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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이블린의 결심 (78/95)


78. 이블린의 결심
2022.06.29.



“아, 벌써 식사 시간인가.”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는 트롤리를 본 바스티안이 서류를 내려놓았다.


“영애들은요?”

직접 행차한 주방장을 본 이블린도 의아함을 드러내며 몸을 일으켰다.


“아마 식사 중일 겁니다.”

호쾌하게 웃으며 대답한 주방장이 저녁 메뉴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 맛있겠네요.”

“제가 요즘은 요리하는 맛이 납니다. 단장님이 오시기 전에는 폐하께서 식사를 거르실 때가 많았거든요.”

“…….”

“바쁘고 귀찮잖아.”

이블린의 시선이 닿자 바스티안이 변명을 시도했다.


“지금은, 내가 안 먹으면 그대도 굶으니까.”

“감동……해야 할 부분인 건가요?”

이블린이 눈썹만 까딱이며 장난스레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내가 그만큼 그대를 생각한다는 뜻이지.”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는 주방장에게 그만 나가보라며 손짓한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옆에 풀썩 앉았다.


“그러고 보니 폐하, 영애들이 꽤 서운해하는 모양이에요.”

“그래?”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음식을 보자 알리에타가 보고한 내용이 떠올랐다.

하지만, 바스티안은 별 반응이 없었다.


“폐하, 저도 이제 슬슬 그쪽으로 옮겨야 하지 않나 싶은데요.”

이블린은 조금의 빈틈도 남겨두지 않고 옆에 바싹 붙어 앉은 바스티안을 힐끔 올려다봤다.


“안 돼. 내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이번에는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폐하, 이러다가는 또 귀족회에서 한 소리 듣고 말 텐데요.”

“잘 아는군, 맞아. 그거 기다리는 중이야.”

이블린은 못 말린다는 듯 픽 웃고 말았다.

저들의 속을 얼마나 긁어 놓으려고 그러시는 걸까.

얼마 전, 황궁 내에 기자를 불러들였다더니, 바스티안의 속내가 뚜렷했다.

애가 닳은 나머지 그쪽에서 무언가 실수하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바스티안이 그 이야기는 됐다며 곧바로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공작이 들어올 만한 덫을 잘 설치했어?”

“네, 휴이터가 족족 잡아들이고 있으니까요.”

미소를 지운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초조하겠죠, 초조함이 극에 달할 때쯤, 그때 움직이려고요.”

안 그러면 또 꼬리를 끊고 도망가려 들 테니까.


“폐하.”

“응?”

“가끔…… 정말 가끔 생각했는데요.”

머뭇거리던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허벅지 위에 손을 올렸다.


“역시 제 친부는 따로 있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정말 가끔.”

“…….”

이블린의 어깨를 안으려던 바스티안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어머니를 모욕하는 것 같아서 가급적 이런 의심은 털어버리려고 애썼지만요.”

이블린이 민망하다는 듯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바스티안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하다니, 새삼 자신이 놀라웠다.


“그렇지 않나요? 페런 영애만 해도, 저렇게 부친을 쏙 빼닮았으니까요.”

“…….”

“제가 너무 이상한 말을 했죠? 얼른 저녁이나 먹어요, 저희.”

바스티안의 침묵을 읽은 이블린이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이블린.”

바스티안이 그런 이블린을 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티에르 가의 이름은 어떤 의미지?”

“네?”

“티에르 가문의 명예가 어느 정도로 중요하냐는 뜻이었어.”

“흠, 글쎄요.”

이블린은 포크를 쥔 채 고민에 빠졌다.


“적어도,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 정도는?”

“…….”

“그래서 가문을 부친에게 넘겨주지 않으려는 거기도 하고요.”

바스티안은 포크를 쥔 하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걸 묵묵히 지켜봤다.


“아버지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 처리하는 것도 폐하께서 지지해주지 않으셨다면, 글쎄요, 더 은밀하게 처리했을 것 같아요.”

“……그렇군.”

바스티안이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블린의 손을 쥐었다.


“그대의 뜻은 존중해, 이블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눈을 마주 보며 요요히 웃었다.


“물론 그대의 조부는 그대의 목숨까지 바라진 않을 것 같지만 말이야.”

