌리는 이블린을 보며 또 다른 고민에 빠졌다.
오늘은 이블린이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게 할 생각이었다.
다트는 괜찮다고 했지만, 혹시 모르니까.
하지만, 이블린이 흔쾌히 따라줄지 의문이었다.

“먹고, 오늘은 쉬도록 해.”

“출근해야 하지 않을까요? 귀족회에서도 건강 문제를 툭하면 걸고넘어지는데.”
이럴수록 더 강한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나?

“그리고 몸 상태도 괜찮은데.”
미열이 오르긴 했지만, 확실히 몸이 가벼웠다.
이것도 바스티안이 말한 정령의 힘과 관련된 걸까 궁금해졌다.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그래도 오늘은 쉬는 게 좋겠어. 어젯밤 무리했으니까.”
어젯밤.

‘아.’
순간 다양한 장면이 이블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의 명령대로, 어젯밤은 강렬한 기억으로 새겨진 듯했다.

“……다시 열이 오르는 건가? 얼굴이 붉은데.”

“아니에요.”
이마를 짚으려는 바스티안의 손을 잡아 내린 이블린이 크흠 헛기침한 뒤 목을 가다듬었다.
아침부터 바스티안이 요란하게 구는 바람에 민망할 틈도 없었는데,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참.”
애꿎은 빵만 뜯어 입으로 가져가던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젯밤, 급하게 전개된 상황에 바스티안에게 미처 말하지 못한 게 있었다.
그간 에바에 대해 함구해 왔는데, 이제는 털어놓을 때가 된 것 같았다.

“폐하, 혹시 황궁 내에요. 외부인의 접근이 불가능한 장소가 있을까요? 숨겨진 장소라든가…… 정확히는 제 부친이 찾고 싶어 할 만한 곳이요.”

“음?”
바스티안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구겼다.

“사실…….”
그리고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상황을 보고한 이블린은 곧 후회하고 말았다.

“그걸, 지금껏 내게 숨겼다고?”
이야기가 끝났을 때, 바스티안의 눈빛은 무서우리만큼 형형해져 있었다.

“어떻게 내게 숨길 수가 있지?”
기사단조차 이블린의 명을 따라 숨겼다는 사실이 더 화가 났다.

“다들 제정신이 아니군. 제 본분을 잊은 게 분명해.”

“폐하, 그게 일부러 숨긴 건 아니고…….”
이블린이 본능적으로 자세를 바꿨다.

‘어떡하지.’
상황이 다시 역전된 것 같았다.

“이블린, 그대가 내게 이럴 줄은 몰랐는데. 설마, 내가 웃으며 넘기리라 생각한 건가? 그래서 숨겼어?”
차분한 말투였지만, 바스티안이 서운해한다는 걸 모를 리 없었다.

“그냥 좀 지켜보려고 했어요. 말씀드리면 당장 내보내실 것 같아서…….”

“당연한 일이야. 당장 그대에게 어떤 해를 가할지 모르는 이를 이토록 오래 곁에 두었다고? 그런 일을 대비하려고 황궁 내 인원을 솎아낸 건데.”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 위험한 인자를 두고 있었다니.

“……죄송해요, 폐하.”

“하, 황후 후보 소리를 꺼낸 것도 이런 맥락이겠군.”

“……네.”
역시 부친과 마르다의 관계는 이미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장단만 조금 맞춰 주시면…… 안 될까요?”
이블린의 마지막 말이 기어들어 가듯 작아졌다.

“그대는 정말, 날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야. 내게 다양한 감정을 느끼게 해.”
바스티안은 제 팔을 붙잡는 이블린의 손가락을 지그시 내려봤다.

“그리고 난 그대의 손길 하나에 이토록 쉽게 풀리고 말이야. 그대가 날 이용하고자 한다면, 내 뼈까지도 전부 내주게 생겼군.”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그래서, 내게 또 숨기는 건? 이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말해야 할 거야.”

“그거 외엔 없어요. 정말이에요.”

“이블린, 그대가 가문의 일에 몰두하는 걸 반대하지는 않아. 하지만, 내게는 그대가 가장 우선이라는 걸 명심해야 해.”

“네, 명심할게요.”

“그대는, 이럴 때만 유순해지는군.”
순순히 돌아오는 대답에 바스티안의 목소리가 한층 누그러졌다.
잠시 주춤대던 이블린이 이내 다리를 세우고 바스티안의 목을 그러안았다.

“이해해주셔서 감사해요.”
이블린의 금발이 찰랑대며 바스티안의 콧잔등을 스쳤다.
바스티안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피었다. 이블린의 달콤한 체취에 잠식될 것 같았다.

“그만 떨어져, 이블린. 지금도 끌어안고 입 맞추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있으니까.”

“어…… 하셔도 되는데.”

“……이거 봐, 그대는 아무래도 악마인 게 분명해.”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목을 놓아주며 중얼거리자 바스티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참 단순하군. 그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풀리는 걸 보면.”

“저는 폐하 앞에 있을 때가 제일 복잡해요.”

“그건 또 왜지?”

“모르겠어요, 그냥 신경이 쓰여서요. 이것저것…….”

“내가 신경 쓰여?”

“……당연한 거 아닐까요? 어쨌든 요란한 아침이네요.”
뜨거웠던 어젯밤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서로 화가 날 일을 만들었으니.

“이런 게 부부싸움일까요?”
이블린이 피식 웃으며 해맑게 말하자 바스티안의 눈이 가늘어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말을 사랑스럽게 하는 거지?”

“네?”
부부싸움이란 단어가 사랑스럽나?

“난, 평생 그대를 이기지 못할 거야.”
바스티안은 결국 참지 못하고 조금 부어올라 도톰해진 입술을 물었다.
* * *

“황후 후보? 그것도 공녀까지 후보로 삼겠다고요?”
황제가 내린 결론을 듣게 된 이들은 어리둥절해졌다.

“말이 후보지 티에르 공녀로 내정된 거 아닙니까? 솔직히 티에르 공녀를 어떻게 이긴단 말입니까?”

“그래도 방법이 없잖습니까. 여기서 더 버텼다가 역효과라도 나면 어쩌려고요. 폐하께서 고집을 부리시면 어차피 방법도 없습니다.”

“그렇지요. 일단 궁으로 들여보내고 다음 일을 생각하는 게 어떻습니까.”

“그래서, 누가 황후 후보로 가는 게 좋겠습니까? 일단, 디에스티 공작 쪽에서는 내보내지 않을 테고.”

“크흠, 내 딸 아이는 내보낼 생각이오.”
아쉴브 후작이 당당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그럼, 아쉴브 영애만 추천하는 것으…….”

“저, 제 딸 아이도 보낼까 합니다.”
눈치만 보던 페런 백작이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