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드러나는 본심
(82/95)
82. 드러나는 본심
(82/95)
82. 드러나는 본심
2022.07.13.
“당연히 비교할 수 없죠.”
이블린이 불퉁하게 입을 비죽였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하냐는 표정이었다.
“제국이 없고, 황실이 없다면 제 가문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아, 황제라서 내가 중요하다?”
“아, 정말. 또, 또 괴롭히시려고. 그런 의미가 아닌 거 아시잖아요.”
이블린이 그만하라는 듯 바스티안의 옷깃을 붙잡았다.
“음, 전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제대로 말해주는 게 어때.”
끝까지 뻔뻔하게 나오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냥 제게 중요한 사람이에요. 소중한 사람이고.”
“왜? 어째서?”
“……좋아하니까.”
“그렇군.”
그제야 만족스럽다는 듯 입꼬리를 늘이는 바스티안을 보며 이블린이 기가 찬다는 듯 헛숨을 토해냈다.
“꼭 이렇게 말을 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하시죠. 기어코 이런 말을 입 밖에 내게 만드시다니.”
이블린이 볼을 붉게 물들인 채 투덜거렸다.
“어디서 많이 듣던 표현이군.”
바스티안은 막 피어난 꽃봉오리 같은 볼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놓으며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이블린.”
“뭐가요.”
“내게 그대가 그래. 그대가 없다면, 어떤 것도 허망해.”
“…….”
이블린이 조금 누그러진 얼굴로 제 볼을 문지르며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그러니 그대가 누구든, 어디에서 왔든, 어떤 존재이든 상관없어.”
그대의 머리 색이, 그대의 몸속에 흐르는 피가 어디에서 왔든지. 전혀. 조금도.
이블린은 말없이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부친의 말에 피어난 기묘한 찝찝함이 조금 희석되는 것 같았다.
“이리 와, 이블린. 말로 설명이 부족하다면, 다른 방법으로 확인시켜 줄 테니까. 이 의심 많은 아가씨야.”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손을 잡고 품으로 당겼다.
* * *
“짜증 나.”
침실로 돌아온 보니카는 침대 위에 엎드려 누운 채 눈물을 터뜨렸다.
생각할수록 괘씸하고 화가 났다.
그녀를 구경하듯 쳐다보던 하녀들의 시선을 떠올리자 진한 모욕감이 차올랐다.
보니카는 다리를 바동거리며 몸부림치며 베개를 팡팡 내리쳤다.
“이러다가 아무것도 못 해보면 어쩌지?”
황제의 얼굴만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럼 만족할 수 있는데.
얼굴도 보여주지 않는 그이가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놓고 이블린 티에르와는 피크닉이라니!
바쁘다는 핑계로 만찬장에는 발걸음도 하지 않으면서!
서럽고 서러웠다.
“폐하, 어차피 저도 폐하의 여인이 될 텐데, 왜 이리 제 마음을 아프게 하시나요.”
그냥 품어주시면 되잖아요.
우리 가문이 티에르 가문보다 부족해서?
아니, 어차피 티에르 가문도 옛날의 그 티에르가 아니었다.
사교계에서 이블린 부친의 혈통을 두고 이런저런 말이 오간다는 건 그녀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왜 이블린 티에르냐고.
“보니카, 솔직히 말하자면 여기까지가 한계다. 황궁에 들어가면 그다음부터는 오롯이 네 몫이야. 내가 폐하께 뭘 더 했다가는, 내 목이 먼저 날아갈 수도 있어.”
황궁으로 들어올 때, 부친이 당부한 말이 있으니 어떻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흐아앙, 서글픈 울음소리가 터졌다.
보니카의 화려한 얼굴에서 흐른 굵은 눈물방울이 베개를 적셨다.
기껏 아침부터 치장한 화장이 흉하게 번졌다.
하지만, 보니카가 간과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후작가와 다르게 이곳은 듣는 귀가 많다는 거였다.
“뭐야, 저건?”
테라스에서 여유롭게 다과를 즐기던 마르다의 손이 허공에서 굳었다.
테라스 울타리 너머에서 괴상망측한 소리가 들렸다.
“설마, 우는 거야?”
세상에, 그 도도한 얼굴로 저렇게 우는구나.
