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황제의 행복
(76/95)
76. 황제의 행복
(76/95)
76. 황제의 행복
2022.06.22.
“얘, 그거! 그거는 조심히 옮기렴.”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던 보니카가 화장대를 옮기는 하녀를 보고 급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저게 얼마짜린데.’
드레스 자락을 쥐고 후다닥 다가간 보니카가 화장대를 요리조리 살핀 뒤에야 다시 옮겨도 좋다며 신호를 줬다.
“생각보다 지낼 공간이 작네요.”
한바탕 잔소리를 끝내고 돌아온 보니카가 의자에 앉자마자 마르다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이 짐을 푼 곳은 황궁에 온 손님들이 머무는 궁이었다.
“적어도 황비 궁으로 갈 줄 알았는데, 손님 취급이라니요. 티에르 공녀는 황제궁에서 지내는 마당에.”
마르다가 보니카의 눈치를 봐가며 입을 샐쭉댔다.
“어차피 티에르 공녀도 이곳으로 오게 될 텐데요, 뭐.”
보니카가 코웃음 치며 부채를 팔랑거릴 때였다.
“두 분, 여기 계셨군요.”
마침 응접실 입구에서 반갑지 않은 얼굴이 나타났다.
“들어가도 될까요?”
“네, 안 될 이유가 있나요.”
“아직 정리가 덜 된 모양이네요.”
“보시다시피.”
보니카의 말투는 상냥했지만, 눈초리는 사나웠다.
정신없이 움직이던 하녀들이 이블린이 등장하자마자 제자리에 멈춰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게다가 이블린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의 뒤에는 한 무리의 하녀가 함께였다.
“실례할게요.”
이블린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하녀 하나가 의자를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공녀께서는, 언제 이곳으로 옮기시나요?”
이블린이 눈을 휘며 의자에 앉는 걸 본 마르다가 곧장 궁금한 걸 물었다.
“……페런 영애께서는 제가 빨리 왔으면 하는가 보군요.”
예법하고는 거리가 멀었지만, 이블린은 마르다의 호기로운 질문을 너그럽게 받아주었다.
마르다의 눈빛에는 다양한 감정이 담겨 있었다.
미움, 적개심, 원망, 경멸.
‘너도 어차피 아버지의 체스 말 중 하나에 지나지 않을 텐데.’
이블린은 어리석은 마르다를 보며 안타까워졌다.
차라리 그녀가 황궁으로 들어온 게 다행이었다.
부친이 마르다를 이용하지 못하게 시야에 두고 감시할 수 있을 테니까.
“공녀께서 치사한 수를 쓸까 봐 그래요.”
“……!”
마르다의 까칠한 대답에 보니카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아직 사교계에 적응을 못 한 건지, 가끔 마르다는 말과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더군다나 상대는 이블린 티에르였다.
하물며 그녀조차도 대놓고 큰 소리를 낼 수 없는 상대였다.
‘뭘 모르니까 더 저러는 건가? 잘됐네. 앞으로 마르다를 활용해야겠어.’
마르다가 제 조력자로 붙었다는 게 무슨 말인지,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그래, 내가 괜히 공녀와 대립하는 꼴을 보일 필요는 없지.’
굳이 황제에게 드센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었다.
여유를 찾은 보니카가 다시금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이블린.”
보니카가 좀 더 친근하게 이블린을 부르며 눈꼬리를 접었다.
“이 넓은 곳에 페런 영애와 저만 있으면 적적하지 않겠어요? 무섭기도 하고요. 공녀가 하루빨리 오면 좋겠군요.”
“저도 그러고 싶지만, 시간이 좀 필요하네요. 폐하께 허락을 받아야 해서요. 두 분께서 워낙 서둘러 들어오시기도 했고.”
“…….”
하지만, 이블린의 대답에 보니카의 미소는 다시금 흔들리고 말았다.
“참, 소개가 늦었네요.”
이블린이 응접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녀들을 향해 손짓했다.
“이쪽은 황제궁의 하녀장인 알리에타예요. 황궁의 일도 같이 겸하고 있으니, 필요한 게 있다면 그녀에게 청하도록 하세요.”
