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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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가족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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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가족이 된다
2022.07.20.
초조하게 손끝으로 팔을 두드리던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곁으로 와 앉았다.
“네? 축하…… 라니…….”
이블린이 당황하며 바스티안을 바라봤다.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흔들어 깨우는 바람에 일어난 거였다.
눈을 뜨니 다트가 앞에 대기하고 있었고.
그랬는데, 이게 다 무슨 상황인 건가 싶었다.
“이제 가짜 임산부 행세는 안 해도 되겠습니다, 단장님.”
“!”
“축하드립니다, 두 분.”
“이브, 그대가…….”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손을 잡고 볼에 입을 맞췄다.
복잡한 기분이었다.
기쁜데, 이블린이 걱정되기도 하고.
“아니, 대체 언제…….”
그때였나, 아니면 그때?
당황해서 기억을 되짚던 이블린이 고개를 빠르게 내저었다.
지금 그게 다 무슨 소용이야.
이블린이 얼떨떨한 얼굴로 바스티안을 보다가 제 배를 내려다봤다.
세상에, 여기에 진짜 아기가 있다고?
실감이 나지 않았다.
“다트.”
이블린의 볼을 손으로 조심스레 쓰다듬은 바스티안이 다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네, 폐하.”
“이 일은 철저히 함구하도록 해.”
“네? 폐하, 이렇게 큰 경사를 왜…….”
다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유가 궁금해진 이블린도 바스티안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하녀 중에 첩자가 있다는 걸 내게 숨겼잖아.”
“아니, 폐하…… 갑자기 또 그 얘기는 왜…….”
이블린이 난감해하며 바스티안의 시선을 피했다.
원인을 제공했으니 할 말이 없었다.
에바는 이미 정리했지만, 바스티안에게는 의심 한 자락을 남기게 됐으니까.
“하녀장에게까지만 알리고, 그 외에는 비밀로 하는 게 좋겠어. 좀, 확인하고 싶은 것도 있고.”
바스티안이 단호하게 명령한 뒤 다시 아이처럼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이블린. 어디 이상한 느낌은 없고? 몸은 괜찮아?”
“네, 괜찮아요. 달라진 것도 잘 모르겠고요.”
“먹고 싶은 건?”
“아직 그렇게 큰 차이를 느낄 시기가 아닙니다, 폐하. 진정하시지요.”
다트가 못 말린다는 듯 끼어들어 한 마디를 붙였다.
“다트, 그대는 그만 가. 아침에 다시 오도록 해.”
“네, 네, 알겠습니다.”
다트가 웃음을 참으며 물러나자 바스티안은 기다렸다는 듯 이블린에게 입을 맞췄다.
“이블린, 기쁜데…… 그대가 걱정돼. 걱정되는데, 또 기뻐.”
이블린이 웃음을 터뜨리며 바스티안의 손을 맞잡았다.
이토록 안절부절못하는 바스티안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폐하, 다트가 얘기해주었잖아요. 저는 이 정령의 힘에 특화된 사람 같다고요.”
오히려 여느 때보다 더 기운도 안정됐다고.
어쩌면 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궁에 많은 아이의 웃음소리를 들을 수도 있겠다고.
“그래도, 난 그대가 아픈 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제가 후계자를 바란다고 먼저 말씀드렸잖아요.”
“그 유혹에 넘어간 내가 갑자기 어리석게 느껴지는데.”
“폐하, 제국의 황제로서 그런 무책임한 말씀을?”
“내가 황제가 아니었다면, 그대가 이런 일을 겪을 필요도 없었지.”
“저는 티에르인걸요. 어차피 제게도 후계는 필요하답니다.”
“……역시, 나보다 그대가 더 강한 것 같네.”
이블린을 빤히 보던 바스티안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자신보다 이블린이 훨씬 여유로운 듯 보였다.
“네, 그런 것 같죠? 이상해요, 지킬 것이 또 하나 늘었다고 생각하니까, 마음이 더 단단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이블린은 제 배를 쓱 문질러보았다.
