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잊고 있던 무엇
(74/95)
74. 잊고 있던 무엇
(74/95)
74. 잊고 있던 무엇
2022.06.15.
“폐하, 어쨌든 저희는…… 엄연히 황후 후보로서 정당한…….”
보니카가 달싹이며 말을 더듬더듬 이어갔다.
이블린은 상처받은 보니카의 얼굴을 보며 난감해졌다.
‘적어도 아쉴브 영애는 폐하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마르다와 다르게 순수한 열망으로 간절히 이 자리를 바란다는 게 느껴졌다.
‘티파티 때만 해도 이런 건 몰랐는데.’
바스티안을 향한 감정을 깨달으면서 다른 사람의 감정도 읽을 수 있게 된듯했다.
‘안타깝지만…… 그렇다 해도, 양보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니까.’
오히려 보니카가 바스티안에게 진심이라면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적어도 바스티안이 위험해질 만한 일을 벌이지는 않을 테니까.
이블린의 내리뜬 눈동자에 안도감이 번졌다.
동시에 보니카가 결심한 듯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그러니, 저희는 황궁으로 들어오겠습니다. 대신.”
힘있게 요구하는 보니카의 입술이 목소리와는 다르게 파르르 떨렸다.
“티에르 공녀도 저희와 똑같은 조건에서 지내는 게 맞겠지요. 지금은 황제궁에서 지내고 있죠?”
“이런, 단장이 그대들과 같은 상황일 수 없지. 내 아이를 가졌는데.”
보니카의 시선이 이블린에게 닿자 바스티안이 짧게 대꾸했다.
“그렇게 하죠, 저도 영애들과 같은 곳에서 지내겠어요.”
“글쎄, 썩 좋은 생각 같지는 않군.”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바스티안이 혀를 찼다.
“난 매일 밤 그대를 찾을 텐데. 불편한 건 질색이라.”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대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는 거 잘 알잖아?”
“그렇지만, 폐하. 저 혼자 조건을 달리한다면 황후 후보를 선정한 취지에 어긋나니까요.”
“도통 이해할 수가 없군. 황궁으로 들어와 봐야 한창 행복에 젖어 있는 예비부부나 보게 될 텐데.”
바스티안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뭐,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으시다면야 말릴 수 있나. 그럼, 식사는 이쯤에서 끝내도 될 것 같군.”
어깨를 으쓱한 바스티안이 몸을 일으킨 뒤 이블린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블린은 어서 잡으라는 듯 까딱이는 손을 보며 잠깐 고민에 빠졌다.
오늘의 바스티안은 무례한 건지 다정한 건지 정의하기가 어려웠다.
.
.
“휴, 밥이 코로 들어갔는지 입으로 들어갔는지도 모르겠어요.”
만찬장을 떠난 마르다는 곁에 나란히 걷는 보니카에게 마음껏 투덜거렸다.
“공녀는 원래 저런 사람인가요? 점잖은 척, 약 올리는 거요.”
부러 이블린의 뒷말을 꺼낸 건 덤이었다.
이블린을 향한 보니카의 적대심이 크면 클수록 좋으니까.
“…….”
하지만, 보니카는 아무 반응도 없이 입술만 잘근거리고 있었다.
‘마음이 너무 약해. 생긴 거랑 다르게.’
하긴, 그쪽이 나도 편하기는 하지.
정작 마르다도 옷 안이 땀으로 젖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막상 코앞에서 확인한 황제의 위압감에 긴장한 탓이었다.
얼른 가서 드레스를 벗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마차로 다가갈 때였다.
“이제 떠나시나 봅니다.”
뒤에서 누군가 아는 척을 하며 두 사람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디에스티 경.”
삐딱하게 노려보는 휴이터를 발견한 두 영애가 드레스 자락을 쥐며 예의를 갖췄다.
“황후 후보가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두 분.”
“……감사합니다.”
“그래서, 즐거운 시간은 보내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두 분 모두, 제게 고마워해야겠군요.”
“네?”
“저와 티에르 공녀에 대한 헛소문이 돌지 않았다면, 두 분이 황후 후보가 될 일도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보니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예의 미소를 지었다.
