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이게 아닌데
(87/95)
87. 이게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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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이게 아닌데
2022.07.31.
“처음부터 황후 후보라고 들어온 게 거슬렸던 거 아닙니까?”
후작이 불퉁한 말투로 이블린에게 따져 물었다.
‘그래, 이거야!’
이블린에게 맹공을 펼치는 후작을 보며 마르다는 의기양양해졌다.
보니카에게 범인으로 지목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만 해도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는데.
‘이렇게 판을 깔아줬는데도 날 배신하려 들었다 이거지? 두고 봐라.’
마르다는 보니카를 노려보다가 눈이 마주치자마자 고개를 새침하게 돌려 버렸다.
“티에르 공녀. 듣자 하니, 그 아수라장에서도 침착하게 대처했다더군요. 그런데 우리 보니카를 도운 타이밍이 좀 이상하지요?”
후작의 날카로운 질문에도 이블린은 묵묵부답이었다.
‘흥, 고소해라.’
마르다는 혀를 깨물면서 웃음을 참았다.
이블린이 추락하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보게 될 줄이야.
‘이대로 영원히 사라졌으면.’
이 모습을 지켜봐야 할 부친이 없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발버둥 쳐야 소용없어. 난 네 비밀을 알고 있거든.’
마르다는 회의장으로 오기 직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공작님이 보내셨습니다.”
회의장으로 가야 한다며 소식을 전해 준 근위병은 그녀에게 쪽지 하나를 몰래 내밀었다.
[이블린은 진짜 임신한 게 아니다]
내용은 무척 충격적이고 중요한 거였다.
‘그래놓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거지.’
마르다는 이블린을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생각할수록 앙큼하지 않나.
“더군다나 오늘 자 신문에 내용이 자세히도 실렸더군요. 기다렸다는 듯이.”
여전히 후작은 이블린에게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공녀에게는 유리하고, 다른 후보들은 비난하는 내용과 함께.”
“너무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군요.”
마르다가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지켜볼 때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황제가 끼어들었다.
“단장이 눈치채는 건 당연합니다. 다들 잊으셨습니까, 공녀가 내 아이를 가졌다는 거.”
“!”
마르다는 바스티안의 마지막 말에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지금 임신을 또 핑계 삼으려는 거야?’
마르다의 시선이 뾰족해졌다.
“내 힘을 나눠 가졌으니, 당연히 눈치챌 수밖에. 그러니 앞으로도, 이런 엉뚱한 짓은 계획하지 않는 게 나을 겁니다.”
“폐하, 그런…….”
“무엇보다, 입조심 하는 게 좋을 듯하군요, 경. 지금은 그대의 딸을 도운 공녀에게 고마워해도 모자랄 판 아닌가.”
“…….”
아쉴브 후작이 어쩌지 못하고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렇습니다. 다들 지금 무엇이 더 중요한지 잊은 듯하군요. 곧 건국기념일이 다가오지 않습니까.”
마침 디에스티 공작이 상황을 정리하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폐하, 알고 계시지요. 그간 건국기념일 행사에는 늘 황후 폐하가 계셨습니다. 의식을 황제 혼자서는 진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황후가 될 영애를 정하셔야 합니다.”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제단에 올라갈 수 있는 이는, 내 힘을 나눠 가진 황후여야 하고, 내 아이를 가진 영애는 한 명뿐이지.”
“…….”
마르다는 회의장 분위기가 순식간에 바뀌는 걸 느꼈다.
“말이 나온 김에, 슬슬 이 지겨운 연극도 끝내는 게 어떻습니까.”
바스티안이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이만하면 두 영애도 황궁 체험은 충분히 한 것 같고, 무엇보다 자작극이라는 불명예만 안고 떠나는 것보다 나을 테니.”
바스티안이 후작과 백작을 돌아보았다.
후작은 속이 상한 듯 눈을 질끈 감았고, 백작은 연신 눈동자만 돌릴 뿐이었다.
안 돼.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초조해진 마르다가 입술을 짓씹었다.
