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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어떻게 나한테...! (88/95)


88. 어떻게 나한테...!
2022.08.03.



 


“그러고 보니, 전에도 아쉴브 영애가 이런 일을 벌인 전적이 있었던가?”

바스티안이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고개를 까딱했다.


“임산부에게 위험한 차를 선물한 적이 있지 않나. 공녀는 끝까지 숨기려 했지만, 황궁 내에서 벌어진 일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리 없지.”

“폐하, 그건!”

“그건?”

“그러니까…….”

보니카는 울고 싶어졌다.

바스티안의 시선이 너무도 차가웠다.

차라리 차갑기만 하면 다행이었다. 그의 눈빛에 담긴 건 경멸이었다.


‘난 이런 때가 되어서야 저런 눈빛 하나 받을 수 있는 거구나.’

이대로 황궁에서 쫓겨나고 마는 걸까.

마지막 희망이 민들레 씨앗처럼 허공으로 날아가 버린 듯했다.

비참하고 슬픈 감정이 쓰게 올라왔다.


‘폐하께 범죄자로 낙인찍히는 것만은 참을 수 없어.’

좌절하며 생기가 사라진 보니카의 눈동자에 곧 표독스러움이 피어났다.


“그때의 일은, 정말 많이 반성하고 후회했습니다. 폐하를 연모하는 마음에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어요.”

보니카는 쓰러지듯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바닥에 고스란히 부딪힌 무릎이 아파서 눈물이 더 울컥 샘솟았다.


“하지만, 그래서 저는 행동을 더욱 조심했습니다. 괜한 오해라도 사면 안 되니까요.”

보니카는 처연한 표정으로 바스티안을 힐끔 본 뒤 마르다를 쳐다봤다.


“조사 때도 전부 말씀드렸듯이, 페런 영애가 저를 계속 설득했어요. 티에르 공녀가 황후가 되는 건 참을 수 없다고요. 저는 그런 페런 영애를 말렸고요!”

“뭐라고요? 보니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죠?”

마르다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티에르 공작님이 없는 지금이 기회라고 했어요! 저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에요. 하마터면 저도 큰일을 당할뻔했고요. 제가 쓰러진 건, 사실이잖아요!”

마지막에는 연기가 아니라 진짜 눈물이 나왔다.

황궁에서 쫓겨나는 것도 서러운 마당에 이런 변명까지 해야 하다니.

게다가 자칫하면 집안까지 망하게 생겼다.


“보니카, 얘야. 오, 세상에.”

보니카가 눈물을 툭툭 떨구자 후작의 눈도 붉어졌다.

상황을 보던 이블린이 입술을 달싹였다.

마치 연극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바스티안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피곤하다는 듯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지금도 그래요. 가짜 임신이라고 헛된 주장을 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죠.”

보니카가 눈물을 수습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페런 영애의 눈에는 저와 공녀 모두가 눈엣가시였을 거예요.”

“보니카, 보니카가 어떻게 저한테 이럴 수 있어요?”

마르다가 반격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역효과였다.

귀족 사회에서 이미 자리를 잡아놓은 아쉴브 후작가와 페런 백작가는 입장이 크게 달랐다.

마르다보다는 보니카의 입을 믿는 게 당연했다.


“영애, 가짜 임신이라는 이야기는 무엇 때문에 꺼낸 거지?”

아쉴브 후작이 마르다를 매섭게 다그쳤다.


“그건…….”

마르다가 입술을 떨었다.

여기서 부친의 이야기를 꺼내도 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왜 하필 지금 없고 난리야.’

자신이 티에르 공작의 딸이라는 게 밝혀진다면, 상황이 달랐을 텐데.


“아무래도 이번 사건의 용의자가 드러나는 것 같군요. 의혹만 던져놓고 아니면 말고, 그러면 되겠습니까? 안 그렇소, 페런 백작?”

아쉴브 후작이 뻔뻔하게 화살을 돌렸다.


“저는, 저는 전혀 모르는 일입니다.”

이상하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느낀 페런 백작은 마르다를 보며 속으로 욕을 한바탕 퍼부어댔다.

굴러들어온 복덩이인 줄 알았더니 가문을 망가뜨릴 원흉이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었다.