마르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가 곧 가늘어졌다.
‘흥, 귀족 영애도 별수 없구나.’
아침부터 나가서 싸돌아다니는 것 같더니 왜 저런담?
마르다가 키득키득 웃었다.
황궁에 온 기간이 길어질수록, 보니카는 점점 예민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초조할 만도 하지.
‘하, 그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마르다가 짜증을 내며 쿠키를 와그작 깨물었다.
“황궁으로 가면 널 도울 아이가 있을 거다. 네게 조용히 접근할 테니,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거다.”
부친의 말과 달리 그녀에게 접근해 오는 이가 없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아버지는 대체 뭘 하고 계신 거지?’
뭐든 다 해줄 것처럼 말하더니.
아버지의 지시는 하나였다.
황제의 눈에 들어 어떻게든 하룻밤을 취할 것.
‘하룻밤이라니, 그게 말이 쉽지.’
이블린이 옆에 찰싹 붙어 놔주질 않는데 무슨 수로.
마르다는 가루가 묻은 손가락을 빨아 먹으려다가 참았다.
‘이렇게 된 이상 아버지의 도움 없이 알아서 하는 수밖에.’
음, 슬슬 그걸 쓸 때가 됐나?
마르다는 짐 깊숙이에 숨겨두었던 천 주머니를 떠올렸다.
임신이 잘 되게 돕는다며 어머니가 종종 사내를 만날 때 사용하던 약재였다.
“만약 네가 사내아이였다면 더 좋았겠지만, 어쨌든 네가 있으니까 그 사람도 우리를 내치지 못 하는 거잖니.”
모친은 늘 그녀를 볼 때마다 뿌듯하게 말하고는 했다.
‘어머니의 도움을 받는 날이 올 줄이야.’
황궁으로 들어오던 날, 속옷 안에 숨겨서 검문을 피해 무사히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언제 어떻게 쓰느냐인데.
사내에게 써도 상관없지만, 황제에게 쓰는 건 불가능할 테고.
보니카에게 넘길까, 내가 쓰는 게 나을까.
고민하다가 몸을 일으킨 마르다가 옆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보니카, 안에 있죠? 잠깐 이야기 좀 나누지 않을래요?”
* * *
“폐……!”
“쉿.”
알리에타가 비명을 지르려다 말고 입을 막았다.
바스티안이 조용히 하라며 눈짓한 탓이었다.
알리에타는 바스티안의 품에 안겨 곤히 잠든 이블린을 보고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히 침실 문을 열었다.
알리에타는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는 걸 가만히 지켜봤다.
황제가 그녀의 보물인 이블린을 유리구슬 다루듯이 애지중지하는 걸 볼 때마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블린의 머리를 쓸어 넘겨준 바스티안이 이마에 입을 맞출 때는 알리에타도 눈치껏 고개를 돌렸다.
“왜 안 자고 여기 있는 거지?”
침실 문을 닫고 나온 바스티안이 알리에타를 보며 픽 웃었다.
“점심에 나가신 두 분이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시니 걱정이 되어서…….”
“느긋하게 쉬다 오겠다고 했을 텐데.”
이렇게 늦게 돌아오실 줄은 몰랐죠.
알리에타의 순박한 눈망울에 하고 싶은 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술을 좀 마셨어. 내일 늦게까지 자게 두도록 해.”
“네, 폐하.”
“그리고.”
“네, 말씀하십시오, 폐하.”
“……아니야.”
바스티안이 말을 덧붙이려다 말았다.
아침에 이블린의 몸을 보면 기겁하겠군.
그래도 저를 혼내지는 못할 거다.
이때만큼은 제가 황제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참.”
바스티안이 걸음을 떼려다 말고 다시 알리에타를 응시했다.
“어제 이후로, 이블린에게 이상한 점은 없었어?”
“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던 알리에타가 곧 진지하게 기억을 되짚기 시작했다.
이블린의 사소한 것에도 기민하게 반응하는 황제니까, 그녀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그러고 보니.”
알리에타의 표정이 뒤늦게 창백해졌다.
“어제 목욕할 때, 좀 이상한 걸 묻기는 했습니다.”
“그게 뭐였지?”
“그…….”
“괜찮으니 말해.”
