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보시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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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보시다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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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보시다시피
2022.06.12.
“축하해요, 보니카! 우린 당연히 보니카가 황궁으로 가게 될 줄 알았어요.”
아쉴브 후작가의 응접실에 화기애애한 웃음소리가 퍼졌다.
“황궁으로는 언제 가는 건가요? 가면 우리도 불러주는 거죠? 황궁에 또 놀러 가고 싶어요!”
“어머, 다들 설레발은? 후보가 됐다뿐이지, 아직 정해진 것도 없어요.”
보니카는 황후 후보 소식이 돌자마자 발 빠르게 찾아온 영애들을 반갑게 맞았다.
벌써 아첨하려고 제비 새끼처럼 지저귀는 소리가 듣기 나쁘지 않았다.
“이제야 뭐가 제대로 돌아가는 듯하네요. 안 그런가요?”
“그럼요, 솔직히 티에르 공녀는 가문의 특혜를 받은 거 아닌가요?”
“공녀가 훌륭한 영애인 건 틀림 없으니까요.”
보니카가 여유롭게 찻잔을 내려놓으며 나긋나긋 말했다.
조급함이 사라지고 나니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황후가 되면 좋지만, 황비로 남아도 괜찮다. 어떻게든 황제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뭐든 좋았다.
언젠가 공녀를 향한 황제의 애정은 식을 거고, 그 자리에 제가 들어갈 기회는 찾아올 테니까.
최근에는 암암리에 유명한 코르티잔을 찾아내 밤 생활의 비법까지 배우고 있었다.
귀족 영애의 표본이나 마찬가지인 공녀를 이길 만한 방법이 있다면, 전부 동원할 생각이었다.
‘나도 손 놓고 바라만 보지는 않을 거야.’
보니카가 허리를 더 꼿꼿이 세워 앉을 때였다.
“그런데, 페런 영애는 또 뭔가요? 당연히 보니카와 티에르 공녀, 두 명만 후보가 될 줄 알았는데요.”
“…….”
누군가 던진 짜증 섞인 말에 보니카의 입술 끝이 꿈틀거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페런 영애라니, 좀 당황스럽긴 하네요. 물론 보니카의 경쟁 상대가 되는 건 아니겠지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지 않나요?”
“좀, 본인이 낄 만한 자리인지 아닌지 분간을 못 하나 봐요. 황성에 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다들 우아한 말투로 한마디씩 비난을 던질 때였다.
“좀 늦었어요.”
마침 피오넬이 마르다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페런 영애가 꼭 같이 오고 싶다고 해서…….”
두 사람이 등장하자 묘하게 바뀐 분위기를 느낀 피오넬이 난감해하며 말끝을 흐렸다.
“어서 와요.”
보니카가 호스트답게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페런 영애. 영애도 황후 후보에 이름을 올렸다면서요?”
마르다가 자리에 앉자마자, 누군가 노골적인 경멸감을 드러냈다.
“네, 맞아요.”
“영애가 그런 자리에 야망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공격적인 말에도 마르다는 생글생글 웃었다.
“네? 야망이라니요? 저는 아쉴브 영애를 돕는 역할로 함께 들어가게 된 건데요?”
“……돕는 역할?”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 영애들의 눈초리가 조금 유순해졌다.
‘하긴, 페런 영애의 위치를 생각한다면…….’
‘역시 그렇죠?’
말이 황후 후보지, 황제의 사랑을 못 받는다면 잘 풀려봐야 외로운 황비 신세였다.
게다가 경쟁 상대가 ‘그’ 티에르 공녀다. 보니카나 그 자리를 열망하지, 어지간한 귀족 영애라면 원치 않는 자리였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적당한 귀족 가문과 혼약을 맺는 게 훨씬 나으니까.
“힘내요, 영애…….”
어느새 마르다를 보는 시선에 측은함이 섞였다.
“네, 고마워요!”
마르다는 더 순진무구하게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웃었다.
“마르다, 내가 밑바닥에서부터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온 줄 아느냐?”
“사람을 이용할 줄 알아야 한다. 고작 곁에 있는 어린 계집 하나 못 다룬다면, 넌 얻을 수 있는 게 없을 거다.”
