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마르다의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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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마르다의 폭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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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마르다의 폭로
2022.07.27.
“얘, 얘야. 괜찮니? 이봐, 지금 막 정신 차린 애에게 무슨 짓인가!”
사색이 된 후작이 보레아를 향해 호통쳤다.
“그것이, 범인을 잡으려면 확인할 것이…….”
“그런 건 자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니, 그게…….”
보레아가 곤란하게 머리를 긁적이자 이블린이 그만하라며 보레아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더 쉬려무나.”
그제야 후작이 보니카가 다시 눕는 걸 도왔다.
보니카가 만족한 듯 눈을 감자 후작이 분노한 얼굴로 몸을 돌렸다.
“공녀, 황궁 내에서 어찌 이런 일이 생긴단 말입니까. 심지어 그대는 그저 말로만 호위기사단장직을 맡고 있는가 보군.”
“제 불찰입니다.”
이블린이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잠깐, 단장님…….”
“비록 위험한 독은 아니었다고 해도, 단장님이 빠르게 조치하신 덕에 이 정도로 끝난 겁니다.”
“보레아, 그만.”
후작의 모욕적인 언사에 다트와 보레아가 끼어들려 했지만, 이블린이 막았다.
“앞으로 안전에 더욱 신경 쓰겠습니다.”
“……공녀, 내 오늘 일은 두고두고 잊지 않을 겁니다.”
움찔한 후작이 수염을 파르르 떨고는 몸을 휙 돌렸다.
“그만들 나가주시지요.”
침대 곁에 웅크리고 앉은 후작을 보며 이블린은 조용히 자리를 떴다.
“단장님, 아무리 봐도 자작극 같은데요.”
보니카의 침실을 벗어나자 보레아가 이블린의 등 뒤에 따라붙으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니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글쎄요, 혼자 벌인 일인지 공범이 있는지는 확인해봐야겠죠?”
자작극이라면 너무 어설펐다.
적어도 독의 종류를 생각해서 쓰러지는 타이밍 정도는 맞췄을 테니까.
놀란 나머지 기절한 게 더 큰 것 같은데.
그렇다면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하나였다.
“페런 영애는 어디 있…….”
“왜 나를 가두는 거죠? 가두려면 내가 아니라 티에르 공녀를 가둬야죠! 범인이 티에르 공녀니까! 티에르 공녀가 아쉴브 영애를 죽이려고 한 거라고요!”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러니까, 가둔 게 아니라 안전을 위해 보호하는 겁니다.”
“어디 있는지 물을 필요도 없었네요.”
달래는 호위 기사의 말을 들으며 이블린은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페런 영애.”
“!”
이블린의 등장에 마르다가 눈을 희번덕였다.
“몇 가지 확인 좀 할게요.”
“확인? 지금 사람이 죽을 뻔했는데도 날 이렇게 두는 건가요? 나에게도 해를 가하려고?”
“영애.”
“처음부터 이러려고 우리 부른 거지?”
“예의를 갖추는 게 좋을 텐데요.”
이블린이 차분하게 응수하자 마르다가 태도를 바꿨다.
“……너무해요, 공녀. 그렇게까지 우리를 내쫓고 싶은 거예요? 이런 무서운 방법을 쓸 만큼?”
눈물이 그렁그렁해진 마르다가 이블린을 원망스레 바라봤다.
악을 쓰다가, 울었다가. 도통 대화가 통하지 않았다.
‘아주 작정한 모양이구나.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폐하를 어떤 얼굴로 뵙지.’
황후 후보를 들이자고 설득한 장본인으로서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 막 부친을 디에스티 공작의 손에 넘기고 한시름 놓았더니만.
“단장님, 영애가 좀 진정되면 다시 얘기하시죠.”
보레아가 답이 없다는 듯 귀엣말을 건넬 때였다.
“단장님. 잠깐 좀.”
“아, 오단.”
“어디 가요! 날 이렇게 가둬두고!”
이블린이 소리치는 마르다를 뒤로 한 채 오단의 뒤를 따라나섰다.
“무슨 일이에요, 오단?”
“아쉴브 후작이 긴급 귀족회의를 청했답니다.”
“!”
이블린이 이마를 짚었다.
“폐하, 폐하는 지금 어디에 계세요?”
.
.
“폐하.”
숨을 고른 이블린이 황제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이블린, 설마 뛰었어?”
태평한 태도로 앉아 있던 바스티안이 책상을 짚고 일어서며 정색했다.