페런 백작이 결심한 듯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지금 마르다에게 모든 걸 뒤집어씌우려는 모양인데, 마르다는 그럴 이유가 없는 아이입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요?”

“공녀에게도, 아쉴브 영애에게도 해를 끼칠 이유가 없다는 겁니다. 이 아이는 티에르 공녀와 먼 친척 관계이니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

연이어 터지는 폭탄선언에 모두가 혼이 나간 얼굴이 됐다.


“그래서 이 아이를 데려온 겁니다!”

마르다는 저도 모르게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하, 그런 꿍꿍이가 있었어? 어쩐지 유독 친절하게 대해주는 것 같더라니.


“친척? 그렇다면…… 설마 두 사람이 합심해서 우리 보니카를 해하려고 한 겁니까?”

후작의 화살이 다시금 이블린에게 향했다.


‘잠깐, 지금 이건…….’

마르다의 눈이 반짝였다.

그래,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갈 때 가더라도 네가 행복한 꼴은 못 봐.

보니카와 이블린 둘 다 나락으로 보내면 좋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블린의 발목이라도 붙잡아야 했다.


“공녀, 이게 전부 사실입니까? 두 사람이 정말 혈연관계요?”

“……죄, 죄송해요. 공녀님.”

마르다는 눈알을 좌우로 굴리다가 손으로 얼굴을 덮어 버렸다.

이블린이 그런 마르다를 빤히 바라봤다.

부친이 심어 놓은 증오의 씨앗이 저 마음속에 얼마나 뿌리 깊게 자리 잡았던 걸까.

어떻게든 끝까지 물고 늘어지겠다는 집념은 칭찬해 줄 만했다.

페런 영애로 살아가든 티에르 공작의 사생아로 살아가든, 하나를 선택했더라면.


“공녀, 지금 묻고 있잖습니까.”

후작이 재차 대답을 재촉했다.


“하긴, 공작의 딸 사랑이 지극하긴 하지요? 딸을 위해서 이런 짓을 벌였다 해도 놀랍지 않군.”

“…….”

후작이 부친까지 언급하자 이블린은 바스티안에게 시선을 옮겼다.

눈이 마주치고 바스티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그녀가 무얼 하려는 건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뭐든 뜻대로 해.’

든든한 지지를 얻은 이블린은 심호흡한 뒤 보레아를 불렀다.


“지금 알리에타에게 가서 침실에 재스민 문양이 새겨진 나무 상자를 가져와 달라고 전해주세요. 말하면 뭔지 알 거예요.”

“네, 단장님.”

“그리고, 그녀도 데려오라고 전해주고.”

유언장이 든 상자를 부탁한 이블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당황스럽군요,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게 가짜 임신이냐며 따져 묻던 페런 영애의 모습이 생생한데요.”

“그, 그거야 짜고 치는 걸 수도…….”

“후작님의 질문에 답을 드리자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습니다.”

우아하게 고개를 돌린 이블린이 마르다를 바라봤다.


“페런 영애. 올해 나이가 어떻게 되죠? 태어난 날짜는?”

“네?”

엉뚱한 질문에 마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그게…….”

마르다가 머뭇대니 페런 백작이 어서 대답하라며 마르다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댔다.


“저와 동갑이고, 생일은 딱 두 달 차이가 나네요.”

마르다가 우물쭈물 대답하자 이블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문의 치부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군요. 오늘, 전부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네요.”

이블린이 안타깝다는 듯 눈을 내리깔았다.


“마르다 페런 영애는 제 친척이 아닙니다. 그녀는 제 이복동생입니다.”

“!”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제가 부친의 극진한 사랑을 받으며 자란 건 아니란 뜻이지요.”

웅성대는 소리가 커졌다.

마침 알리에타가 상자를 들고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고마워, 알리에타.”

이블린은 알리에타에게 건네받은 상자를 바스티안에게 내밀었다.

단단히 잠겨 있던 상자가 바스티안의 손끝에서 열렸다.

이블린은 유언장을 손에 든 채 말을 이었다.


