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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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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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지켜보고 있다
2022.06.19.
“이 서랍, 잠겨 있는데요?”
“당연히 넌 못 열지, 바스티. 여긴 황제 전용 비밀 서랍이니까.”
눈을 가늘게 뜨며 장난치듯 말하던 부친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럼 제가 황제가 되면 열 수 있나요?”
“그래, 네가 황제가 되고 가진 힘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열 수 있을 거다.”
그때는 뭐 그리 귀찮은 심술을 부리시나 했는데.
바스티안은 씁쓸하게 웃었다.
이젠 그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었다.
어깨를 늘어뜨린 바스티안이 그리움을 삼키며 서랍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잠긴 듯 몇 번 덜컹거리던 서랍은 손쉽게 열렸다.
‘어릴 때는 그토록 시도해도 안 열리더니.’
가끔 그가 아끼는 이들에게 짓궂어지는 건 분명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걸 거다.
속으로 픽 웃은 바스티안이 서랍 안을 확인했다. 서랍 안에 든 건 밀봉된 편지나 서류 봉투 몇 가지가 전부였다.
바스티안의 시선이 가장 위에 놓인 얇은 봉투에 가 닿았다.
[나의 사랑하는 바스티에게]
겉면에 적힌 필체가 매우 익숙했다. 분명 부친의 것이었다.
바스티안은 책상 위에 뒹굴던 레터 나이프를 집어 들어 봉투를 열었다.
[바스티, 네가 이 편지를 본다는 건…… 내가 이 세상에 없다는 의미겠지.
서랍을 열 수 있을 만큼 네 힘이 안정되었다는 뜻일 테고? 그 말은 즉, 네가 사랑하고 의지할 누군가가 네 곁에 있다는 얘기겠구나.]
“…….”
바스티안은 눈만 들어 이블린을 바라봤다.
이블린은 이 공간이 신기한지 이곳저곳 조심스레 건드리며 둘러보고 있었다.
‘네, 맞습니다. 운 좋게도 말입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그때 이미 짐작하셨겠지만요.’
이블린을 살리느라 멋대로 힘을 썼을 때, 부친은 그의 선택에 크게 화를 냈다.
자상하기만 하던 부친에게 그토록 혼이 나 본 건 처음이었다.
“휴, 네가 내 아들이 맞기는 하구나.”
그러면서도 끝에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마셨지만.
‘한 사람만 바라보는 게 아버지를 닮긴 했지요.’
픽 바람 새는 소리를 낸 바스티안이 다시금 낡은 편지 위로 시선을 내렸다.
[……와인 창고 지하 선반 우측에 가면 숨겨진 공간이 있단다. 내가 아끼던 술을 숨겨두었다. 네게 물려주마.]
몇 마디 농담이 더 이어진 후, 부친이 황궁 여기저기 숨겨 둔 것들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소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그간 몰랐던 숨겨진 재산에 대한 것까지.
[……직접 만나서 전해주고 싶었지만,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은 것 같구나. 이른 이별에 네가 자책하지 말았으면 한다.
네 탓이 아니다, 바스티.]
“…….”
편지지 끝을 쥔 바스티안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부친의 건강이 나빠진 건, 전부 자신의 힘이 불안정해진 게 원인이었다.
힘의 균형이 깨지는 바람에.
다트도, 그도 알고 있지만, 지금껏 누구 하나 입 밖에 낸 적이 없는 사실이었다.
[……바스티, 네가 훌륭한 황제가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게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서 미안하구나.]
농담으로 편지가 끝났으면 좋았을 텐데.
대부분이 그에게 미안한 마음을 토로하는 내용이었다.
“폐하? 왜 그러세요?”
무거워진 바스티안의 분위기를 느낀 이블린이 빠르게 다가왔다.
“……아무것도 아니야. 아버지의 편지가 있어서.”
대답과 동시에 바스티안은 부친의 편지를 깔끔하게 접어 다시 봉투 안으로 밀어 넣었다.
“여긴 선황께서 만드신 공간인가요?”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굳어진 턱을 보다가 못 본 척 말을 돌렸다.
“아마도.”