“황궁에 계시는 동안, 편히 지내실 수 있도록 보필하겠습니다.”
알리에타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채 허리를 꾸벅 숙였다.
‘황궁에 계시는 동안이라고? 하.’
“그래요, 잘 부탁해요.”
보니카가 찝찝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분을 보필할 하녀들은 짐 정리가 마무리되는 대로 보내드릴 겁니다. 각 영애께 세 명이 배정될 예정입니다.”
“고작 세 명? 너무 적지 않나?”
“황궁에 근무하는 인원이 많지 않아서…… 양해 부탁드립니다.”
알리에타가 다시 한번 고개를 조아렸다.
“폐하께서 사람이 적은 걸 선호하시다 보니…… 영애들이 이해해줬으면 좋겠어요.”
이블린이 눈꼬리를 내리며 미안함을 표했다.
“그럼, 저는 이만 출근을 해봐야겠네요. 모쪼록 두 분, 편안하게 지내도록 해요.”
이블린이 티테이블을 두 손으로 탁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블린이 응접실을 빠져나가고, 남은 두 영애 사이에는 바람이 휩쓸고 간 듯한 적막만이 남았다.
왜인지 기묘한 패배감이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듯했다.
그래, 꼭 불청객 취급을 받는 것 같았다.
“어디 구경이라도 난 모양이구나.”
힐끗거리는 하녀들에게 한마디를 한 마르다가 보니카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역시, 공녀의 목에 힘이 들어간 건 아침에 뜬 그 기사 때문일까요?”
“……글쎄요.”
기사 내용을 떠올린 보니카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러지 않고서야, 너무 당당하잖아요? 그리고, 임신했다는데 살도 별로 안 찐 것 같고요.”
마르다는 보니카를 부추기듯 끊임없이 부정적인 말을 속삭였다.
“…….”
보니카는 제복 차림의 이블린을 떠올렸다.
견장과 금 단추가 달린 하얀 제복을 입은 이블린은 시선을 빼앗길 만큼 늘씬하고 멋있긴 했다.
바지를 입어서 그런지 긴 다리가 시원스레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고.
‘제복을 입어야 하는 건가. 폐하께서 그런 걸 좋아하시는 건가.’
보니카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같은 시각.
주인이 자리를 비운 단장실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보레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해할 수 없는데.”
오단이 손에 든 신문을 허공에 대고 흔들었다.
<프레세>의 오늘 자 신문이었다.
[누가 황제의 평화를 방해하는가.]
[황손을 가진 티에르 공녀가 황후 후보? 전례 없는 사태, 귀족회의 의도는?]
기사 앞면에 실린 헤드라인이 덩달아 휙휙 흔들렸다.
“그게요, 부단장님…….”
보레아가 우물쭈물하는 사이 오단이 신문을 한 장 넘겼다.
뒷면에는 환하게 웃는 이블린의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었다. 루체이의 아이들과 화관을 만들며 노는 모습이었다.
“심각한 일이야, 아주 심각하고말고. 기사단이 몇 명이나 함께 있었는데 사진 찍은 걸 몰랐다니.”
오단이 보레아를 찌릿 노려보았다.
“이래서야 보레아, 네게 단장님의 호위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겠어?”
“아니, 저도 억울합니다! 그 기자가 분명히 사진은 안 찍었다고 했는데!”
보레아가 두 팔을 허공에 흔들며 부들거렸다.
“어디서 불쌍한 척이야? 오늘 기사단 전부 연무장 스무 바퀴…….”
“좀 봐 주지 그래, 오단.”
다행히 오단의 잔소리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에 가로막혔다.
“폐하.”
오단이 곧장 일어나 예의를 갖췄다.
“루체이에서 만났다던 그 기자인가.”
“……네, 맞습니다.”
어슬렁거리는 맹수처럼 걸어온 바스티안이 오단이 펼쳐 놓은 신문 위로 고개를 숙였다.
“예쁘게 나왔는데?”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
맞장구를 치던 보레아가 오단의 시선을 의식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흠, 프레세라. 좋은 소식통을 가진 모양이군. 어느 언론사보다 빠르게 움직인 걸 보니.”
