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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청아하고 까칠한 (77/95)


77. 청아하고 까칠한
2022.06.26.


에바는 저벅저벅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몸을 움츠렸다.

곧 차가운 검날이 얼굴 옆을 스치듯 지나가 땅에 박혔다.


“……!”

온몸이 오싹해지며 소름이 돋았다.


“고, 공녀님.”

에바는 제 양옆에 자리한 기사들의 존재를 의식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블린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늘 자애롭게 따스한 미소로 그녀를 보던 이블린이 아니었다.


‘전부 들킨 거야, 난 죽을지도 몰라.’

에바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더 빨리 끝냈어야 했는데, 얼른 도망쳐야 했는데.’

큰돈 좀 만져보려다가 목숨이 날아가게 생겼다.


‘아니야, 마음 약한 사람이니까 빌면 살려줄지도 몰라.’

에바가 코를 훌쩍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참에 공녀의 편에 붙겠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공작과 관련된 모든 정보를 다 말해주면 되겠지.


“공녀님,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공작님이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어요.”

“……에바, 넌 내게 몇 번이고 말할 기회가 있었단다.”

공작가에서도, 황궁에 들어온 이후에도.


“알피도 상단의 정보 길드에 있었다지. 처음부터 내게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거였구나.”

“아녜요! 공작님, 공작님 때문에!”

에바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숨을 헐떡였다.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부디, 공녀님…….”

“내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었지만, 에바 넌 그러지 않았지. 무엇보다…….”

천천히 눈을 감았다 뜨는 이블린의 미간이 괴로운 듯 일그러졌다.


“데보라의 목숨도 앗아가려고 했어.”

“그건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하지만, 죽지 않았잖아요. 어쨌든 살아 있잖아요.”

“그 아이는 아직도 거동이 불편해.”

“그런, 그런…….”

에바가 할 말을 찾아내려 끊임없이 입을 달싹였다.


“네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란다, 에바. 펜을 들렴.”

이블린이 차갑게 읊조리자 기사 하나가 검 끝으로 에바의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히익 소리를 낸 에바가 곧 엉엉 울면서 펜을 집어 들었다.


 

* * *



“특이사항은 없지? 최근에 외부인이 황궁으로 유입됐으니 주시해.”

근위병을 데리고 황궁을 돌던 휴이터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이블린은 괜찮을까.’

어이없게도 그 영애들이 이블린에게 황제궁을 나올 것을 요구했단다.

참 기가 막혔다.


‘답답하네.’

가끔 오가며 이블린과 마주친 적은 있지만, 대화를 나눈 지도 오래였다.

이블린은 어차피 가십이니 괜찮다고 했지만, 그가 괜찮지 않았다.

영애들이 황궁으로 들어온 이상 더 조심할 생각이었다.

한숨을 쉰 휴이터가 막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응?’

익숙한 사내가 눈앞을 지나갔다.

얼마 전, 그가 기사 소스를 제공했던 프레세의 기자였다.


“그럼 돌아보도록 해.”

부하들에게 손짓한 휴이터가 사내의 뒤를 쫓았다.


‘이름이 파보였던가.’

파보는 황궁에 기거하는 시종 복장을 하고 있었다.


“여기서 뭐 하는 겁니까?”

“아, 깜짝…… 아니, 디에스티 경 아닙니까.”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본 파보가 곧 반갑다며 웃었다.


“지난번에는 감사했습니다, 덕분에 저희 신문사가 단독으로 특종을 냈지 뭡니까.”

주변에 듣는 귀가 없는 걸 확인한 파보가 휴이터에게 속닥였다.


“잘 됐군요.”

휴이터가 그러냐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편파적인 기사를 부탁하면 훗날 이블린에게 피해가 갈까 봐 소스만 제공했을 뿐이었다.

그랬는데, 그 정도로 귀족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기사를 써줄 줄은 몰랐다.


“그대가 루체이에서 티에르 단장을 마주친 줄은 몰랐습니다.”

신문에 실린 이블린의 사진을 보고서 전후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하, 이왕 터뜨리는 김에 더 크게 내면 좋으니까…….”

파보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래서, 여기서 뭘 하는 겁니까? 그것도 그런 복장으로.”