‘아버지는 이렇게 될 걸 전부 예상했던 거야.’
역시 아버지가 준 패를 써야 할 때인 것 같았다.
“자, 잠시만요.”
결심한 마르다가 용기 내 외쳤다.
“진짜 임신, 아니잖아요!”
휘둥그레진 시선들이 마르다에게 쏠렸다. 모두가 경악에 찬 표정이었다.
“티에르 공녀! 공녀가 가짜 임신이라는 거, 난 다 알고 있어요!”
마르다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내질렀다.
이블린 티에르가 모두를 속이고 황후가 되는 꼴은 곧 죽어도 볼 수 없다.
그러니 더 생각하고 말 것도 없었다.
갑작스러운 발언에 모두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음, 어쩌죠?’
이블린은 바스티안에게 눈빛으로 의사를 물었다.
바스티안이 아무 표정 없는 얼굴로 대답 대신 눈썹을 까딱였다.
지금 이 상황을 즐기라는 신호였다.
덕분에 마음이 조금 놓여서 이블린은 어깨의 힘을 뺐다.
어쩌면 바스티안이 말한 때가 지금인지도 몰랐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제자리로 돌릴 때.
“마르다, 얘야, 그게 무슨 소리냐.”
얼어붙은 장내에서 눈치만 살피던 페런 백작이 뒤늦게 달려와 마르다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아까보다 더 많은 땀을 흘리고 있었다.
“정말이에요! 공녀가 임신한 척하면서 우릴 속이고 있다고요.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해 보면 되잖아요!”
마르다의 큰 소리에 다들 바스티안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호기심을 드러냈다.
“그러니까, 영애의 말은 나와 단장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 그게 아니라…….”
“아니라?”
“공녀가 모두를 속이고 있다는 뜻이었어요.”
서슬 퍼런 시선에 순간 움찔한 마르다가 이내 쐐기를 박았다.
“정말, 가짜 임신인 건가?”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리 말하는 거 아니겠나.”
황제의 앞에서도 당당한 마르다의 태도에 웅성대는 소리가 더 커졌다.
이블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영애, 지금 한 말,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요? 제게는 참을 수 없는 큰 모욕인데요.”
“공녀야말로 후회하게 될 거예요.”
이블린의 침착한 눈동자와 마르다의 이글거리는 눈동자가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혔다.
“아, 아버지.”
보니카가 아쉴브 후작의 옷소매를 죽죽 잡아당겼다.
“……폐하, 차라리 이 자리에서 의혹을 해소하고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작이 말을 꺼내고는 동의를 구하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폐하, 후작의 말이 맞습니다.”
“이걸로 황후 후보 문제도 정리하시지요.”
“모두의 의견이 그렇다면야…… 다들 후회해도 소용없습니다.”
바스티안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다베르 후작, 다트를 불러오게.”
“네, 폐…….”
“황궁의는 안 됩니다. 황궁에 속해 있지 않은 다른 의사를 불러야 해요.”
다베르가 고개를 숙이는데 마르다가 끼어들었다.
“황궁의를 포함해 의사 셋을 부르시지요.”
아쉴브 후작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마르다의 요구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하지.”
바스티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베르가 회의실 밖으로 향했다.
“다트를 불러오고, 황성 내에서 당장 움직일 수 있는 의사 둘을 아무나 데려와 주세요.”
회의실 밖에 있던 호위 기사에게 부탁을 건넨 다베르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모든 게 계획대로 가고 있어.’
짜릿한 전율에 손끝이 떨렸다.
마르다 페런, 아니. 마르다 티에르를 이용하기로 한 건 옳은 선택이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가짜 임신이라는 게 드러날 것이다.
그럼 이블린 티에르는 호위기사단장직에서 해임될 테고, 황궁을 떠날 수밖에 없다.
‘그럼 황제는 잠시나마 힘이 약해지겠지.’
황제는 어떻게든 이블린을 곁에 둘 방법을 찾을 거다.
‘그러니 그 전에 공녀를 손에 넣어야 해.’
황제의 가장 큰 약점이니까.
“후작님? 절 부르셨다고요.”
