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5. 그녀들의 사정 (85/95)


85. 그녀들의 사정
2022.07.24.



“후작님께서 아가씨 걱정을 많이 하고 계세요. 불편함 없이 지내고 계신 거죠? 어휴, 얼굴이 많이 상했네요. 밥이 입에 안 맞으세요?”

생각을 정리하던 마르다는 호들갑을 떠는 보니카의 유모를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황궁에서 나오는 밥이 아무렴 후작가보다 못할까.

꿍얼거리면서도 조금 부러워지는 건 사실이었다.

후작가와는 다르게, 페런 백작가에서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어쩐지 조금 짜증이 일었다.


“무슨 일 있으면 꼭 말씀하시고요, 아가씨.”

“응, 그럴게.”

보니카의 유모가 떠나고, 마르다는 기다렸다는 듯 보니카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보니카,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티에르 공작님이 자리를 비웠을 때, 우리도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해야 하다니, 뭘요?”

“뭐든요. 지금이 아니면 우리는 티에르 공녀를 절대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없을 거예요.”

“하지만…….”

보니카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이미 이블린에게 못된 장난을 친 전적이 있었다.


“보니카, 제정신이냐. 공녀가 짓궂은 장난 정도로 치부해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황족 시해죄로 당장 처형당했을 거다!”

 
나중에 소문을 들은 부친에게 눈물이 쏙 빠질 만큼 혼이 났지만.

보니카는 제게 시선조차 주지 않던 황제를 떠올렸다.


‘지금보다 더 미움받게 되면, 난 살 수 없을 거야.’

황제가 그토록 이블린을 사랑한다면, 이블린에게 직접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글쎄요, 그렇긴 한데 떠오르는 의견은 딱히 없군요. 마르다는 뭐 좋은 계획이라도 있는 건가요?”

보니카가 슬쩍 발을 빼면서도 여지를 남겼다.


‘어쭈, 전부 나에게 다 떠넘기시겠다?’

마르다는 습관적으로 입을 비죽이다가 뒤늦게 미소 지었다.


“어휴, 저라고 뭐 별수 있나요.”

“……그래요? 어쨌든, 슬슬 준비할 시간이니 이만 일어날까요?”

“아…… 그러죠.”

보니카의 축객령에 마르다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영 도움이 안 되네.”

방으로 돌아온 마르다는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테이블 위에 놓인 종이를 바라봤다.

티타임을 갖자는 이블린의 초대장이었다.

이럴 거면, 둘 중 하나라도 치우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어.


‘보니카 아쉴브. 네가 이블린의 손을 잡고 같이 나락으로 뛰어들어줘야 한다고.’

정 안 되면 떠밀어야지, 뭐.


‘나는 누구처럼 뒤를 봐 줄 사람도 없고, 결국 혼자 살아남아야 하거든.’

마르다가 천 주머니를 움켜쥐었다.


 

* * *



“말도 마세요. 아침마다 꾸미는 데 몇 시간을 쓰는 건지 모르겠어요.”

“머리 이렇게 해달라 저렇게 해라, 조금이라도 마음에 안 들면 다시 다시. 그러니까 그런 외모를 유지하는 건가?”

“얘, 잊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신 우리 티에르 단장님도 하녀장님 혼자 돌보시는데?”

“아, 그렇지.”

황궁 구석진 복도.

한 사내를 둘러싸고 하녀들이 보니카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


“자기가 공작새야 뭐야, 그렇게 꾸미고서 종일 정원이며 황궁이며 걸어 다닌다고요. 그리고 밤에 발이 아프다고 주무르라고 성화고.”

“아마, 폐하를 마주칠까 싶어서 그러는 것 같아요. 참, 이건 전부 우리끼리 얘기에요, 알죠?”

“아, 당연하지. 별걱정을 다 하는군.”

파보가 너스레를 떨며 한쪽 눈을 찡긋했다.

서글서글한 성격을 무기 삼아 하녀들과 친해진 덕분에, 이것저것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힘들면 언제든 말하라고, 내가 같이 욕해줄 테니까.”

“어머머, 웃겨 정말.”

하녀들과 웃으며 헤어진 파보는 보는 눈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보니카 아쉴브 후작 영애 : 유일한 관심사는 황제와 외모 치장]

차분하게 기록을 마친 파보가 설렁설렁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시야에 목표물이 등장했다.