“아, 안 그래도 디에스티 경께 인사를 드리러 갈 생각이긴 했습니다. 저 당분간 황궁에서 지내게 됐습니다. 정확히는, 잠입 취재라고 해야 할까요?”

“……네?”

“그게 그러니까, 신문에 낸 그 사진 때문입니다.”

파보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
.

신문이 날개 돋친 듯 팔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이제야 오시는군.”

“!”

“오랜만에 보지?”

집 앞에서 기다리는 호위기사단을 발견한 파보는 다가올 미래를 직감했다.

마음대로 티에르 공녀의 사진을 올렸으니, 그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는 건가 했다.

하지만, 황궁으로 가게 된 파보가 향한 곳은 조사실이 아닌 황제의 응접실이었다.

기다란 소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황제가 흥미롭다는 듯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대가 이 기사를 쓴 기자인가?”

“네, 그, 그렇습니다.”

파보는 덜덜 떨면서도 당당하게 대답했다.

사진을 공개한 건 잘못이지만, 엄연히 황실에 대한 충성심과 이블린 티에르에 대한 좋은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었다.

설마 이런 일로 목숨을 내놓으라고 할까 싶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제국의 황제가!


“호위기사단이 있었는데도, 제법 사진을 잘 찍었더군.”

“가, ……송구합니다.”

감사하다고 말하려다가 파보는 옆에서 눈을 부라리는 호위기사단을 보고 말을 바꿨다.


“이블린이 그대에게 재밌는 기삿거리를 제공하겠다 약속했다지?”

“그러긴 했습니다만…….”

“이블린을 대신해서 내가 약속을 지킬까 하는데.”

“!”

파보는 심장이 터질 것처럼 내달리는 걸 느꼈다.

특종이다!

확실했다. 이건 특종을 예감할 때 느끼는 감정이었다.


“마, 말씀만 하십시오, 폐하!”

비음을 흘리며 턱을 매만지는 황제에 파보가 후다닥 고개를 숙였다.


“당분간 시종 흉내를 내며 황후 후보들을 지켜봐 주게. 물론 그대가 기자라는 걸 들켜서는 안 되고.”

“……네?”

“그대가 기사 내는 건 전혀 검열하지 않을 생각이야. 어떤가? 꽤 흥미로운 제안일 텐데.”

흥미롭다뿐일까요!

이건 평생에 다시 안 올 기회라고요!


“영광입니다, 폐하. 감사합니다.”

“사심 없이, 객관적인 사실만 가지고 써주게.”

“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파보가 몇 번이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
.



“그렇게 해서, 황궁에서 지내게 됐습니다.”

“…….”

휴이터는 멍하니 파보를 보다가 곧 헛웃음을 터뜨렸다.

황제가 판을 짜는 방식은 그가 상상조차 못 하는 쪽이었다.


‘이블린도 그래서 폐하를 좋아하게 된 걸…… 아, 이런 생각이 무슨 소용이야.’

휴이터가 제 머리를 마구잡이로 흐트러뜨렸다.


“……경?”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 그렇습니다. 그대에게도 잘된 일이군요.”

“네. 폐하께서 필요하면 경에게도 도움을 청하라 하셨습니다.”

“그래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요.”

“참, 가짜 기자도 한 명 붙여놓았습니다. 사진 찍는다는 핑계로 황궁 내를 좀 돌아다닐 겁니다.”

파보가 입을 손으로 가리며 더 목소리를 낮췄다.


“……사진?”

“아, 찍는 척만 하는 겁니다. 프레세 소속 기자이고요. 그쪽으로 영애들의 시선이 쏠려야 제가 더 편해져서요.”

“그렇군요.”

“이게 잠입 취재의 기본입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디에스티 경.”

파보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 뒤 총총 사라졌다.

파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휴이터가 픽 웃으며 몸을 돌렸다.


‘객관적인 사실만 가지고 쓰라고?’

그럼 누가 봐도 이블린이 황후 자리에 적합하다는 걸 알 수밖에 없겠지.

황후 후보를 들이는 걸 허락했을 때만 해도, 솔직히 속으로 황제를 질겅질겅 씹어댔는데.

역시 나름대로 생각이 다 있던 모양이었다.


