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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축하드립니다, 폐하 (83/95)


83. 축하드립니다, 폐하
2022.07.17.



“내가 황위에 있는 동안은, 이 탑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말입니다. 경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군요.”

바스티안은 다른 때보다 더 공손하고 비굴해진 공작을 보며 조소를 숨기지 않았다.

필요에 따라 오만하거나 비굴하게 구는 건 공작의 특기였다.

차라리 이블린의 친부가 적국의 왕족인 게 낫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물론, 이런 자의 핏줄이라 할지라도 이블린을 아꼈을 테지만.

바스티안이 근위병의 도움 없이 감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그의 등 뒤로 쇠창살이 철컹 하고 요란하게 닫혔다.

바스티안은 느긋하게 감옥 안을 둘러 보았다.


“생각보다 아늑한 공간이군요.”

“……네?”

바스티안의 감상을 들은 공작은 그만 어이없다는 듯 되묻고 말았다.


“역시 이블린은 심성이 너무 고와서 탈이란 말이지.”

“…….”

곤란하다는 듯 턱을 매만지는 바스티안에 공작은 한층 더 기가 막혔다.

설마 저런 헛소리나 늘어놓으려고 여기까지 왔다는 말인가.

아니면, 약 올리려고 온 걸까.

공작이 입을 벌린 채 바스티안을 보는데 갑자기 바스티안이 눈을 마주쳐왔다.


“나였다면, 이렇게 두 다리 편히 뻗고 자게 두지는 않았을 텐데.”

그 눈빛이 매서워 공작은 그만 움찔하고 말았다.


“뭐, 나였다면 그랬을 거란 말입니다.”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공작은 바스티안이 풍기는 냉기에 오금이 저리는 걸 느꼈다.

황제는 간이나 보려고 온 게 아니다.

아마 유언장에 대해서도 다 알고 왔겠지.

그렇다면 여기서 살아남을 방법은 하나였다.

차라리 바스티안의 약점을 공략하는 게 나았다.


“폐하, 이블린이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도와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운을 띄워놓고 공작은 바스티안의 눈치를 살폈다.

표정은 차가웠지만 별다른 말이 없는 걸 보니 그의 얘기를 들어 줄 것 같았다.


“세상에, 제 아비를 감옥에 넣다니요. 곧 황후가 될 아이인데, 이런 사실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평에 좋을 리 없습니다.”

“…….”

“티에르 가문이 건재해야 이블린도 든든하지 않겠습니까.”

“아, 전부 이블린을 위해서 그런 거다?”

“네, 그렇습니다.”

“흠, 평이라.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이미 난 내 아이를 가진 여인을 두고도 황후 후보를 들인 몹쓸 황제가 되었거든. 고맙게도, 누구 덕분에.”

바스티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폐, 폐하. 그건 귀족들이 생각이 짧아서…….”

“어떻습니까, 공작. 그대의 딸을 둘이나 황후 후보로 만든 소감이.”

“!”

이 여우 같은 자식.

알면서 떠보고 있었구나.


“공작, 그대가 모르는 것 같으니 내가 친절하게 설명해줄까 하는데.”

티에르 공작이 마른 침을 삼키며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황가의 사람들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 그런 건 애초에 없었습니다.”

“!”

“선대 티에르 공작은 이런 미래를 예견했던 모양입니다. 내 아버지께 유언장을 맡긴 걸 보면.”

바스티안은 부친의 편지에 있던 내용을 생각하며 픽 웃었다.


“지금 그대의 생각이 맞아. 경은 두 분의 손바닥 위에서 놀아난 겁니다.”

“…….”

비굴하던 공작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퍼렇게 변해갔다.

이렇게 된 바에야, 더는 재고 따질 것도 없었다.

이제 승부수를 띄워야만 했다.


“그럼 폐하, 이미 그 사실도 알고 계시겠군요. 이블린이 제 친딸이 아니라는 것을요.”

공작은 음습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게 알려지면 폐하께서도 여러모로 곤란해지시지 않겠습니까? 가뜩이나 귀족회에서도 이블린을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이 났는데요.”