‘우리의 아기라고.’
아직은 납작하고, 아무 느낌도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묘했다.
마음이 복잡하던 시기에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응, 정말 기뻐. 생각보다 더. 진심으로.’
이블린은 옅게 웃으며 바스티안을 응시했다.
“그러니 걱정은 마세요. 저, 생각보다 더 기쁜 것 같으니까요. 폐하는요?”
“당연히, 기뻐. 기쁘지, 이블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콩 부딪치듯 가져다 댔다.
“그대와 정말 가족이 되는 거잖아, 아니, 지금도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러네요, 가족이 되는 거네요, 우리.”
어쩐지 마음이 뭉클해지는 밤이었다.
가족을 잃었으나, 다시 새로운 가족이 생겼으니.
.
.
“세상에, 우리 작고 귀한 아가씨가 아기를 갖다니!”
아침이 되고 뒤늦게 기쁜 소식을 들은 알리에타는 감격의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엄마가 된다니, 오, 맙소사.”
“알리에타, 부끄러우니까 그만해.”
“마님이 살아 계셨다면 정말 기뻐하셨을 거라고요!”
이블린이 알리에타에게 그만하라며 손짓할 때였다.
“오늘은 웬일로 폐하께서 안 보이십니다?”
바스티안의 명으로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찾아온 다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급한 회의가 있어서 먼저 나가셨어요.”
“흠, 단장님보다 다른 일을 우선시하실 분이 아닌데, 꽤 급한 일이신가 봅니다.”
“아마도 제 업무를 좀 줄이실 생각이신가 봐요.”
“하긴, 그냥 넘어가실 폐하가 아니시지요. 어쨌든 잘 됐습니다. 옆에서 감시자가 없으니 마음이 편하군요.”
다트가 껄껄 웃으며 진료함을 내려놓았다.
“이제 자다 말고 불려 나오는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틀렸군요.”
“음, 다트. 궁금한 게 있는데요.”
다트의 농담에 이블린이 민망한 듯 볼을 붉히며 주제를 바꿨다.
“최근에 갈수록 감각이 예민해진다고 느꼈는데, 역시 아이 때문이었을까요?”
“감각이요?”
“네,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음식의 향이라든가, 그런 것들이 더 예민하게 느껴지더라고요. 음식을 보면 재료가 뭔지 알겠다 싶을 만큼?”
“흠.”
더 자세히 말해 보라며 상체를 기울인 다트가 이블린이 말하는 걸 빠르게 적어 내렸다.
“폐하와 비슷해지는 것 같은데요. 역시 힘이 안정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이런 것까지도 다 적어야 하나요?”
“물론입니다. 후손들을 위해서도 그렇고, 제국을 위해서도요. 비밀스러운 힘이니까 가급적 많은 정보를 확보해두어야지 않겠습니까.”
“갑자기 어깨가 무거워지네요.”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블린은 서류 작성을 마무리하는 다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저, 다트?”
“네, 말씀하십시오.”
“제가 큰 사고를 겪었을 때, 치료를 해주었다 했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때도 제게 이런 힘이 있었나요?”
종이 위를 부지런히 오가던 다트의 펜이 삐끗했다.
‘이, 이런 걸 물어오실 줄은 몰랐는데.’
바스티안이 없다고 좋아할 게 아니었던 거다.
“음, 글쎄요. 부끄럽지만,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그때는, 워낙 위급했던지라…….”
“그렇군요.”
이블린이 그러냐며 고개를 끄덕이자 다트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단장님. 내일 또 뵙겠습니다.”
서둘러 짐을 정리한 다트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이제는 슬슬 과거 이야기를 해줘도 되지 않나 싶었다.
‘내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지.’
다트가 바스티안에게 보고만이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하던 때.
“네? 폐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황제의 집무실에서는 분노에 찬 외침이 터져 나왔다.
“이게 대체 무슨…….”
디에스티 공작이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티에르 가문에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쏟아져서 혼란스러웠다.