바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도 쉴 곳 하나쯤은 있어야지 않겠습니까?”
“네, 어련하시겠습니까, 폐하.”
선대 티에르 공작이 찾으러 올 때마다 투덜대던 부친의 목소리가 생생했다.
“여기 오실 때마다 날 데려오시곤 했지.”
어쩌면 아들과 함께 보낼 시간이 그리 길지 않다는 걸 예감했던 건지도.
“오래도록 드나든 사람이 없었던 모양이에요.”
이블린이 책상 위를 검지로 쓸자 움직임을 따라 선명한 줄이 생겼다.
“입구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같은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면 들어오는 게 불가능하니까.”
“정말 아지트가 맞네요.”
“……이블린, 그대의 부친이 찾는 장소가 여기일까?”
바스티안이 책상 위를 손끝으로 톡톡 두들기자 이블린이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요, 사실 아버지가 찾는 게 장소인지 아닌지도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여기서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군.”
읊조린 바스티안이 편지를 품에 넣고는 서랍 안에 있던 내용물을 전부 꺼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중 가장 두툼한 봉투를 잡아 뒤집으니 익숙한 문양이 눈에 띄었다.
장검과 방패. 그리고 재스민 꽃.
“이건…….”
이블린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그대의 가문 인장이로군. 그대가 열어보겠어?”
“아, 네…….”
이게 뭘까.
이블린이 의아해하며 봉투를 열었다.
그리고 두툼한 종이 뭉치를 꺼낸 이블린의 눈이 곧 커다랗게 뜨였다.
서류의 정체는 조부의 유언장이었다.
앞 장을 빠르게 훑어본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이블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이거였어요, 폐하.”
아버지가 그토록 찾으려 애쓰는 것.
“……이곳에 더 숨겨진 건 없는지 찾아보도록 하지.”
서류를 헤집는 바스티안의 손길이 조금 더 빨라졌다.
* * *
“아침부터 요란하기도 하다, 잠깐 살러 오는 건데 짐도 많네.”
“그러게, 근데 있잖아, 우리도 그 영애들 쪽으로 배정될 수도 있는 건가?”
“본인 하녀들을 데려오지 않을까?”
“에이, 황궁 물갈이 한 지 얼마나 됐다고 외부인을 들이겠어.”
아침부터 황궁이 소란스러웠다. 황제궁 내의 분위기도 뒤숭숭하긴 마찬가지였다.
황궁으로 줄지어 들어오는 아쉴브 후작가와 페런 백작가의 짐마차 때문이었다.
“흥, 황후 후보라니. 폐하께서 이러실 줄이야.”
“귀족회에서 우겼다잖아.”
“그래도 폐하께서 거절하셨어도 될…….”
“어허, 어디서 쓸데없이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는구나.”
“하녀장님!”
몰려 있던 하녀들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폐하께서 우리 공녀님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는, 제일 가까이에서 지켜본 우리가 제일 잘 알 텐데.”
“그래, 잘 알고 있군.”
“!”
불쑥 끼어든 목소리에 하녀들을 혼내던 알리에타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봤다.
“폐, 폐하!”
알리에타를 위시한 하녀들이 동시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블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바스티안은 곧장 궁금한 것부터 물었다.
“아직 침실에 있습니다. 지금 막 아침을 가져가려던 차입니다.”
“그렇군.”
이블린이 늦은 시각까지 침실인 걸 보니, 안정제의 효과가 꽤 좋았던 모양이었다.
어젯밤, 이블린이 푹 잘 수 있도록 다트에게 진정 효과가 있는 차를 만들어 올리라 시킨 터였다.
바스티안이 침실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를 알리에타가 황급히 따랐다.
‘지켜보고 있다.’
슬쩍 고개만 돌린 알리에타가 하녀들에게 입조심을 하라며 손짓과 눈빛으로 경고를 건넸다.
.
.
“오셨어요.”
창가에 앉아 있던 이블린이 침실 문을 열고 들어온 두 사람을 맞이했다.
“잘 잤어, 이블린?”
입꼬리를 끌어올린 바스티안이 성큼 다가가 이블린의 볼을 손등으로 쓸었다.
