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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밝혀지는 과거 (79/95)


79. 밝혀지는 과거
2022.07.03.


토독토독.

고요한 집무실 안에 바스티안이 책상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폐하, 찾으셨습니까.”

잠시 후, 다베르 후작이 황급히 집무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자다가 불려 나온 그는 옷만 겨우 갖춰 입은 채였다.


“깨워서 미안하군.”

“아닙니다.”

다베르가 헝클어진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대답했다.

다베르는 조용한 집무실 내부를 훑었다.

황제는 다른 호위기사도 없이 혼자였다.


‘무슨 일이시지.’

이런 새벽에 불려온 건 드문 일이었다. 다베르는 조금 긴장한 채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다베르, 사람을 좀 찾아야겠어. 조용히, 은밀하게.”

다베르가 의구심을 드러내기 전, 바스티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람이라면, 어떤…….”

“베라츠에 소피엘 카디아란 자가 있어.”

“…….”

다베르의 손끝이 움찔 떨렸다. 다행히 바스티안의 시선은 창밖을 향해 있었다.


“폐하, 베라츠면…… 적국 아닙니까.”

다베르가 마른 침을 삼킨 뒤 말을 이었다.

슈라우츠 공국과 인접한 베라츠는 제국 중심으로 돌아가는 시류에 반기를 들고 연합을 탈퇴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오래도록 군사력을 키우고 있어 제국에서도 항상 주시하고 있는 곳이었다.


“게다가 카디아라면…….”

“그래, 그는 지금 베라츠 왕의 배다른 형이야.”

바스티안이 다시금 손끝으로 책상 위를 토독 두들겼다.


“그에 대한 흔적을 찾는 게 쉽지 않을 거야, 베라츠에서 그의 흔적을 전부 지운 모양이더군. 나도 몇 년 동안 실마리 하나 못 잡을 정도니까.”

바스티안의 시선이 드디어 다베르에게 향했다.

기존에는 오펜 자작이나 정보 길드를 통했지만, 한계가 있었다.

누군가 의도적으로 흔적을 지운 게 분명했다.


“슈라우츠 공국에 남아 있는 그대의 라인을 활용하도록 해. 정보 길드보다는, 그쪽이 빠를 것 같군.”

“…….”

역시 황제는 슈라우츠가 제국과 베라츠 사이에서 저울질하며 재정을 불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던 거다.

다베르는 등허리를 따라 식은땀이 주르륵 흐르는 걸 느꼈다.


“소문이 퍼지지 않도록 은밀하게 찾아.”

“폐하, 그자를 찾으시는 이유를, 여쭤도 됩니까?”

“그자를 찾는 게 아니야. 그자의 가족을 찾으려는 거지.”

“……알겠습니다, 폐하.”

반 박자 늦게 대답한 다베르가 여느 때처럼 표정 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그리고, 다베르가 떠난 뒤 혼자 남은 바스티안은 창가로 천천히 다가갔다.

바스티안은 황궁 정문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폐하, 제 손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그러니 허락해주세요.”

 
공작가로 떠나기 전, 이블린은 간절한 얼굴로 읍소했다.

차마 그런 얼굴에다 대고 안 된다고 고집을 부릴 수는 없어 다녀오라 등을 밀어주고 말았다.

그 결연하고 간절하던 얼굴 위로 어린 이블린이 떠올랐다.

그와 이블린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은 그 사건이 있던 때.


 

.
.



“이브, 어디 가는 거야?”

“쉿, 조용히 해. 우리는 오늘 모험을 떠날 거야.”

“……뭐?”

바스티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이 꼬마 아가씨가 또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러나 싶었다.

어젯밤, 자기 전에 흥미로운 탐험가의 이야기를 읽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만 믿고 따라와, 바스티.”

바스티안은 우거진 덤불 숲으로 이끄는 이블린의 손을 잠자코 따랐다.


‘내가 같이 있으니까 괜찮겠지.’

아직 힘을 안정적으로 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작은 이블린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었다.

무엇보다 씩씩하게 그를 이끄는 이블린이 무척 귀여웠으니까.