“참 재미있지 뭡니까.”
“…….”
갑자기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마르다와 보니카가 어색하게 시선을 주고받았다.
두 사람 앞으로 성큼 다가온 휴이터가 자세를 낮추며 속삭였다.
“우아한 영애들께서 그런 저질스러운 가십을 즐기실 줄이야.”
“……!”
“디에스티 가에 이런 가훈이 있습니다. 기사라면, 명예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고요.”
“…….”
“저 또한 가훈을 따라, 저와 제 친구의 명예를 욕보이게 한 자가 값을 톡톡히 치르도록 만들 생각입니다.”
휴이터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며 미소 지었다.
“그럼, 모쪼록 무사히 돌아가시기를.”
* * *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 이블린.”
셔츠의 단추를 풀던 바스티안이 입을 열었다.
침대 위에 앉은 이블린은 그 얄미운 나무 인형을 끌어안은 채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할 말……은 딱히 없는데요, 폐하.”
“그럼 왜 그런 표정이지?”
“표정이요?”
“꼭 혼내고 싶어 하는 표정. 잔소리하기 직전의 표정.”
“……네?”
“아주 익숙해. 그대의 조부가 자주 짓던 표정이거든.”
눈을 느리게 깜빡인 이블린이 곧 웃음을 터뜨렸다.
“할아버지와 닮았군요, 제가.”
그래서 부친도 그녀를 그렇게 싫어했나 싶었다.
“이블린, 오늘 식사 자리에서 나는 최대한 예의를 갖췄다는 걸 잊지 마.”
예의를 갖췄다고?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아니었다.
예법이고 뭐고 무시한 말투였으니까.
그래도 바스티안에게 뭐라고 할 마음은 없었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를 위해서 인내했다는 걸 아니까.
애초에 바스티안이 황후 후보라는 말도 안 되는 조건을 받아들인 것도 그녀 때문이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더 친절하게 대하기를 바라?”
“…….”
“그대가 내 고삐를 쥐고 조종하고 싶다면, 당해줄 의향은 있어. 얼마든지 말이야.”
“…….”
“왜 또 그런 표정이지?”
이블린이 대답 없이 물끄러미 보기만 하자 바스티안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폐하, 왜 그렇게까지 절 좋아하시는 거예요?”
“……뭐?”
“제가 폐하의 마음을 이용하는 나쁜 사람이면 어쩌려고요.”
바스티안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쿡쿡 웃었다.
“이블린, 내 마음은 오래됐다고 했잖아. 아직도 숙제를 못 풀었어?”
이블린에게 다가온 바스티안이 그녀의 품에 있던 인형을 뺏어 옆으로 던지듯 내려놓았다.
“오늘 착하게 굴었으니, 이제 상을 줘야지?”
“다 좋은데, 내일 출근은 할 수 있게 부탁드려요.”
이블린은 엉큼한 의도를 가지고 다가오는 손길을 모른 척 받아들이기로 했다.
* * *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답은 그때뿐이야.’
단장실에 걸린 바스티안의 어릴 적 초상화를 보며 이블린은 턱을 문질렀다.
‘오래됐다니.’
사라진 기억 속에 바스티안의 흔적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블린.”
알리에타에게 물어볼까 하고 몸을 돌리는데 문이 열리고 바스티안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더 멀쩡하군.”
이블린을 아래위로 훑은 바스티안이 아쉽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무슨 그런 흉악한 말씀을요.”
이블린이 가볍게 눈을 흘기며 대꾸했다.
어젯밤, 바스티안은 이블린이 딱 출근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이 남았을 때 그녀를 놔주었다.
“그나저나, 오후에 다른 일정 없지? 다녀오고 싶은 곳이 있는데 시간 좀 내지?”
“네? 어디 가시려고요?”
이블린의 표정이 대번에 진지해졌다.
“가보면 알아. 경호 인원은 많이 필요 없어.”
호위기사단장 본분에 충실한 질문에 바스티안은 여유로운 미소만 지었다.
.
.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좁은 오솔길로 들어섰다.