“어어, 무거운 걸 들고 가네. 도와줄까?”

“아, 감사합니다.”

“뭐야, 페런 영애에게 가는 간식인가?”

“네.”

이번 목표물은 마르다 페런을 돌보는 하녀들이었다.


“아니, 아까도 간식 가져가지 않았어?”

“네. 하루에도 몇 번씩 주방을 드나드는지 모르겠어요.”

파보가 살살 긁으며 떠보자 하녀 하나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페런 영애께서 먹는 걸 좋아하시나 봐.”

“모르겠어요, 정말. 가끔은 백작가에서 굶으며 살았나 싶다니까요? 입은 또 얼마나 까다로운지, 무조건 고급 재료로 만든 것만 찾아요. 최고급 재료.”

“호오.”

“그렇다고 나눠주는 법도 없다고요. 솔직히 단장님은, 저희 먹이려고 드시지도 않는 간식을 요구하시는 편인데…… 아니, 제가 먹고 싶어서 이런 말 하는 건 아니고요.”

“괜찮아, 우리끼리 하소연하는 거지 뭐.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하겠어?”

“그렇……죠? 휴, 이따가 단장님이 두 영애랑 티타임을 하신다는데.”

“아, 그렇지. 내가 일손을 도우러 가야겠군.”

“어머, 정말요?”

“같은 처지인데 서로 돕고 살아야지. 그럼 이따 보자고.”

마르다의 방문 앞에 이르자 파보가 씨익 웃으며 하녀에게 트레이를 넘겼다.


‘오늘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질 것 같단 말이지.’

황궁에 온 이후로 세 영애가 함께 모이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다.

[마르다 페런 백작 영애 : 생각보다 먹는 것에 진심임]

정보를 정리한 파보가 걸음을 서둘렀다.

사진을 담당한 동료 기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
.



“초대에 응해줘서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이제야 자리를 마련해서 미안해요. 너무 바쁘기도 했고, 좀처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거든요.”

이블린은 그 말을 하면서 마르다를 힐끗 쳐다봤다.

마르다는 부친의 소식을 들었을까.

아직 말해줄 때는 아닌 것 같지만.


“거처도 옮기기로 해놓고 약속을 바로 지키지 못해서 미안하고요.”

“어쩔 수 없죠. 단장직도 맡고 계시고요.”

보니카의 차분한 대답에 이블린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올렸다 내렸다.

아무래도 보니카의 심경에 변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나쁘지 않지.’

솔직히 보니카가 그리 밉거나 싫지는 않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마음이야 어쩔 수 있나.

오히려 바스티안의 애정을 받다 보니, 조금 안쓰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다.

보니카는 그녀와 달리 마음을 보답받을 수 없을 테니까.


‘이 무슨 오만한 생각이람.’

그래도 영애, 미안해요.

나도 어떻게든 폐하의 마음을 지키고 싶거든요.

이블린이 쓴웃음을 숨기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단장님, 프레세의 기자가 세 분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데요.”

양해를 구하고 다가온 알리에타가 의사를 물었다.

공손한 말투와 태도였지만 알리에타의 불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런 중요한 시기에 무슨 위험한 짓이냐며 결사반대하던 알리에타였다.

하지만, 먼저 잡아놓은 약속이니 취소할 수 없어 나온 참이었다.


“글쎄, 오늘은 우리 사적인 모임이라…….”

“기자라, 괜찮지 않을까요?”

이블린이 거절하려는 찰나, 마르다가 곧장 끼어들어 의지를 피력했다.


“아, 그런가요? 아쉴브 영애는요?”

“저도 괜찮아요.”

영애들의 의사를 확인한 이블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의 관심이 모두 입구 쪽으로 쏠린 걸 확인한 마르다는 손에 쥐고 있던 걸 재빨리 보니카의 찻잔에 집어넣었다.


“저는 없는 사람이다 생각하시고 편하게 계십시오. 사진 몇 장만 찍고 가겠습니다.”

기자와 그 뒤를 따라온 파보를 본 이블린은 눈인사를 나눈 뒤 다시 찻잔을 집어 들었다.


‘음?’

아까부터 미묘하게 거슬리던 향이 더 진해져 있었다.

이블린은 천천히 차의 향을 맡았다.


‘차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데.’

감각이 예민해진 탓에 느낄 수 있는 거였다.


“!”

낯선 향이 풍겨오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이블린의 눈이 곧장 커졌다.