“안 뛰었어요.”
뛰듯이 걷기는 했지만.
“보레아.”
이블린에게 물을 것도 없다는 듯 바스티안의 못마땅한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네, 예상하신 대로 후작이 성질을 부렸습니다. 그리고 단장님은 뛰지는 않았습니다.”
“그러게 가지 말고 여기 있으라니까.”
“그게 문제가 아니라…… 후작이 귀족회의를 청했다면서요.”
“그랬다더군.”
“……제 불찰이에요, 폐하의 말을 들을 걸, 실수했어요.”
“그대가 왜. 알잖아, 이블린. 차라리 잘된 일이야.”
다시 여유를 찾고 입꼬리를 늘인 바스티안이 이리 오라며 제 무릎 위를 톡톡 두드렸다.
“이번 기회에 전부 정리해버릴까 해. 그러니, 그대도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마음의 준비라.
이블린의 입가에 힘이 들어갔다.
* * *
“이게 황궁 내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게 말이 됩니까? 황후 후보에게 독살 시도라니요! 폐하께서는 그간 무얼 하셨단 말입니까.”
“어허, 후작! 말을 삼가시오! 지금 폐하께 책임을 논하는 겁니까? 게다가 진짜 독도 아니었잖소!”
“그럼, 우리 아이가 자작극이라도 벌인 거란 말이요?”
“조사했지만, 범인이 없잖습니까. 누군가 해하려 했다는 증거도 없고!”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회의장 문이 열렸다.
바스티안의 등장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다물었다.
“경들은 지치지도 않나 봅니다. 볼 때마다 싸우는군요.”
“폐하, 어찌 일을 이토록 관망하십니까! 부디 제대로 조사해주셨으면 합니다.”
아쉴브 후작이 눈을 번뜩였다.
하마터면 딸을 잃을 뻔한 터라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지금 호위기사단과 근위대에서 조사를 진행하고 있지 않습니까.”
“애초에 조사를 호위기사단이 맡은 게 잘못된 거 아닙니까!”
“뭐가 그리 불만이신지.”
“잘 쓰면 임신을 돕는 약이지만, 자칫하면 불임이 될 수도 있는 약이라 들었습니다. 제 딸에게 이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둘밖에 없지 않습니까. 티에르 공녀와 페런 영애지요!”
“후, 후작님. 무슨 그런 말씀을. 우리 마르다는 그럴 아이가 아닙니다!”
식은땀만 줄줄 흘리던 페런 백작이 곧장 끼어들었다.
“솔직히, 티에르 공녀가 벌인 일일 수도 있지 않습…….”
급한 마음에 말을 던지다가 아차 싶어진 백작이 황제를 힐끗 쳐다봤다.
황제의 눈은 한층 더 싸늘해져 있었다.
“하긴, 그러고 보니, 공녀의 짓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지요.”
“후작. 농이 지나치군요. 이 기사는 보고 떠드는 겁니까?”
바스티안이 턱 끝만 까딱하자 다베르가 손에 든 신문 뭉치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후작이 숨을 시근덕대며 신문을 집어 들었다.
[위험한 사고를 막은 티에르 공녀]
[제국민이 기대하는 황후는 바로 이런 모습]
[황후 후보들의 자격을 논하다]
황후 후보들에 대한 평가와 더불어 이블린이 보니카를 구하는 장면까지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날 상황을 전부 지켜본 기자니, 누구보다 믿을 만한 자겠지요.”
“그, 그건…….”
점점 분노로 퍼렇게 질려가던 후작의 시선이 중간에서 멈췄다.
[범인 없는 사건, 아쉴브 영애의 자작극?]
“자작극이라니…… 폐하, 정말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
.
‘자, 자작극?’
잠옷 차림으로 침대에 앉은 보니카는 신문을 보며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자작극이라니, 나는 정말 쓰러진 거라고.
비록 독이 아니었다지만, 위험했던 것도 맞고.
솔직히 기절하고 난 뒤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버지가 화가 나서 공녀에게 화살을 돌릴 때 가만히 있었던 건, 혹시나 하는 마음이었다.
이대로 공녀가 의심을 받는다면…… 그런 혹시나 하는 마음.
하지만, 기사 내용만 봐서는 이블린은 그녀를 구해 준 영웅처럼 보였다.
‘뭔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고 있어. 이러다가 정말 내 자작극으로 몰리게 된다면.’
