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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오래 전 버린 이름 (80/95)


80. 오래 전 버린 이름
2022.07.06.



“……바보 같은 사람.”

절벽에서 벌어진 일을 전부 듣고 난 후, 리본느는 눈물 섞인 한마디를 뱉어냈다.


‘그런 건가.’

숨죽여 우는 리본느를 보며 바스티안은 제 추측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금발의 사내와 리본느의 관계.

그리고 그가 왜 이블린을 그런 눈으로 바라봤는지도.


“그럼 이블린은…….”

바스티안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서글피 우는 리본느에게 물어야 하나 싶지만, 그래도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었다.

베라츠의 첩자들.

몇 번이고 황제를 암살하려 시도했던데다가, 이번에는 황태자를 납치하려 했다.

만약 그 사내가 정말 이블린의 친부라면…….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공작가는 물론 이블린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리본느가 곧장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명예롭지 못한 짓이라는 것도, 가문에 먹칠하는 행동이었다는 것도 잘 압니다.”

“일어나, 리본느.”

바스티안이 리본느를 일으키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하지만, 마음이 가는 걸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리본느의 목소리에서 흐느낌이 조금씩 사라졌다.

바닥에 우직하게 앉아 올려다보는 리본느의 말투는 공손했지만, 올곧은 표정과 자세에서 후회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바스티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흘렸다.


“리본느, 그대의 부친과 폐하께서도 이 사실을 알아?”

“제 아버지는 아이의 친부에 대해서는 전혀 모릅니다. 오로지 그 사람과 저만 아는 일입니다. 이제, 전하께서도 알게 되셨지만요.”

“…….”

“저를 친우로 대해주신 황후 폐하께도, 저희 가문을 믿고 곁에 두신 폐하께도…… 면목 없습니다.”

“…….”

“전하, 저를 크게 벌하셔도 상관없습니다.”

바스티안의 미간이 저절로 좁아졌다.

리본느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자신을 친아들처럼 챙겨 준 이였다.

무엇보다 이블린의 어머니이고.


“전하, 평생 가슴에 묻고 살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다른 이와 결혼하게 되었지요.”

“……가문을 위해서?”

리본느의 눈에서 마지막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아닙니다.”

이블린과 같은 연녹색 눈동자가 닫힌 문밖으로 향했다.

이블린의 침대가 있는 곳이었다.


“이브를 위해서요.”

바스티안 또한 같은 곳을 바라봤다.


“……난 이브에게 내 모든 걸 줬어.”

황태자의 책임보다도, 무게감보다도 이블린을 살리는 것만 생각했으니까.


“그러니까, 리본느. 리본느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전하.”

“오늘 일은…… 전부 묻을 거니까.”

그게 이블린을 위한 길이라면.


“……감사합니다, 전하. 부디 이브를…… 지금처럼 아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전부, 제 욕심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까요.”

 

.
.

바스티안은 조용히 창틀을 짚었다.

행복한 듯, 슬픈 듯 울던 리본느의 얼굴은 지금도 생생했다.

저런 게 사랑인 걸까 막연하게 느꼈던 감정도.

창틀을 짚은 손등에 서서히 핏줄이 돋았다.


‘내가 어리석었어. 그런 곳에 숨겨두셨을 줄이야.’

유언장의 존재만 진작 알았더라면, 이토록 멀리 돌아올 필요는 없었다.

이블린의 의사와 상관없이 티에르 공작을 그의 선에서 처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하긴,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인 건가.’

바스티안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리본느, 어쩌면 선대 공작은 모든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런 유언장을 작성한 걸 보면 말이야.

전부 이블린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한 거였겠지.

어쨌든 그가 바라던 끝이 보이는 듯했다.

나의 이브. 고집쟁이 아가씨.

네 손에 배긴 굳은 살 만큼, 네가 흘렸던 눈물만큼 값을 치르게 할 테니까.

네 손을 더럽혀야 하는 때가 오면, 전부 내가 대신할게.

바스티안이 조용히 집무실 문을 열었다.

이제 이블린을 위로하러 갈 시간이었다.