귀족 회의에서 확정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렇게 빨리 외부로 퍼질 줄은 몰랐는데.
바스티안은 비스듬히 선 채 기사 내용을 마저 읽었다.
[루체이에서 티에르 공녀가 보인 행보는 제국민을 사랑하는 황실의 표본이었다. 티에르 공녀가 훌륭한 황후가 되리란 건 의심할 수 없는 사실로 보였다.
다정한 꾀꼬리 한 쌍 같은 예비 황제 부부의 모습을 보며, 루체이의 사람들은 행복한 제국의 미래를 맛보았다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황후 후보를 추가로 뽑아 검증한다는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황제의 행복을 방해하고 싶은 세력이 있는 걸까. 귀족회의 의도가 무엇인지 생각해볼 수밖에 없다.]
몸을 바로 한 바스티안이 제 턱을 쓱 문질렀다.
“다정한 꾀꼬리라니, 정확히 봤군. 그 기자가 이블린을 무척 좋아하나 본데…….”
말끝을 흐리는 바스티안에 오단이 긴장한 듯 침을 꼴깍 삼켰다.
“오단, 이 기자를 한 번 만나야겠어.”
바스티안이 짧게 명령하자 오단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아, 정중히 모셔오도록 해.”
“……네?”
체포가 아니라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오단을 보며 바스티안이 입꼬리를 씩 끌어올렸다.
“명색이 황후 후보 검증인데, 귀족회에게만 맡길 수는 없잖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기에 기자만큼 적합한 사람도 없지.
바스티안이 오단의 어깨를 툭 두드리며 지나갔다.
서로 시선을 주고받은 오단과 보레아가 동시에 그 뒤를 따랐다.
* * *
‘대체 난 왜 부른 거지?’
에바는 본궁 쪽으로 향하는 이블린의 뒷모습을 힐끔댔다.
급하게 부른다기에 왔더니, 이블린은 정작 그녀를 데리고 다른 영애들을 만나러 갔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블린은 다른 하녀들을 돌려보내고 그녀만 곁에 남겨두었다.
“에바.”
“네, 공녀님.”
가까이 오라는 손짓에 에바가 앞으로 한 걸음 더 움직여 다가갔다.
“아까 본 영애들, 기억하니?”
“네? 네.”
“다들 초면은 아니지?”
“……네? 어, 그게…….”
이블린이 에바의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에바는 기억을 되짚는 표정이었다.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느라 꿍꿍이 가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전에 공녀님께서 여신 티파티에서 뵌 것 같기도 하고요?”
“그러니?”
“네, 그런데 그건 왜 물으시는 건가요?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역시……! 저 영애들이 공녀님을 곤란하게 하는 거지요?”
금방 씩씩대며 묻는 에바는 평소처럼 그녀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하녀 아이처럼 보였다.
대답 없이 싱긋 웃기만 한 이블린이 방향을 틀었다. 본궁 옆의 정원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그리고 본궁에서 멀어질수록 에바의 심장은 점점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블린이 가는 방향은 공작에게 보고를 보낼 때 사용하던 비밀 장소 근처였다.
‘설마, 설마? 아니야, 그럴 리가.’
그쪽으로 가는 게 아닐 수도 있잖아.
어쩌지?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
에바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바로 옆에는 이블린이 있고,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기사단원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전문적인 암살자 훈련을 받은 것도 아니고, 한낱 정보 길드원에 불과한 그녀가 실력자들을 피해 도망치는 건 불가능했다.
에바가 고민하는 사이, 이블린이 걸음을 멈췄다.
에바가 예상한 바로 그 장소 앞이었다.
“고, 공녀님.”
에바가 곧장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에바, 네가 맡은 임무를 수행해야지.”
평온한 목소리와 함께 에바의 앞에 작은 종이와 펜이 툭 떨어졌다.
“아버지가 황궁 내에 찾는 게 있지?”
“!”
에바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대체 언제부터? 꼬리를 밟힌 줄도 몰랐는데.
“찾았다고 보고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