“…….”

“그건 나도 그렇고. 그럼, 먹을까?”

“아, 네…….”

이블린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내렸다.

.
.



“아니, 왜 여태 소식이 없는 거야?”

공작이 움켜쥔 주먹으로 책상을 내리쳤다.

에바가 보고한 내용을 확인하려고 며칠 내내 사람을 보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돌아오는 이가 없었다.


“황궁에서 보내온 정보인 건 확실해?”

“네, 그렇습니다.”

“함정일 확률은? 고것이 이블린에게 넘어갔을 수도 있잖아.”

“그럴 리는 없습니다. 가족들이 아직 저희 손에 있기도 하고요. 게다가 심부름꾼 말로는 그런 눈치는 전혀 없었답니다.”

이미 그 심부름꾼이 이블린과 기사단원에게 발각되어 그들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내가 직접 가봐야 하는 건가.”

공작이 초조하게 중얼거렸다.

유언장만 찾으면 그의 원대한 계획이 마무리되는 거였다. 마르다의 도움도 필요 없어지는 거고.


“황궁으로 갈 채비를 하게.”

“네? 직접 가시는 겁니까?”

“무슨 소리인가? 자네가 가야지.”

공작이 깜짝 놀라 묻는 보좌관에게 눈을 흘겼다.


 

* * *



“뭐? 누가 잡혔다고?”

단장실 책상에 앉아 서류를 보던 이블린이 고개를 들었다.


“공작님의 보좌관입니다.”

드디어.

의심 많은 사람이니 직접 오지 않을 건 예상했다.

적어도 심부름꾼이 아닌 중요한 인물을 보내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차였다.


“모두 준비해요. 나는 폐하께 보고드리고 올 테니까.”

잠시 생각한 이블린이 짧게 답했다.

바스티안에게 향하며 이블린은 허리춤의 검을 거세게 움켜쥐었다.


‘오늘이야, 그토록 기다려온 날.’

 

.
.



‘슬슬 돌아올 때가 됐는데.’

어둠이 깔린 공작가.

티에르 공작은 뒷짐을 진 채 집무실 안을 왔다 갔다 움직였다.

숨겨진 장소를 찾았다는 정보가 함정인지 아닌지 궁금했다.

물론 함정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지만.


‘오늘따라 날씨는 또 왜 이렇게 을씨년스러워, 재수 없게.’

공작이 오소소 소름이 돋는 몸을 부르르 떨며 창밖으로 시선을 던질 때였다.


“!”

멀리서 말발굽 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희미하지만, 분명 말발굽 소리였다.


‘왔군.’

반색하며 창문을 벌컥 연 공작의 표정이 곧 무너져내렸다.

저택으로 다가오는 건 온통 검은 망토를 두르고 말을 탄 이들이었다.


“뭐야?”

사병들도 지키고 있는데, 저런 정체불명의 이들이 공작가까지 들어왔다니 믿을 수 없었다.


“이봐, 무슨 일인지 알아봐.”

공작이 소리치자 누군가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공작이 불청객을 노려보는데 마차 하나가 굴러들어왔다.

관처럼 새까만 마차의 문이 열리자 공작이 눈을 가늘게 떴다.

기사단원의 에스코트를 받아 사뿐히 내려선 이는 이블린이었다.

또, 또 너야!


“이블린 티에르, 이 무슨 무례한 짓이냐.”

공작이 창틀을 움켜쥐며 음산하게 읊조렸다.


“무례하다니요, 제집을 찾아왔을 뿐인데요. 물론, 아버지의 사람들을 데리고요.”

이블린이 싱긋 웃자 마차 안에서 또다시 누군가가 끌려 나오듯 내렸다.

지켜보던 공작의 눈이 커졌다. 꽁꽁 포박된 채 내리는 이는 분명 그 하녀였다.

그가 이블린의 옆에 붙여 둔 바로 그 하녀.


“!”

공작이 눈을 의심하는데 마차의 뒤에서 포박된 사내들이 줄줄이 등장했다.

사탕 줄 같은 행렬의 맨 앞에 선 이는 오늘 황궁으로 간 그의 보좌관이었다.


‘이게 대체.’