마르다는 부친의 경고이자 조언을 끊임없이 되새겼다. 이건 제게 주어진 시험이자 기회였다.
“잘 부탁해요, 마르다.”
“그럼요.”
마르다는 제 손을 부드럽게 쥐어오는 보니카를 보며 눈꼬리를 휘었다.
‘응, 잘하고 있어, 마르다.’
바보 취급했던 부친과 이블린에게 본때를 보여줄 날도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
* * *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뭐, 그럭저럭요.”
이블린이 의자에 파묻혀 한숨을 쉬자 보레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대낮부터 한 무리의 영애들이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부리고 간 참이었다.
“이블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황후 후보라니! 네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지?”
화가 잔뜩 나서 씩씩대던 셀리메를 생각하던 이블린이 관자놀이를 꾹 눌렀다.
그렇다고 전후 상황을 다 알려줄 수도 없고, 귀족회의 뜻을 따르기로 한 것뿐이라며 달랠 수밖에 없었다.
“다들 이 상황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걸 겁니다. 솔직히, 영애들만 화가 난 건 아닙니다.”
보레아 또한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을 덧붙였다.
“그렇고 말고, 보레아. 나도 화가 났거든.”
“폐하!”
보레아가 곧장 허리를 곧추세우며 바스티안을 맞았다.
“밥 먹을 시간이야, 이블린.”
인사는 됐다며 손을 휘저은 바스티안이 입구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팔짱을 꼈다.
“슬슬 나오지 그래.”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
이블린이 가까스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바스티안은 사뭇 다정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긴 불쾌함을 모를 리 없었다.
바스티안이 이토록 짜증이 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오늘 저녁, 황후 후보들과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으니까.
“그럼 가실까요, 폐하?”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몸을 일으킨 이블린이 재빨리 바스티안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늘 만찬이요, 주방장이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하던데.”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힐끔 올려다보며 말문을 열었다.
“그대랑 둘이 먹었다면 더 맛있었겠지?”
기다렸다는 듯 돌아오는 말에 이블린의 눈꼬리가 더욱 아래로 내려갔다.
“폐하, 그렇게 싫으세요?”
“그럼 좋겠어?”
바스티안이 어이가 없다는 듯 이블린을 내려다봤다.
제 눈치를 보며 사근사근하게 구는 이블린을 보자 기분이 스르르 풀리는 자신이 더 기막혔지만.
“으음…… 죄송해요.”
“……사과 들으려고 툴툴댄 건 아니야.”
“그래도요.”
마르다를 생각하면 마음이 갑갑해지는 게 어쩔 수 없었다.
기어코 마르다를 밀어 넣은 부친의 아집과 탐욕이 바스티안 보기에 부끄러울 뿐이었다.
“그대의 탓은 아니지.”
괜히 심술을 부렸나 싶어서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손을 가만히 쥐었다.
이제는 표정만 봐도 이블린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내게 친절을 바라지는 마.”
그대 외의 사람에게 친절할 마음은 없으니까.
바스티안의 경고에 이블린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후우.”
“영애, 왜 그래요?”
마르다가 고개를 옆으로 틀며 보니카를 바라봤다.
두 사람은 본궁의 만찬실에 나란히 앉아 황제가 오기를 기다리던 차였다.
“아무것도 아녜요.”
보니카가 손부채질을 파닥거리며 다시 한번 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긴. 잔뜩 긴장했네.’
저러다 실수라도 하는 거 아닌지 몰라.
마르다는 속으로 혀를 차며 눈동자만 빠르게 굴려댔다.
금으로 된 기둥과 천장을 수놓은 화려한 그림들.
보석으로 만든 샹들리에는 그녀보다도 더 큰 듯했다.
테이블 위를 가득 채운 음식들과 그 사이사이에 놓인 고급스러운 촛대는 또 어떠하며.
‘내가 황궁에 오다니!’
드디어 황궁에 첫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무척 감격스러웠다.
보니카를 비웃긴 했지만, 그녀도 떨리고 긴장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음 같아서는 벌떡 일어나 춤이라도 추고, 여기저기 쏘다니며 구경하고 싶었다.