호위기사들까지 따돌린 두 사람은 개구멍을 빠져나와 공작가 뒤로 이어지는 전나무 숲으로 향했다.

이블린의 최종 목적지는 공작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뒷산이었다.


“봐, 바스티. 나만 믿고 따라오랬잖아.”

산 중턱에 이르러 의기양양해진 이블린이 조그만 주먹을 허공에 휘두를 때였다.


“뭐야, 진짜 호위도 없이 왔잖아?”

“내가 말했잖아, 황태자가 공작가에 드나든다고.”

“……!”

두 사람을 기다린 건 정체불명의 괴한들이었다.


“이브, 이쪽으로 가자.”

“응? 바스티, 어디 가는 건데?”

괴한들의 눈을 피해 움직였지만, 이미 늦어버린 후였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고, 어느새 두 사람은 괴한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 황태자 전하, 그냥 얌전히 저희를 따라오시는 게 좋을 겁니다.”

복면을 쓴 사내의 손에 들린 검이 빛을 받아 번쩍였다.


‘저들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어.’

사내들의 수를 헤아려 보다 바스티안은 차분하게 협상을 시도하기로 했다.


“내가 목적인 거지? 따라갈 테니 이 아이는 그냥 보내주도록 해.”

어떻게든 이블린만이라도 무사히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이블린이 험한 일을 겪게 둘 수는 없으니까.

따지고 보면, 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안일함과 힘을 과신한 오만함도 한몫했고.


“그럴 수는 없지요, 그 꼬마 아가씨가 아무리 봐도 티에르 공녀 같거든요.”

“돈이 목적이라면, 내 몸값 하나로도 충분할 텐데.”

“황태자 전하께 바라는 건 고작 돈이 아닙니다. 돈은 티에르 공작가에서 받도록 하지요.”

수가 틀렸다는 걸 깨닫고 바스티안은 곧장 호위 기사들을 부르는 신호를 하늘로 쏘아 올렸다.


“!”

깜짝 놀란 괴한들이 두 사람을 향해 덤벼든 건 동시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브, 뛰어!”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손을 낚아채고 무작정 달렸다.

그렇게 이른 곳은 가파른 절벽 끝이었다.


‘뛰어내릴까.’

힘을 사용한다면, 어떻게든 크게 다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바스티안이 높이를 가늠하며 고민하던 때였다.


“전하, 위험한 짓은 하지 않으시는 게 좋겠습니다.”

사내 하나가 멀리서 읊조리며 다가왔다.

경계하는 바스티안을 본 사내는 그대로 몸을 돌려 바스티안에게 등을 보였다.


“호위 기사단을 부르셨지요? 그들이 오기 전까지 제가 막아보겠습니다.”

“……뭐?”

바스티안이 의아해하는데, 뒤늦게 사내들이 몰려왔다.


“이봐, 뭐 하는 거야? 비켜.”

그들은 검을 겨눈 동료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미안하게 됐군. 상황이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어.”

그리고 사내는 망설임 없이 동료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사내의 검에 속수무책으로 쓰러지는 이들이 보였다.


“……이브, 이쪽으로.”

바스티안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이블린의 손을 움켜쥐었다.


“바스티, 그럼 저 사람은?”

“그건…….”

걱정스레 사내 쪽을 쳐다보는데 손아귀에서 이블린이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브!”

“바스티!”

정신없는 틈을 타 다가온 괴한 하나가 그대로 이블린을 낚아챈 탓이었다.

바동거리는 이블린을 본 바스티안은 곧장 나무줄기로 괴한의 발을 묶고 그의 다리에 검을 꽂았다.


“으악!”

괴한이 곧장 손에 든 이블린을 내던지듯 던졌다.

바스티안이 힘을 쓰기도 전, 이블린은 바위에 부딪히며 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브, 이브 괜찮아? 아, 안 돼.”

이블린의 투명한 백금발을 적시는 붉은 액체가 보였다.


“바……스티, 미안…… 내가…….”

괜히 데리고 나와서.