“폐하…….”
양옆으로 촘촘하게 심어진 사이프러스 나무를 본 이블린의 눈꼬리가 더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목적지를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조부와 모친이 잠들어 있는 곳이었다.
“곧 선대 공작의 기일이지 않나.”
지금의 공작이 챙길 리도 없고, 챙겨줬을 리는 더욱 만무하고.
상황을 정확히 아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입술만 달싹였다.
“그대에게 미안하게 생각해. 더 빨리 와 봤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
“……아녜요, 저도 생각조차 못 했어요.”
사실 올 용기가 없었던 거지만.
낮은 철제 울타리 앞에 마차가 천천히 멈췄다.
바스티안의 손을 잡고 내린 이블린은 깊게 심호흡한 뒤 입구를 지나쳤다.
여느 귀족가와는 다르게 아담하고 한적한 공간이었다.
“앞으로 꽤 큰 소란이 벌어질 테니까, 미리 이실직고하려는 꿍꿍이였어. 안 그러면 그대의 조부가 꿈에 나와서 잔소리할 것 같거든.”
바스티안이 농담을 던지며 이블린의 웃음을 자아냈다.
“정말 엄격하신 분이었어요.”
“그래, 나만 보면 잔소리를 했다고.”
“음. 폐하께도 그러셨다니…….”
조부의 얼굴을 떠올리며 이블린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훌륭한 사람이야. 충심으로는 따라올 자가 없을걸.”
공작가의 지하 공간만 해도 그렇다.
벌어지지 않을 상황을 대비하는 준비성이라니.
바스티안은 밀수 건에 대한 보고를 떠올렸다.
어쩌면, 그는 어지러워질 제국의 상황을 예견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대의 조부 같은 이들만 있다면, 아무 걱정 없을…….”
말을 이어가던 바스티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문득, 한 가지 잊고 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블린. 전에, 황궁에 숨겨진 장소가 있냐고 물었지?”
“네, 맞아요.”
“짚이는 곳이 한 군데 있어.”
이블린의 눈이 크게 뜨였다.
“혹시, 확인해 볼 수 있을까요?”
“……서두르는 게 좋겠군.”
하늘을 잠깐 올려다본 바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묘지를 벗어나기 전, 이블린은 잠깐 몸을 돌려 멀리 있는 잿빛 비석을 응시했다.
‘모든 게 정리되면 다시 올게요. 그때는 웃는 얼굴로.’
턱에 힘을 준 이블린이 마차에 올랐다.
.
.
잠시 후.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황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선대 황가의 묘소였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은 몰랐군.”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이블린을 묘소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길로 안내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더 우거진 숲이었다.
“아버지가 만드신 공간이었는데, 잊고 있었어. 내내 제국 밖에서 떠돌았고, 돌아온 뒤에는 곧바로 즉위하게 돼 바빴으니까.”
꽤 오랜 시간이 지난 후라 그대로일지는 모르겠지만.
“그 공간을 아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나, 내 부모님, 그리고 …… 그대의 조부.”
“!”
“이쯤이었던 것 같은…… 아, 여기로군.”
가늠하듯 주변을 둘러보던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데리고 높은 절벽 아래 멈춰 섰다.
“폐하, 사람이 지나갈 수 있는 곳은 맞는 거죠?”
촘촘하게 엉킨 나무 넝쿨을 본 이블린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이지.”
바스티안이 손을 뻗자 나무 넝쿨이 실타래가 풀리듯 움직이며 공간을 만들었다.
눈앞의 광경을 신기한 듯 보던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뒤를 따랐다.
“천연 요새 같은 느낌이네요.”
“정확히는 아버지의 아지트 같은 곳이었어.”
바스티안이 집무실처럼 꾸며놓은 실내 공간을 훑어보았다.
어릴 때 그가 가지고 놀던 장난감, 그리다 만 그림. 아버지가 읽던 책들.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리움을 곱씹으며 실내를 둘러보던 바스티안이 부친의 책상으로 가 앉았다.
“이건…….”
그리고 무심코 서랍으로 손을 뻗던 바스티안의 눈이 곧 가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