“저는 소문과 달리, 지난 2년간 병으로 앓아누웠던 게 아닙니다. 부친에게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 그런 방법을 택한 것뿐.”

“!”

“알리에타. 지난 2년간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말해주겠어?”

“공작가에 감금된 채로 공작님께 학대당하셨지요.”

오면서 보레아에게 상황을 전해 들은 알리에타가 눈치껏 대답했다.


“게다가 제 어머니도 사고로 돌아가신 게 아니에요. 부친에게 살해당하셨지요.”

“!”

경악 가득한 탄식이 해일처럼 회의장을 덮쳤다.


“부친이 이런 악행을 저지른 이유는 하나입니다. 티에르 가문을 손에 넣을 목적으로요.”

이블린이 유언장을 쫙 펼쳐 내용을 읽기 시작했다.

이블린이 문장 하나를 읽을 때마다 귀족들의 얼굴에 다양한 표정이 피고 지었다.


“아마 제 조부께서는, 일찌감치 눈치를 채셨던 모양입니다. 선대 공작의 유지를 받들어 제가 공작위를 물려받고 가주가 될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그 증인이 되시겠군요.”

이블린이 유언장을 확인해 보라는 듯 옆에 있던 디에스티 공작에게 넘겼다.


“부친은 직위를 이용해 불법적으로 자금을 융통하는 등, 다양한 비리를 저질렀더군요. 관련된 분들이 여기도 꽤 많은 것으로 압니다.”

몇몇 이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고, 공녀. 이건 모두 공녀의 일방적 주장 아닙니까.”

“필요하다면, 부친을 이곳으로 데려오지요. 병으로 요양을 떠났다고 알고 계시지만, 실은 투옥되어 법적 조사를 받고 있습니다.”

“!”

“여기에서 관련된 이들과 함께 조사를 진행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죠.”

“마르다, 지금 저 말이 사실이냐?”

페런 백작이 덜덜 떨면서 물었다.

공작이 그에게 커다란 똥을 던진 기분이었다.


“아, 아니에요. 공녀가 뭔가 오해를 한…….”

“마르다!”

마르다가 두 손을 내저을 때였다.

회의장 입구에서 쨍한 목소리가 터졌다.

겁을 잔뜩 집어먹고 들어온 여자가 마르다를 발견하고 환한 얼굴로 달려왔다.


“왜, 왜 당신이 여기…….”

익숙한 얼굴을 확인한 마르다가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지금 살아 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마르다, 얘, 너 다른 사람 같다. 이 보석 진짜니? 드레스 고급스럽다.”

마르다의 모친이 마르다를 신기하다는 듯 요리조리 살폈다.


“누, 누구시죠? 전 모르겠는데요.”

“…….”

페런 백작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쩔쩔맸다.

아무리 봐도 귀족과는 거리가 먼 여인이었다.


“얘, 잠깐 못 봤다고 네 엄마 얼굴도 못 알아보니? 네가 지금 이렇게 잘 먹고 잘사는 게 누구 덕분인데!”

“나가, 나가세요!”

“근데 얘, 너 이러고 있으니까 네 아빠랑 똑같다. 하긴, 안 그러면 그 인간이 인정도 안 했겠지만. 그런데 고귀하신 우리 티에르 공작님은 안 보이네?”

마르다는 눈치도 없이 떠들어대는 모친을 보며 절망스러웠다.

빠져나갈 구멍을 잃은 마르다는 이를 갈며 이블린을 노려봤다.


“어떻게, 어떻게 나한테 이래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글쎄, 우리 둘 다 부친을 잘 못 만난 게 문제인지도…….”

“이익.”

마르다가 태연하게 서 있는 이블린에게 달려들었지만, 날카로운 손톱은 이블린에게 닿지 못했다.


“이거 놔, 놓으라고요!”

팔이 붙잡힌 마르다가 근위병에 의해 회의장 밖으로 끌려나가다시피 했다. 마르다의 생모도 함께였다.


“세상에, 무서워라.”

보니카가 못 볼 걸 봤다는 듯 손으로 입을 가렸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일이 잘 해결된 기분이었다.

그런 줄 알았는데.


“아쉴브 영애.”

“……네? 왜, 왜요, 공녀?”

보니카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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