“이블린, 죽으면 안 돼, 내가 살려줄게.”

“내가…….”

“아무 말도 하지 마, 나만 믿어.”

바스티안은 정령 수업 때 들었던 내용을 떠올렸다.

이블린을 살리려면…….

미안해, 이블린.

방법이 이것뿐이야.

몇 번이고 작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힘을 넘겼던 것 같다.

제발. 부디.

이 작은 생명체가 내 곁을 떠나지 않도록.

그리고 이블린의 호흡이 안정적으로 변하는 걸 느끼고서야, 바스티안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야, 다행이야, 이브.’

조금만 버티면 호위기사들이 올 테니까.

살 수 있어.

이블린을 꼭 끌어안으며 귓가에 속삭이는데, 발을 지이익 끌며 다가오는 인기척이 들렸다.

어느새 괴한의 무리를 전부 정리한 사내가 피투성이가 된 몸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이블린을 보호하듯 안으며 바스티안은 더욱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이블린.”

이블린을, 알아?

사내의 입가에서 작게 흘러나오는 이름에 바스티안의 눈이 사내에게 향했다.

그는 이블린을 만지고 싶은 듯 손을 움찔대고 있었다.


“……너는 누구지?”

바스티안의 질문에 사내가 힘겹게 복면을 벗자 피에 젖은 금발이 드러났다.

사내는 이블린과 똑같은 금발이었다.


“전하를 습격한 이들은 전부 베라츠 사람들입니다. 저희의 목표는 전하를 납치해 제국에 협상을 요구하는 거였습니다.”

“……다시 묻지, 그대의 정체를 밝혀. 이블린을 어떻게 아는 건지도.”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요. 전하께서는 베라츠의 습격을 당했을 뿐이고, 습격자들 사이에서 갑자기 내분이 일어난…… 큭.”

사내의 입에서 붉은 피가 울컥 쏟아졌다.


“제가, 이블린을 한 번 안아봐도 되겠습니까?”

바스티안은 잠시 망설이다가 이블린을 품에서 내주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고 본능이 외치는 기분이었다.


“아…….”

사내의 눈에서 피와 섞인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블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잠시간 있던 사내가 곧 이블린을 조심히 내려놓았다.


“저는…… 소피엘 카디아입니다.”

“……카디아?”

바스티안의 눈빛이 다시 사나워질 때쯤.

사내가 떨리는 손으로 품 안에서 작은 편지를 꺼내 내밀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습니다. 언젠가, 전해주시겠습니까.”

바스티안이 받아들자 사내가 다시 한번 고맙다고 속삭였다.


“저와 나눈 대화도, 이제 잊으십시오. 전하는 저와 만난 적이 없으신 겁니다.”

다시금 복면을 쓴 사내의 눈이 이블린에게 멈췄다.


“모두…… 이블린을 위해서입니다.”

몸을 힘겹게 일으킨 사내가 다리를 지익 끌며 멀어져 갔다.

그리고 바스티안의 시야에서 사내가 사라지고 난 뒤 들려온 건, 검이 살집을 뚫는 소리와 누군가 바닥으로 풀썩 쓰러지는 소리뿐이었다.

전부, 호위기사단이 도착하기 전 짧은 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
.



“이브는?”

“전하.”

깨어나자마자 이블린을 찾아간 바스티안을 맞아준 사람은 리본느였다.


“전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바스티안은 두 손을 붙잡고 상태를 묻는 리본느를 뿌리치고 이블린에게 다가갔다.


“무사한 건가? 괜찮은 거지?”

“네, 전하 덕분에 살았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의자에 풀썩 주저앉은 바스티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구한 게 아니야.”

바스티안은 조그맣게 입을 열었다.

그가 꼭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었다. 확인해야 할 것.


“금발 머리의 사내였어, 리본느. 이블린과 똑 닮은 색.”

“……!”

리본느의 얼굴을 빤히 보며 말하자 그녀의 표정이 새하얗게 질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리본느는 침실의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바스티안을 더 안쪽으로 데려갔다.


“……전하, 제게…… 더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리본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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