“경에게 남는 별장은 많지 않습니까. 사용료는 제대로 지급하지요.”
바스티안이 무심하게 읊조렸다.
원래도 정리를 서두를 생각이었는데, 이블린에게 아이까지 생겼으니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폐하,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아무리 그래도 공작을 가, 감금하시겠다니요. 차라리 법적으로…….”
“황후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는 어떤 잡음도 생기지 않게 할 작정입니다. 지금 이블린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기도 하고.”
“그건 그렇습니다만…….”
“당장 귀족회만 해도 이토록 비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습니까.”
“모두 제 불찰입니다.”
할 말을 잃은 디에스티 공작이 고개를 조아렸다.
티에르 공작이 이렇게 일을 벌일 때까지 손 놓고 봤다는 사실에 면목이 없었다.
난감한 표정으로 땀을 흘리던 디에스티 공작은 황제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휴이터를 바라봤다.
휴이터의 표정을 보아하니 녀석은 이미 전부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곧 건국기념일이 다가옵니다, 경.”
갑자기 바뀐 주제에 디에스티 공작이 고개를 휙 쳐들었다.
건국기념일은 제국을 돌봐주는 정령들에게 제를 올리고, 황제들을 기리는 날로 제국에서 열리는 행사 중 가장 중요한 날이었다.
“고작 귀족들의 잇속 싸움에 황실이 이토록 흔들리다니요. 내가 선황들을 무슨 면목으로 뵐 수 있겠습니까.”
다리를 꼬아 앉고 그 위에 손을 얹은 바스티안이 무심하게 말을 이어갔다.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때가 됐고, 난 더는 티에르 공작을 이블린의 부친이라는 이유로 참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자유롭게 두면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고. 이대로 황궁 내에 두자니 이블린이 마음을 쓰다 건강이 상할까 염려되는군요.”
공작은 황제의 말을 잠자코 새겨들었다.
좀처럼 말이 길지 않은 황제가 이토록 말을 많이 하는 건, 결심이 확고하다는 뜻이었다.
“귀족회에 티에르 공작의 입김이 닿지 않은 곳이 없더군요. 그러니 믿을 수 있는 이는 그대뿐이지 않습니까. 선대 공작의 친우였고. 근위대장은, 이블린의 둘도 없는 친우이고.”
“……알겠습니다, 폐하. 준비해두겠습니다.”
고민하던 공작이 결국 수긍하며 몸을 일으켰다.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경.”
“네, 폐하.”
공작이 집무실을 떠나자 휴이터가 그 뒤를 따라나섰다.
“아버지.”
“휴이터 디에스티.”
공작은 황제의 집무실에서 멀리 떨어지고 나서야 걸음을 멈추고 아들을 바라봤다.
“넌 전부 내게 말했어야 했다. 어찌 날 바보로 만들어! 다른 사람도 아닌 네가.”
“……죄송합니다. 공작이 눈치채지 못하게 은밀히 움직이다 보니.”
화는 냈지만, 공작은 제법 단단해진 아들의 표정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난리 통에 지킬 것이 있으니 녀석도 성장한 거겠지.
“후우, 이블린 그 아이가 참 안쓰럽구나.”
티에르 가에 이 무슨 변고가.
공작이 주름진 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 * *
“네? 티에르 공작님이 병에 걸렸다고요?”
마르다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네, 그렇답니다. 벌써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지 꽤 됐다는군요.”
날을 잡아 황궁으로 찾아온 보니카의 유모가 가져온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어쩐지. 아무리 기다려도 연락이 없더라니.’
속으로 혀를 찬 마르다가 차를 호로록 마셨다.
황궁 내에 있으니까 소식을 전해주는 이가 없었다.
곁에 붙어 있는 하녀들도 결국 황제궁 사람들이니 데면데면할 뿐이고.
‘앞으로 어쩐담. 이대로 손 놓고 있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되겠는데.’
마르다의 머릿속이 빠르게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제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