“……경은, 뭘 알고 있지?”

공작은 바스티안의 눈에 이채가 도는 걸 느꼈다.

먹혔다. 먹히고 있어.


“어떤 핏줄인지도 모르는…….”

“아, 그 이야기를, 이블린에게도 했겠지?”

바스티안이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공작의 말을 툭 끊었다.


“공작, 충고 하나 하지요. 그냥 그대가 이블린의 부친으로 남는 게 나을 겁니다.”

“……네?”

“적어도, 여기서 두 발로 멀쩡하게 살아서 나가고 싶다면.”

죽고 싶지 않으면 입을 다물라는 협박이었다.


“폐하, 어, 어떻게 그런 말씀을.”

공작이 당황한 나머지 말을 더듬었다.


“제국민을 아끼는 좋은 황제, 좋습니다. 그렇지만 그게 모두에게 관대해야 한다는 뜻은 아니거든.”

상체를 숙인 바스티안이 공작의 귓가에 날카로운 경고를 박아넣었다.


“내 말, 명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

목을 조르는 줄 알았어.

주춤거리던 공작은 다리에 힘이 풀려 철퍼덕 주저앉았다.


“경이 조금 더 훌륭한 사람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쉽습니다.”

그랬다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텐데.

이블린이 고생할 이유도, 이런 일을 겪을 필요도.


“적당히 티에르 공작의 이름을 누리는 데 만족하지 그랬습니까.”

“…….”

“아니, 진작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게 나았을지도.”

공작의 목을 움켜쥘 듯 손을 뻗은 바스티안이 혀를 차고는 감옥을 빠져나왔다.


“그만 나와도 좋아, 다베르.”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넘긴 바스티안이 계단으로 향하며 읊조렸다.


“알고 계셨습니까. 대화에 방해가 될까 싶어 가만히 기다렸습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다베르가 태연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들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역시나였다.

그나마 주변이 어두워 표정이 드러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그대가 이 시각에 여기는 왜.”

“알피도 자작 건으로 몇 가지 확인할 게 있어서 왔습니다.”

“그렇군.”

“이런 일을 진행하시면서, 한마디 말씀도 없으셨습니까.”

다베르는 평소 같은 말투와 표정을 유지했다.


“그대가 이렇게 알아서 찾아오잖아.”

“그래도, 미리 알려주시면 저도 조금 더 편할 것 같습니다.”

바스티안은 픽 웃기만 한 채 몸을 돌렸다.

무심하게 계단을 내려가는 바스티안의 뒷모습을 보며 다베르가 안도하던 찰나.


“참, 다베르.”

바스티안이 잊은 게 있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대화, 전부 들었지?”

“……네, 폐하.”

고민하던 다베르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대도 오늘 들은 내용은 함구하도록 해. 특히, 이블린에게.”

“…….”

“그 성격 알잖아. 분명히 자격 운운하며 내 곁에서 떠나려 들지도 모르니까.”

“…….”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나는 무척 화가 날 것 같거든.”

다베르는 그제야 알았다.

바스티안이 제가 엿듣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내버려 둔 이유.

바스티안은 저를 시험하는 거였다.


“네, 걱정은 마시지요. 저도 폐하께서 화내시는 건 무서우니까요.”

다베르는 평소처럼 뻔뻔하게 대답했다.


“알아, 그대를 믿지만, 그래도 확인했어.”

바스티안이 입꼬리만 끌어 올리며 대답한 뒤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역시 그녀가 키야.’

다베르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황제가 이토록 무언가에 집착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럼 이블린을 황제에게서 떼어놓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기회를 노려야 한다. 단 한 번의 기회.’

다베르는 바스티안의 인기척이 사라질 때까지 잠자코 기다리다가 공작에게 다가갔다.


“한참 찾아다녔는데, 여기 계셨군요.”

“하, 그대도 날 놀리려 드나?”

다베르가 무심하게 말하자 공작의 수염이 씰룩거렸다.

그 상관에 그 부하라고.