 

* * *



“이 망할 계집! 역시 너 따위 그냥 치워버렸어야 했어! 감히 날 이런 곳에다 처박아 두다니! 네가 날 이렇게 취급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목이 쉬다 못해 갈라져서 외치는 소리가 벽에 부딪히며 메아리쳤다.


“온 세상이 널 비난할 거다! 제 아비를 제 손으로 직접 잡은 독한 계집이라고!”

“이브, 어떻게 해? 다시 입에 뭐라도 물려드려야 하는 건가. 저러다가 혀라도 깨무는 건 아니겠지?”

휴이터가 뒤를 힐끗대며 조용히 물었다.


“괜찮아, 자기 삶을 쉽게 포기할 사람은 절대 아니니까.”

이블린이 가파른 계단을 앞서 내려가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잘 부탁해, 휴이. 혹, 사고가 생기지 않도록 신경 좀 써주고.”

“걱정 마, 이브. 휴, 역시 네 말대로 여기로 데려오길 잘한 것 같다.”

여전히 빽빽대는 공작의 외침을 들으며 휴이터가 고개를 내저었다.

원래 이블린에게 디에스티 가문이 소유한 별장에다가 공작을 데려다 놓자고 제안했던 터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블린에게는 부친인데, 그게 더 보기에 좋지 않나 여긴 거였다.

그랬는데, 티에르 공작은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괘씸한 사람이었다.

이블린에게 저런 모욕적인 말을 퍼붓다니.

공작이 이블린을 함부로 대하는 걸 두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듣는 건 처음이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몰랐어.’

이블린이 지난 2년간 계속 저런 취급을 받았다니 화가 났다.


“그냥 더 기다릴 거 없이 즉결 처분하는 건?”

“아직, 조금 더 조사할 게 있어.”

탑에 있는 감옥은 근위대에서 관리하는 지하 감옥보다 더 보안이 철저한 곳이었다.

공작을 비롯해 그의 보좌관, 심부름꾼, 마차 마부까지.

모든 이들은 앞으로 이곳에서 비밀리에 조사를 받게 될 터였다.

물론 이 모든 사항이 철저한 기밀이었다.

모든 일은 호위기사단의 주도하에 은밀히 처리됐으니까.


“근데 너, 정말 괜찮은 거지?”

탑을 다 내려와 출구가 보일 때쯤, 휴이터가 웃는 건지 화내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때가 다가온다고 느꼈지만, 상황이 조금 갑작스럽게 진행된 느낌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제 손으로 직접 아버지를 붙잡아 왔으니, 그 속이 오죽할까.


“괜찮아, 처음부터 각오했던 거잖아.”

이블린이 감정 없이 차가운 눈으로 읊조렸다.

그리고 출구에 이르러서야 몸을 돌려 휴이터를 올려다봤다.

이블린의 입꼬리는 짓궂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나 이제 작위도 받게 될걸? 이제 공작 각하라고.”

“참나.”

휴이터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쳤다.

이블린이 제게 걱정 끼치지 않으려고 더 저런다는 걸 알았다.


“넌 어차피 황후가 될 거잖아. 이제 공작 작위가 의미가 있어?

“그건…….”

“가, 이브. 얼른 가서 쉬어.”

휴이터가 이블린의 등을 떠밀었다.

지금 그녀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꼭 황제와 닮았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응. 고마워, 휴이. 그동안에도, 지금도. 늘 옆에서 도와준 거 잊지 않을게.”

“야, 넌 무슨 그런 말을. 조만간 우리 아버지나 한번 만나드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궁금하신 모양이야.”

“알았어.”

“……힘내, 이브.”

떠나기 전, 휴이터가 이블린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응, 갈게, 휴이.”

어두운 통로를 벗어난 이블린이 달빛이 은은하게 깔린 어둠 속으로 발을 디뎠다.

이블린의 얼굴에서 다시금 미소가 사라졌다.


“네 핏줄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고귀하지 않단다.”


“황후고 뭐고, 네 미래도 끝이다!”

 
부친의 말이 저주처럼 귀에서 맴돌았다.

조부에게 다른 치부가 있던 걸까.

아니면, 정말 그녀에게 다른 친부가 있다는 의미일까.