잠옷 차림일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블린은 이미 제복까지 갖춰 입은 상태였다.
“기분은, 괜찮은 건가?”
그리고 허리를 낮게 숙여 이블린의 얼굴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표정을 살폈다.
“네, 푹 자고 났더니 생각이 좀 명쾌해졌어요.”
“다행이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배시시 웃으며 바스티안의 손을 잡아 내린 이블린이 다시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멀리서 펄럭이는 페런 백작가의 깃발이 보였다.
“결국, 들어 왔군.”
이블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알아챈 바스티안이 조소했다.
“네, 부친의 지시였는지 본인의 의지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요.”
이블린은 다리 위에 올려 둔 나무 상자를 만지작댔다.
조부의 유언장을 넣어 둔 상자였다.
장미나무로 만든 함은 바스티안의 힘이 들어가 있어, 바스티안이 아닌 사람이 열 수 없었다.
어제 바스티안과 선황의 아지트를 샅샅이 뒤졌지만, 유언장 외에 발견한 건 없었다.
황궁으로 돌아온 뒤, 이블린은 유언장의 내용을 몇 번이고 꼼꼼히 반복하며 읽었다.
유언장의 내용은 간단명료했다.
[나 파시아 티에르가 사망할 경우, 리본느 티에르가 가주의 대리인 역할을 수행할 것.
.
.
이블린 티에르가 데뷔탕트를 치르고 성인이 되면, 티에르 공작가에 속한 모든 작위와 토지, 재산은 이블린 티에르에게 계승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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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리본느와 이블린 모두 사망하고 이블린 외에 리본느의 후사가 없다면, 공작가의 모든 재산과 작위는 황실로 반납한다.]
유언장 어디에도 부친의 권한이나 역할을 인정하는 문장은 없었다.
‘이제야 퍼즐이 맞춰지는 기분이야.’
부친이 모친을 사고사로 위장해 제거한 이유.
그녀를 공작가에 가둬놓고도, 해치울 수 없었던 이유.
‘아버지는 어떤 이유에서든, 이 유언장의 존재를 알고 있었단 뜻이겠지.’
이블린은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다 실소가 흘러나왔다.
‘죽일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니라, 죽이지 못한 것뿐이었다는 거잖아.’
고작 이 유언장 하나 때문에.
만약 그녀를 제거하고 난 뒤에 유언장이 발견된다면, 모든 재산이 황실로 돌아갈 테니까.
그간 그녀를 없앨 기회만 노리면서 때를 기다렸을 부친을 생각하니 소름이 돋았다.
“괜찮아, 이블린. 하나씩 차례대로 하면 돼.”
바스티안이 손 틈으로 이블린의 볼을 가볍게 잡아 눌렀다가 놓아주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 이블린이 고마움을 담아 빙긋 웃었다.
“그럼, 일단 손님들을 맞으러 다녀올게요.”
마르다의 얼굴을 보고 나면 생각이 한층 더 정리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공녀님, 그러고 가시게요?”
이블린이 몸을 일으키자 입구 쪽에서 지켜보던 알리에타가 후다닥 달려왔다.
“응? 왜?”
“그래도 제복 차림으로 가는 건 좀 그렇지 않을까요?”
“제복 차림이 왜?”
“영애들은 분명 화려하게 꾸미고 있을…….”
“유모, 내가 그 영애들과 경쟁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야?”
이블린이 짓궂게 말꼬리를 늘였다.
“같은 황후 후보이기 전에 난 호위기사단장인걸.”
“말했지, 이블린. 그대의 유모는 걱정이 너무 많다고.”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어깨를 감싸며 말을 덧붙였다.
“걱정 말게, 난 그대의 사랑스러운 공녀가 어떤 모습이어도 좋으니까.”
“……송구합니다, 폐하.”
대답과 달리 알리에타의 표정은 당연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의기양양했다.
“참. 알리에타.”
“네, 공녀님.”
웃으며 침실을 빠져나가던 이블린이 걸음을 멈췄다.
“에바를 불러줄래?”
그토록 애가 타게 유언장을 찾고 있을 텐데.
먹잇감을 손에 넣었으니, 이제 함정을 팔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