“마님에게 다른 연인이 있었는지, 그리고 선대 공작님의 사생활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머뭇거리던 알리에타가 솔직히 털어놓았다.
바스티안이 이블린에게 해를 가할 리 없다는 믿음이었다.
역시나.
바스티안이 그럴 줄 알았다며 옅은 한숨을 흘렸다.
어쩐지 이상한 걸 묻는구나 싶었다. 티에르가 아니면 어떻게 할 거냐니.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 이블린 곁에 있도록 해.”
“네, 폐하.”
걸음을 옮기는 바스티안의 눈동자에 냉기가 어렸다.
그가 향하는 곳은 성탑이었다.
티에르 공작이 갇혀 있는 곳.
.
.
“설마, 설마 나를 계속 여기에 두려는 건 아니겠지.”
딱딱한 나무 의자에 앉은 공작이 중얼거렸다.
차가운 벽돌로 만들어진 감옥은 침대와 책상 하나가 전부인 작은 공간이었다.
생쥐가 끊임없이 찍찍대고, 가끔 벽을 타고 지나가는 벌레도 보였다.
비참했던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하는 공간이었다.
‘아니야, 오만하긴 해도 그렇게 독한 계집은 아니야.’
하물며 명예를 중요시하는 그 티에르가 아니던가.
‘내게 겁을 주려는 걸 테지. 제가 원하는 대로 판을 이끌어 가려고.’
하지만…… 제 어미에 대한 걸 알았으니 눈이 휙 뒤집혔을 수도…….
설마, 이대로 갇혀 있다가 소리 소문도 없이 목이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공작이 목을 문질렀다.
“어떻게든 여기를 벗어나야 해.”
그런데, 대체 어떻게?
‘후작가? 아니야, 거기는 그럴만한 힘이 없어. 철새처럼 다른 쪽으로 갈아타면 모를까.’
공작이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알피도 자작은?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숨겨진 재산을 넘겨 잘 받았다고 했던가.
‘역시 그 자식이?’
최근 들어 그와 만나는 걸 계속 피하던 게 의심스럽다 했다.
공작이 이를 으득 갈다가 힘을 풀었다.
지금은 화를 낼 때가 아니었다.
공작은 도움을 청할 만한 상대를 끊임없이 탐색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자가 없었다.
마르다, 망할 계집은 제 아비가 어떤 곤경에 처한 지도 모르고 있을 테고.
“역시 디에스티 경뿐인가.”
원리원칙에 철저한 사람이니까, 이블린을 설득하려 들지도.
차라리 법정에 서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일단 이 망할 탑만 벗어날 수 있다면.
공작이 초조하게 다리를 덜덜 떨 때였다.
멀리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검이 철그렁거리는 소리가 없는 걸 보니 근위병이나 호위 기사는 아닌 모양이었다.
‘……누구지?’
공작이 기대감과 두려움이 반씩 섞인 표정으로 쇠창살 밖을 쳐다봤다.
등불 하나만 걸려 있는 벽면에 곧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뜻밖의 존재였다.
“이런, 얼굴이 많이 상했군요, 경.”
바스티안이 혀를 끌끌 차며 인사를 건넸다.
며칠 사이에 공작의 음흉한 눈 밑은 더 움푹 패 퀭했고, 손질하지 못한 수염과 머리는 엉망이었다.
평소처럼 능글대는 황제의 얄미운 표정을 본 공작이 어금니에 힘을 줬다.
구경이라도 하러 온 건가.
이 황제가 바로 이블린을 건방지게 만든 원흉이었다.
온갖 저주를 퍼붓고 싶었지만, 공작은 기듯이 무릎으로 걸어 쇠창살에 다가갔다.
일부러 단식하며 버텼더니 위엄있게 걸을 힘도 없었다.
“폐, 폐하. 이 누추한 곳까지 오셨습니까.”
공작은 한껏 예의를 차렸다.
황제는 이블린을 그토록 아끼니까, 이블린의 명예를 운운하면서 빼내 달라고 하면 먹힐 수도 있었다.
지금은 이 황제가 그를 구원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안 그래도, 폐하께 의논드리고 싶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 잘 됐군요. 나도 경과 의논할 게 있었거든.”
바스티안이 서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