설레다 못해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마르다는 은식기에 비친 제 모습을 바라봤다.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갈색 머리도 예쁘게 땋아 장식을 꽂으니 제법 태가 났다.
부친이 마구잡이로 사서 보낸 비싸기만 한 드레스가 아니라, 영애들과 살롱에서 직접 유행에 맞춰 제작한 드레스도 그렇고.
마르다의 갈색 눈동자가 옆의 보니카에게 향했다.
보니카는 오늘도 가슴을 강조한 드레스였다.
‘조금 더 화려하게 할 걸 그랬나?’
마르다가 입을 샐쭉하며 제 가슴을 힐끔 쳐다볼 때였다.
“먼저 와 있었군.”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만찬장에 울렸다.
“폐하.”
“……!”
보니카를 따라 일어서던 마르다는 곧 바스티안의 뒤에 가려져 있던 이블린을 발견했다.
그리고 보니카와 마르다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황제는 이블린의 손을 꼭 부여잡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여기.”
“감사합니다, 폐하.”
바스티안이 의자를 빼내며 이블린을 에스코트했다.
보니카와 마르다는 맞은편에서 벌어지는 애정 행각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같이, 오셨네요.”
보니카가 부자연스럽게 눈을 휘며 인사를 건넸다.
“거의 붙어 지내니까.”
바스티안이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가볍게 대꾸하고는 상석으로 가 앉았다.
“음식이 식었군. 이블린의 수프를 다시 내 와, 따뜻한 것으로.”
“네.”
눈앞의 음식을 확인한 바스티안이 시종을 향해 손짓했다.
“폐하, 전 괜찮은…….”
“몸을 신경 써야지. 홑몸도 아닌데.”
이블린이 난감한 듯 콧잔등을 찡그렸다.
‘설마, 의도하신 건가?’
원래대로라면 음식을 하나씩 차례로 내와야 맞지만, 한꺼번에 준비해둔 걸 보니 바스티안의 지시인 모양이었다.
“그럼, 전부 데워주겠어요?”
“네, 단장님.”
이블린이 두 영애의 것을 함께 부탁하자 시종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시종이 사라지고, 이블린은 두 손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주방장이 오늘 특별히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들었거든요.”
“……아, 그렇군요. 무척 기대되네요.”
이블린이 옅게 웃으며 말하자 보니카도 상냥하게 대답했다.
“…….”
마르다는 보니카가 테이블 아래에서 제 드레스 자락을 와락 움켜쥐는 걸 발견했다.
‘저러다 드레스 찢어지겠는데.’
그 심정이 이해는 됐다. 당연히 짜증이 나겠지.
똑같이 황후 후보로 자리한 건데도, 이블린은 마치 황궁의 안주인처럼 보였다.
황제 또한 이블린 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 이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았고.
황제의 눈은 오로지 이블린의 접시와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녀를 먹이는 게 사명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보다 쉽지 않겠어.’
이런 상태로 황제의 마음을 얻을 수는 있을까?
‘어떻게 해야 하지?’
묘하게 조급함이 묻어나던 부친의 말을 떠올리자 마음이 조금 착잡해졌다.
“저, 폐하…… 저희는 가급적 빨리 황궁으로 들어오려 합니다.”
눈치를 보던 보니카가 적당한 때에 입을 열었다.
그러자 바스티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황궁으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바스티안이 입맛이 떨어졌다는 듯 입가를 닦아내며 의자에 몸을 기댔다.
“지금처럼 한 번씩 식사나 하면서 대충 흘려보내는 게 낫지 않겠소? 이 상황이 쇼라는 걸 두 영애께서 모를 리 없을 테고.”
“……!”
“난 두 영애께서 왜 이런 험한 길을 가려 하는 건지 도통 모르겠군.”
바스티안이 턱을 괸 채 이블린을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다가 그녀의 입가를 엄지로 문질렀다.
“보다시피, 나는 한 명에게 쏟을 마음밖에 갖고 있지 않아서.”
“…….”
지켜보는 보니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