보니카가 찻잔을 입가로 가져가고 있었다.


“잠깐……!”

이블린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손을 뻗었다.

쨍그랑.

이블린의 손에 맞은 보니카의 찻잔이 바닥을 뒹굴었다.


“공녀! 이게 무슨 짓…… 헉.”

제 손과 젖어버린 드레스, 바닥을 번갈아 보다가 소리치던 보니카가 목을 움켜쥐었다.


“꺄아악!”

마르다가 보니카를 보며 비명을 질러댔다.


“이게 무슨…… 도, 독이야! 누가 독을 쓴 게 분명해요!”

‘……독?’

마르다가 비명을 지르자 보니카의 표정이 더욱 새하얗게 변했다.


‘어, 어쩌지?’

보니카가 목을 쥔 채 마르다를 쳐다봤다.


‘아, 모르겠어.’

보니카의 눈동자가 위로 까무룩 뒤집히더니, 길쭉한 몸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여, 영애!”

마르다가 보니카에게 달려갔다.


“기다려요, 만지지 말아요.”

호들갑을 떠는 마르다와 달리 이블린은 표정을 서늘하게 굳힌 채 보니카에게 다가갔다.


“알리에타, 당장 다트를 불러 줘.”

“네? 네!”

“마르다, 진정해요. 그냥 기절한 거니까.”

이블린이 계속 비명을 질러대는 마르다를 똑바로 응시하며 명령했다.

보니카의 상태를 살폈지만, 독 반응은 없었다.

이렇게 곧바로 쓰러질 정도의 독이라면 곧장 반응이 나타나야 했다.


“누군가 장난을 친 것 같군요. 보레아?”

“네, 단장님.”

응접실 입구를 지키던 보레아가 고개를 숙였다.


“출입 통제해줘요. 여기 있는 것들 전부 조사해야 하니까 손대지 못하게 하고.”

“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정신없이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는 파보의 눈동자도 덩달아 빨라졌다.


 

.
.



“이블린, 괜찮은 거야?”

상황을 수습하고 한숨 돌리던 찰나, 단장실로 찾아온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상태를 먼저 살폈다.


“네, 저는 괜찮아요.”

“그러게 티타임은 미루라고 했잖아.”

이래서야 불안해서 한시도 떨어져 있을 수가 없군.


“그보다 폐하, 다트가 돌보고 있기는 하지만 영애에게 가보셔야 하지 않을…….”

“독을 마신 것도 아니라며.”

“음.”

바스티안의 차가운 응수에 이블린이 끙 앓는 소리를 낼 때였다.


“단장님, 아쉴브 후작이 들어왔답니다.”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보레아의 보고에 이블린이 몸을 일으켰다.

.
.

다음 날 아침.


“으음.”

침대 위에 누워 있던 보니카가 미간을 찡그렸다.


“보니카, 보니카? 정신이 드느냐?”

“……아버지?”

“세상에, 보니카. 얘야. 오, 감사합니다, 신이시여.”

보니카의 손을 쥐고 있던 아쉴브 후작이 안도의 눈물을 쏟았다.


“네가 잘못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살겠니.”

후작이 핏기없는 딸의 얼굴과 손등을 연신 쓸었다.


“놀라서 쓰러진 겁니다. 독은 아니었고, 건강에도 문제는 없습니다.”

후작의 난리통에 옆으로 밀려난 다트가 설명을 덧붙였지만, 후작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린 보니카의 눈동자에 금방 생기가 피어났다.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방 안에 있는 이들을 빠르게 훑었다.

아버지, 티에르 공녀, 궁의, 하녀 몇 명…… .

있어야 할 사람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 폐하는요?”

설마, 내가 이런 일까지 겪었는데 당연히 오셨겠지?


“폐하? 폐하는 지금…….”

후작이 뒤늦게 젖은 눈을 끔뻑거렸다.


“설마, 안 오신 건가요?”

“그게, 다, 다녀가셨단다. 정무가 바쁘셔서 금방 가셨어.”

후작은 본능적으로 거짓을 고했다.


“정말요?”

“저, 영애?”

상황을 살피던 보레아가 조심스레 침대로 다가가자 보니카가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영애에게 몇 가지 확인할 것이 있습…….”

“아, 머리가 좀 어지러운 것 같아요.”

보니카가 다급히 머리를 짚으며 표정을 찡그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