아무래도 좋다는 듯한 저 무표정을 보고 있으면 속이 뒤집히는 기분이었다.


“그럴 리가요. 혹시 압니까, 제가 도움을 드릴지.”

“…….”

“어쨌든 저는 폐하의 최측근이니까요. 공식적으로, 그렇지요.”

다베르가 쇠창살 앞에 서서 미소 지었다.


 

* * *

침실로 돌아온 바스티안의 표정에 곧장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벌써 몇 달이 지났지만, 이 공간에 이블린이 있는 걸 볼 때마다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일었다.

침대에 조심스레 앉은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눈코입을 차례로 확인했다.

여리고 강한 나의 이브.

편안한 숨소리를 들으면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이블린을 한참이나 보던 바스티안이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 행복은 이토록 사소한 거면 충분한데.

바스티안이 제 손으로 이블린의 손등을 덮자 움찔한 이블린이 곧 눈을 떴다.


“깼어? 미안.”

“폐하, 어딜 다녀오시는 거예요?”

눈을 몇 번 깜빡이던 이블린이 잠에 취한 목소리로 물었다.


“잠깐 산책 좀.”

“……찬 공기가 느껴져요.”

그러냐며 웃은 바스티안이 곁에 눕자 이블린이 품을 파고들었다.

이 따스한 온기를 놓칠까 보냐.

바스티안은 이블린을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죄송해요, 너무 피곤해서…….”

“괜찮아.”

음, 그건 전부 나 때문이니까.

바스티안이 말을 삼키며 이블린의 등을 쓸어주었다.

얇은 잠옷 사이로 보이는 하얀 피부에 그가 남긴 흔적이 가득했다.


“푹 자도록 해, 이브.”

마무리는 전부 내가 지을게.

기다리던 마지막 퍼즐 조각을 찾아냈으니.

이블린을 안은 바스티안의 눈이 서서히 감겼다.

.
.



“또 잠들었나.”

잠든 줄도 몰랐는데.

눈을 깜빡이던 바스티안은 문득 품이 허전하다는 걸 느꼈다.


“이블린?”

품에 있어야 할 사람이 보이질 않았다.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킨 바스티안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침실이 뿌연 안개로 가득 차 있었다.


“이블린!”

바스티안이 당황해서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릴 때였다.


“바스티.”

“…….”

익숙한 목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렸다.


“……아버지?”

흐린 형체가 또렷해지더니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바스티, 벌써 네가 이렇게 컸구나.”

바스티안은 순간 할 말을 잃고 부친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 이건 꿈이구나.


“꿈에 다 나오시는군요.”

깨달은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말했다.


“어때, 황제 노릇은 할만하냐.”

“네, 그럭저럭…… 생각보다는요.”

“좋아 보이는구나.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지.”

“고작 그 말씀 하시려고 오셨습니까.”

“가장 중요한 문제 아니냐. 그럼 잘 지내거라.”

등을 돌린 부친이 성큼성큼 멀어져 갔다.

희미해지는 부친의 뒷모습을 보는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몸에서 모든 힘이 뭉텅 빠져나가는 듯, 마치 피를 전부 뽑아내는 듯한 기묘한 감각.


“!”

바스티안의 눈이 번쩍 뜨였다.


“……무슨 이런…….”

몸을 벌떡 일으켜 앉은 바스티안이 얼굴을 문지르다 급히 옆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블린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이블린?”

바스티안은 제 곁에서 곤히 잠들어 있는 이블린의 얼굴을 조심스레 살폈다.

이마를 짚어보고, 볼에 손등도 가져다 댔다.


‘역시…… 뭔가 기운이 전과 다른 듯한데.’

바스티안은 이블린이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침대를 벗어났다.


“폐하.”

바스티안이 침실 문을 열자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가 달려왔다.


“다트를 불러.”

예상대로라면 이 증상은…….

그리고 바스티안의 추측은 다트가 오고 나서 확실시됐다.

이블린을 진료하고 몸을 일으킨 다트가 환히 웃는 얼굴로 허리를 숙였다.


“축하드립니다,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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