보니카의 얼굴이 더 창백해졌다.
‘그럼 황궁에 있을 수 없게 될 거야.’
보니카는 손톱을 잘근잘근 씹었다.
“보니카, 걱정 말아라. 내가 차라리 목을 내놓는 한이 있더라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가지는 않을 거다.”
평소와 다르게 분노로 가득한 부친은 무슨 일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일이 너무 커진 것 같아, 어쩌지?
“우리도 뭔가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지금이 아니면 우리는 티에르 공녀를 절대 그 자리에서 내려오게 만들 수 없을 거예요.”
마르다가 했던 말이 뇌리에서 빙빙 맴돌았다.
‘역시 마르다가? 그래, 누가 범인인 게 뭐가 중요해.’
어떻게든 내가 폐하의 곁에 남는 게 더 중요하지.
“얘, 티에르 공녀는 어디에 있지? 아니면 호위기사단이라도, 빨리.”
보니카가 물병을 가지고 나가던 하녀를 붙잡았다.
.
.
“뭐라고요? 아쉴브 영애가 범인으로 날 지목했다고요?”
마르다는 앞에 앉은 기사의 말에 경악했다.
‘이게 저 혼자 살겠다고 꼬리를 자르겠다는 거지?’
같이 힘을 합쳐서 이블린을 공격해도 모자랄 판에 기가 막혔다.
“말도 안 돼요! 저는 옆에서 놀란 죄밖에 없어요! 공녀님이 범인이 아니라면, 답은 하나네요! 영애의 자작극 아니겠어요?”
“글쎄요, 누가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일을 자행하겠습니까?”
“억울해요! 이럴 바에는 다 같이 이야기하게 해주세요!”
마르다가 최후의 수단을 꺼내 들었다.
.
.
“페런 영애가?”
회의장 입구에서 보고를 받은 다베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삼자 대면이라.’
티에르 공작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이블린과 황제의 사이는 여전히 돈독하다.
정황상, 두 황후 후보는 아마 궁에서 쫓겨 날 확률이 높았다.
‘그러면 내 계획에도 차질이 생기는데.’
티에르 공녀가 이번 일을 벌였을 리 만무하고, 결국 두 영애 중 하나의 짓이거나 합심해서 벌였다는 일인데.
그런데도 삼자대면을 요구한다는 건 믿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강심장이거나.
‘지금이 기회인지도.’
고민하던 다베르가 소식을 전해 준 기사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회의장 내에는 귀족들이 바스티안의 기세에 눌리지 않으려 버둥대고 있었다.
“폐하. 페런 영애가 다 함께 있는 자리에서 범인을 색출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양해를 구한 다베르가 바스티안에게 다가가 보고를 마쳤다.
바스티안이 흥미롭다는 듯 눈썹 한쪽을 올렸다 내렸다.
그리고 한쪽 입꼬리를 비틀며 아쉴브 후작과 페런 백작을 차례대로 응시했다.
“당사자들을 이곳으로 직접 불러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떨까 하는데, 경들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
눈치를 보던 이들이 곧 한마음 한뜻으로 외쳤다.
“조, 좋습니다! 이 자리에서 밝혀보지요!”
.
.
‘이건 또 무슨 전개일까.’
갑자기 불려온 이블린은 회의장 풍경을 둘러보았다.
그녀의 옆에는 보니카가, 맞은편에는 마르다가 앉아 있었다.
이미 몇 가지의 질문이 오간 뒤였다.
“티에르 공녀.”
아쉴브 후작이 매서운 눈초리로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그 아수라장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했다더군요. 그런데 우리 보니카를 도운 타이밍이 좀 이상하지요?”
후작이 동의를 구하듯 좌중을 둘러보았다.
“마치 독이 들어있는 걸 아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캐묻는 후작의 눈이 이글이글 불타올랐다.
‘역시나.’
이블린이 속으로 헛숨을 뱉었다. 의도가 너무 뻔했다.
“더군다나 오늘자 신문에 내용이 자세히도 실렸더군요. 기다렸다는 듯이, 그것도 공녀에게는 유리하고, 다른 후보들은 비난하는 내용과 함께.”
가만히 듣고 있던 바스티안이 코웃음 쳤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요. 단장이 눈치채는 건 당연합니다. 다들 잊으셨습니까, 공녀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거.”
바스티안이 쓸데없는 말이라며 일축할 때였다.
“이, 임신, 아니잖아요!”
마르다가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