‘이블린, 넌 정말 황후가 되겠구나.’

임신이 가짜였어도, 그에게 돌아올 기회는 없었던 거다.

휴이터가 씁쓸하게 웃으며 팔을 어깨 위로 올려 죽 잡아당겼다.


“휴이?”

“!”

뭐야, 헛것이 들리나?

휴이터의 몸이 그대로 굳었다.


“얼굴 보기 힘들다? 계속 찾아다녔잖아.”

청아하면서 까칠한 이 목소리.


“이브?”

휴이터가 눈을 깜빡였다.

잡아서 혼이라도 낼 것처럼 성난 물소처럼 다가오는 건 분명 이블린이었다.


 


“야, 너 왜 여기 있어?”

휴이가 한 걸음 물러서며 주변을 살폈다.

괜히 누가 보면 어쩌려고.


“언제까지 그렇게 피할 거야? 폐하께서도 괜찮다고 하셨는데.”

“내가 찝찝해서 그래.”

“의논할 일이 산더미인데, 매번 이렇게 피할 거야? 이리 와. 네게 긴히 부탁할 게 있어.”

황제의 명까지 들먹이는 이블린에 휴이터가 주춤대며 다시 앞으로 걸어왔다.


“휴이, 황궁 외곽의 포도밭 알지?”

“어, 응.”

“근위대에서 몇 명 선발해서, 농부로 위장시켜 그 근처에 머물게 해 줘.”

“위장? 왜?”

“오늘 밤을 기점으로 그곳에 오는 사람들은 전부 체포해.”

“!”

 

* * *



“네? 오늘도 못 오신다는 건가요?”

“네, 폐하께서 일정이 많으시다 보니…….”

만찬장에 앉아 있던 보니카와 마르다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황궁에 들어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황제의 얼굴은커녕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더 화가 나는 건 이블린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거였다.

첫날 인사차 온 이후로 발길이 뚝 끊긴 채였다.


“그럼 티에르 공녀는?”

“단장님도 업무가 많아 식사를 따로 하십니다.”

마르다의 질문에 시종이 다시금 고개를 조아렸다.

시종의 정체는 파보였다.


“아니, 약속과 다르지 않나요? 공녀는 대체 언제 여기로 넘어오는 거래요?”

마르다가 투덜대자 보니카가 냅킨만 움켜쥐었다.


“설마, 이렇게 우리는 내팽개쳐두고 둘이서 따로 먹고 있는 거 아녜요?”

마르다가 혀를 날름대는 뱀처럼 꿍얼거렸다.

보니카에게만 들리도록 한 말이지만, 파보의 귀에도 선명히 박혔다.


“……글쎄요, 영 입맛이 없네요. 저는 이만.”

보니카가 냅킨으로 입가를 닦은 뒤 휙 일어났다.

아니,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으면서 닦기는 왜 닦아.

마르다는 보니카와 테이블 위의 음식을 번갈아 보다가 아쉬움을 뒤로한 채 몸을 일으켰다.


“영애, 같이 가요.”

마르다는 이미 저만치 멀어진 보니카를 쫓아 황급히 달려갔다.


“어이쿠.”

그러다가 드레스 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한 마르다가 다시 드레스를 잡은 뒤 달려갔다.

만찬장에 남은 파보는 코웃음을 쳤다.


‘귀족들은 가끔, 아랫사람들이 무슨 조각상인 줄 안단 말이지.’

엄연히 눈과 귀가 있는 사람인데 말이다.


‘하긴, 그래서 나 같은 사람도 먹고사는 거지.’

그가 프레세의 대표 기자로 자리 잡은 데에는 이처럼 멍청한 귀족들의 덕이 컸다.


‘어쨌든 저래서야, 황제의 업무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조차 못 하겠군.’

황궁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그조차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말이다.


‘그거 아십니까? 제가 감히 영애들에게 점수를 매기고 있습니다.’

두 사람을 느긋하게 쫓아가며 파보는 관찰한 내용을 머릿속에 하나씩 정리했다.


‘티에르 단장에게도 가볼까.’

고민하던 파보는 관두기로 했다.

지금은 저 영애들을 구경하는 게 더 재미있었다.

파보가 재미있다는 듯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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