마지막 무기라도 되는 모양이니, 부친이 쉽게 털어놓을 리는 없었다.

그걸 가지고 또 무언가를 협상하려 들 테지.

그래도 사방을 막아두고 연결고리를 끊어 놓았으니 뭘 시도하기는 어려울 터였다.


‘이 기분은 뭘까.’

그토록 기다렸던 날인데. 뭔가 허무하기도 하고,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마음이 복잡했다. 황제궁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지친 한숨을 쉬며 발을 떼던 이블린은 문득 길목에 커다란 바위처럼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폐하.”

“이브.”

“언제부터 와 계셨어요.”

바스티안이 말없이 두 팔을 벌렸다.

이블린은 그런 바스티안을 가만히 바라봤다.

어쩐지 마음 어딘가가 울컥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이블린은 천천히 발을 움직였다.

조금씩 바스티안에게 향하는 걸음이 빨라졌다.

몇 걸음 가지 않아 바스티안에게 폭 안긴 이블린이 허리를 끌어안자, 화답하듯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안아주었다.


“고생했어, 이블린.”

나의 이브.

귓가에 속삭이는 이름을 들으며 이블린은 눈을 꼭 감았다.


“……다녀왔어요, 폐하.”

“그래, 잘 왔어, 이브.”

 

* * *



“후작님?”

“아, 디에스티 경.”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다베르가 휴이터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어디 가시는가 봅니다.”

다베르에게 다가온 휴이터가 시간을 가늠하듯 하늘을 보고는 의아함을 드러냈다.


“네, 폐하의 명으로 긴급히 볼 일이 생겨서요.”

“그러셨군요, 오늘 밤이 유독 바쁘네요.”

황제의 명. 휴이터가 무슨 일인지 알만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황제가 공작을 체포하는데 이블린을 혼자 보낸 데는 다 이유가 있는 거다.

또 이블린을 지원하려고 뒤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거겠지.


‘바쁘다니.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정작 아무것도 전달받지 못한 다베르는 의아할 뿐이었다.


“경은 어디에서 오시는 길입니까?”

“감옥 정비를 한 번 더 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새로 수감 된 자들이 있으니.”

“……그러셨군요.”

다베르는 다 아는 사람처럼 공감하듯 대답했다.


‘새로 수감 된 자들? 그러고 보니, 기사단도 거의 안 보이는군.’

무언가 제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는 듯했다.

아마도 이블린 티에르가 주도하는 무언가.

얼마 전에도 알피도 자작이 구금되었었는데.


“……단장님이 바빠 보이시더군요.”

다베르는 떠보는 척 말을 던지고 휴이터의 반응을 살폈다.


“네, 아무래도. 그보다는 마음이 더 안 좋겠지만요.”

역시 이블린 티에르와 관련된 일인가.


“……어쨌든 늦은 시각까지 고생이 많으시군요. 조금 더 수고해주시지요, 경.”

“네, 후작님도요. 그럼 이만.”

휴이터가 쓰게 웃으며 작별을 고했다.

휴이터와 헤어진 다베르는 다시 침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설마, 뭘 눈치챈 건 아니겠지.’

다베르는 굳어버린 입매를 마구 문질렀다. 그의 걸음에 조급함이 묻어났다.

침실 문을 걸어 잠근 다베르는 곧장 태피스트리의 뒤를 확인했다.


‘아직 누가 손을 댄 흔적은 없어.’

안도한 다베르가 침실 곳곳에 숨겨둔 서류를 찾아 여행 가방에 집어넣은 뒤 다시 방문을 나섰다.

따라붙은 이는 없는지 주변을 경계하며 마사로 향한 다베르는 어느새 평소의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다베르를 태운 말이 곧 빠르게 황궁을 벗어났다.


“베라츠에 소피엘 카디아란 자가 있어.”


“그자를 찾는 게 아니야. 그자의 가족을 찾으려는 거지.”

 
어둠을 가르며 다베르는 바스티안의 명령을 되새겼다.


‘왜, 어째서.’

말 고삐를 쥔 다베르가 초조하게 입술을 짓씹었다.

카디아.

베라츠 왕족을 증명하는 이름.

그가 오래전 버린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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