입술을 꽉 깨문 공작은 이블린 뒤에 선 기사들을 힐끗 쳐다봤다.

얼마나 많은 인원을 데려온 건지 행렬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황궁에서 찾는 게 있으신 것 같더군요.”

이블린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제가 먼저 찾은 것 같아서, 알려드리러 왔습니다.”

“!”

공작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



‘뭘 알고 저러는 건가? 전부 다 알고? 설마.’

공작이 다리를 꼬아 앉은 이블린을 연신 힐끔댔다.

여유로운 표정을 보니 그를 떠보려는 건가 싶기도 했다.

그럴 리가. 하녀부터 보좌관까지 전부 잡아 데려왔는데.

역시 다 알고 온 거겠지.

일말의 희망마저 파스스 부서졌다.

그렇다고, 쉽게 죽을 내가 아니지.


“그래서, 이 야밤에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뭐냐. 내게 따지기라도 하겠다는 거냐?”

공작이 가슴을 내밀며 당당하게 소리쳤다.

마치 혼을 내듯 근엄한 목소리였다.


“티에르 공작.”

공작새처럼 푸드덕대는 부친을 지켜보던 이블린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 이름으로 불리는 동안 충분히 누리셨지요? 그러니, 슬슬 제자리로 돌아가실 때가 된 것 같아요.”

“뭐야?”

“처음부터 여기에 아버지의 것은 하나도 없었으니까요.”

“!”

공작의 턱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힘이 들어갔다.


“티에르의 이름을 빌려 사시는 동안, 많은 비리를 저지르셨더군요. 그 값은 치르셔야죠?”

“하, 날 체포라도 하겠다고?”

“네. 더는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으니까요.”

“먹칠? 하, 이블린. 하하, 하하하.”

공작이 미친 사람처럼 낄낄대고 웃기 시작했다.


“먹칠이라니…… 아주 우습구나, 이블린. 애초에 명예를 운운할 가문도 아닌데.”

공작이 여유롭게 이블린을 노려보았다.

정확히는 이블린의 몸을 가린 까만 천을.

기사단도 그렇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매고 온 건 오늘의 일을 주변에 알리고 싶지 않다는 뜻일 터.

그놈의 티에르의 체면을 차리는 건 그 할아비나 손녀나 똑같았다.

물론 그 덕에 가지려고 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 거지만.


“이블린, 네 핏줄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귀하지 않단다.”

“…….”

이블린이 눈을 찡그렸다.


“네 모친과 조부가 어떤 자들인지는 알고 있느냐? 내가 입 열면 이 티에르 가문도 끝이다, 이블린.”

이블린이 느긋하게 몸을 일으켰다.

이블린의 형형한 눈빛에 공작이 움찔하는 사이, 이블린은 어느새 그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저도 궁금하군요. 대체 어머니가 어떤 분이었기에, 직접 손을 더럽히면서 살해하셨는지.”

“……네 모친은 사고…….”

“이 상황에서까지 거짓을 말하려는 건가요.”

공작이 앓는 소리를 내며 이를 악물었다.


“……이블린, 어디 끝까지 해 보거라. 티에르 가문의 치부가 내 입을 통해 만천하에 드러나는 걸 보고 싶다면 말이다. 그럼 황후고 뭐고, 네 미래도 끝이다!”

“그런가요?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습니다.”

이블린은 악에 받친 듯 소리치는 공작을 차갑게 바라봤다.


“아버지를 가두기로 했으니까요. 아버지의 악행을 계속 보고 있기에는, 제가 너무 오래 참아드렸어요.”

“뭐, 뭐야?”

“체포하세요.”

이블린의 명령에 기사들이 몰려와 공작의 팔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 으읍, 읍!”

“공식적으로는 갑자기 큰 병을 얻은 거로 하시죠.”

이블린이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제가 공작가에 감금되어 있던 2년 정도,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기도요. 혹시 아나요, 그 시간 동안 제가 아버지를 용서하게 될지.”

“으읍, 읍!”

공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눈빛으로도 그가 무슨 욕설을 뱉는지 알 것 같았다.


“참, 그거 아세요? 아버지께서 몰래 숨겨두신 재산, 잘 받았어요.”

“!”

“모쪼록, 좋은 일에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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