“아, 다트.”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게, 들어가 보면 알 겁니다.”
다베르는 옅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알아서 대처해주리라 믿으셨겠지만, 죄송하게 됐습니다.’
이블린을 진료할 의사들에게 아무 언질도 주지 않을 작정이었다.
다베르가 회의장 문을 활짝 열었다.
“폐하, 궁의가 도착했습니다.”
.
.
“실례하겠습니다, 단장님.”
이블린은 조심스레 다가오는 다트와 의사들을 보며 기시감을 느꼈다.
‘전에도 아버지의 앞에서 다트가 진료했었지.’
그때와 같으면서도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적어도 지금은 다트가 거짓을 고할 필요는 없어졌으니까.
‘그때 아버지의 표정이 참 볼만했었지.’
옛 생각을 하니 문득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이블린은 입가에 힘을 줬다.
그리고 오늘, 마르다가 또 똑같은 표정을 짓게 될 것 같고.
정말 돈독한 부녀 사이였다.
“천천히 확인하세요. 부담 갖지 말고.”
이블린이 긴장한 의사를 달랬다.
“그럼…….”
의사가 손을 뻗는 동시에 장내가 고요해졌다.
세 명의 의사가 번갈아 가며 이블린을 진찰하는 걸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봤다.
숨 막히는 침묵 속에 마지막 의사가 진찰을 끝내고 물러섰다.
“이제 말해 보게.”
아쉴브 후작이 채근하며 답을 요구했다.
“단장님은 임신이 맞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의사들이 차례대로 꺼낸 말에 장내가 술렁였다.
“거, 거짓말!”
초조하게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치던 마르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럴 리 없어! 거짓이에요! 분명히 매수한 의사를 데려온 거라고요! 다른 의사를, 다른 의사를 불러야 해요!”
“아직 부족합니까? 제국 내 모든 의사를 데려와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텐데.”
바스티안이 귀족들을 차례로 둘러보았다.
아쉴브 후작은 곧장 고개를 옆으로 돌렸고, 페런 백작은 황급히 눈을 내리깔았다.
황제의 회녹색 눈동자에 실린 건 차가운 분노였다.
바스티안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피하는 귀족들을 보며 이블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런 모욕적인 방법으로 확인해드려야 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블린이 슬프다는 듯 뱉은 말에 분위기가 고요해졌다.
“어쨌든, 귀한 황손을 가진 마당에, 누군가에게 해를 가하며 이 자리를 지키려 들 만큼 제가 부족한 사람은 아닙니다.”
이블린이 배를 손으로 감싸며 말했다.
“제 조부께서 살아계셨다면, 아마 이런 상황조차 일어나지 않았겠지요?”
눈빛이 형형한 선대 티에르 공작을 떠올린 이들이 움찔 어깨를 떨었다.
“고작 몇 년 사이에 티에르의 이름이 이토록 무가치해졌나 봅니다.”
한마디로 경고였다.
감히 티에르의 이름에 오욕을 입힌 건 잊지 않겠다는.
“제 부친과 돈독하게 지내신 분들도 여기 계신 줄로 아는데요.”
이블린의 시선이 몇몇 귀족들에게 가 닿았다.
‘망했다. 전부 망했어!’
모두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단 하나였다.
“자, 경들의 의구심은 풀어드렸으니, 이제 내 의구심도 풀어야겠군요. 두 영애에게 그날 사건에 대해 자세히 묻고 싶은데…… 아쉴브 후작.”
“네, 네, 폐하!”
“이제 내가 그대의 딸에게 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내 아내와 아이가 하마터면 다칠 수도 있었지 않습니까.”
바스티안이 벼르고 있었다는 듯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누구일까요, 황족 시해 죄로 처벌을 받아야 할 이가.”
침을 꼴깍 삼킨 아쉴브 후작이 다급히 제 딸을 쳐다봤다.
“보니카, 솔직히 말씀드리거라. 아까 페런 영애가 뭐라고 하지 않았느냐?.”
“!”
저 영감탱이가!
페런 백작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