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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90/95)


90.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2022.08.10.



“그대들의 부친은 황제와 협상을 시도하려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모두가 베라츠에서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자라온 동지였다.


“자, 알아먹었으면 쓸데없는 말은 그만두고 계획이나 짜지.”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 다베르가 지도를 펼쳤다.


 

* * *



“공작님, 기다리시게 했군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이블린이 다리를 성큼 움직여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이블린, 어서 오거라. 아니, 이제 황후 폐하라고 불러드려야지요.”

“아직 식도 올리기 전인데요.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 건 조금 민망하네요.”

“곧이지 않습니까, 그보다 천천히 걸으시지요.”

디에스티 공작이 몸을 일으키며 뛰지 말라 언질을 줬다.


“바쁘시지요?”

이블린이 앉고서야 따라 앉은 공작이 웃으며 물었다.


“네, 좀 그러네요.”

정신없는 나날이었다. 중요한 행사를 앞둔 데다가, 부친이 문제를 일으킨 가문의 일을 수습해야 했다.


“대리인을 두면 좋겠지만, 지금은 일이 많아 제가 맡을 수밖에 없네요.”

“걱정 마시지요. 훌륭하게 잘 해내고 계십니다. 파시아 그 친구가 보면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을 겁니다.”

앞에 두툼한 책을 쌓아 놓은 디에스티 공작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기념일 행사를 위한 교육과 더불어 가주의 업무를 도와주려 임시 스승 역을 맡은 참이었다.


“칭찬해주시니 마음이 놓이네요.”

“휴이터가 폐하의 반만 닮았더라도…….”

“휴이터는 이미 훌륭한 기사인걸요.”

“…….”

공작은 싱긋 웃는 이블린을 보며 잠시 상념에 잠겼다.

만약, 이블린이 휴이터와 가족이 되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다가 금방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상 또한 황실에 대한 불충이었다.


“부친은 어쩌고 있나요?”

반미치광이가 되어 가고 있다고, 솔직히 말해도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표정을 보니 답을 들은 것 같네요.”

“진작 알아채고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파시아 그 친구에게도 면목이 없군요.”

“아닙니다, 조부께서 공작님께 말씀드리지 않은 데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지금도 많이 도와주고 계시고.”

바스티안과 함께 귀족회를 구성하는 방식을 바꾸느라 머리를 싸매고 있다는 걸 잘 알았다.


“아마, 폐하를 믿었던 모양입니다. 그 친구답기도 하고요.”

“그렇죠? 어쨌든 앞으로도 많이 도와주세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행사를 살피러 가시지요. 당장 기념일 행사가 이틀 후니, 절차에 대해 익혀두셔야 합니다.”

“네.”

부드럽게 미소지은 이블린이 디에스티 공작과 함께 몸을 일으켰다.

.
.



“이블린.”

“폐하, 먼저 와 계셨네요.”

“어쩐지, 오랜만에 보는 기분인데.”

아침에도 봤지만, 이블린은 그 사실을 굳이 지적하지 않기로 했다.

이블린은 당연하다는 듯 손을 잡아 오는 바스티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이블린의 투명한 눈동자가 바스티안의 얼굴을 빠르게 살폈다.


“폐하, 눈 밑이 조금 퀭한 것 같아요.”

“일이 쏟아지는데. 다베르의 빈자리가 이토록 큰 줄은 몰랐어.”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다베르 후작은 어딜 간 건가요?”

이블린이 궁금증을 드러냈다.

후작이 황궁을 비운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나 있었다.


“그에게 중요한 일을 맡겼거든.”

바스티안이 고개를 갸웃대는 이블린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블린.”

“……네?”

“만약에 말이야.”

이블린에게 진짜 부친의 이야기를 해도 될까.

아직, 이를까.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 건, 무슨 이유일까.


“두 분, 제 이야기도 들어 주시겠습니까?”

마침 다트가 끼어들어 두 사람을 일깨웠다.


“폐하?”

“아무것도 아니야, 나중에.”

다베르가 돌아오면 그때.

바스티안이 미소 지으며 이블린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자, 두 분은 이곳에서부터 의식을 시작하실 겁니다.”

다트가 디에스티 공작과 의논을 하면서 절차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블린은 눈 앞에 펼쳐진 넓은 공간을 둘러 보았다.

산 중턱에 자리한 곳은 꽤 신비한 기운이 맴도는 듯했다.

꽤 길고 높은 하얀 돌계단을 오르면 제단같이 생긴 커다란 돌이 한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 위에는 성인 남자 두 명 크기만한 연녹색 광석이 세워져 있었다.


“정령석입니다. 힘을 전달하는 데 아주 유용하죠.”

에메랄드 같기도 하고, 어디서 많이 보던……

그러다 이블린은 문득 단장실 곳곳에 박힌 연녹색 돌을 떠올렸다.


‘설마?’

동그랗게 변한 이블린의 눈이 바스티안에게 향했다.


“이곳에서 간단한 의식을 치르고, 두 분은 저 갈라진 양쪽 길로 걸어가실 겁니다.”

다트의 이어진 설명에 이블린은 진실을 확인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녀에게 힘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데 일부러 정령석을 뒀을까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면 이것보다 작은 정령석이 나올 겁니다. 거기서 각자 의식을 치르고 위로 올라가면 저 나무에서 만나게 될 겁니다.”

다트의 손끝을 따라 이블린의 고개도 더 높은 곳으로 향했다.

둘레와 높이를 짐작하기 어려울 만큼 큰 나무였다.

의식의 끝에 황제의 힘에 반응한 나무는 하얀 꽃으로 만개한다.

어릴 때 어렴풋이 본 기억이 났다.


‘열 살 이전에는 기억이 없고, 매년 열리는 행사는 아니니까…… 내가 본 건 두 번쯤이려나.’

그때만 해도 신기하고 예쁘다고 생각만 했지, 직접 주관하게 될 줄은 몰랐다.


“자, 그럼 들어갈까요?”

다트가 한쪽 입구를 가리켰다.


“잠깐, 굳이 가볼 이유가 있어?”

“지금 미리 확인해야 행사 당일에 매끄럽지요.”

바스티안이 귀찮다는 듯 대꾸하자 다트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엇보다, 우리 단장님이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다. 다른 곳보다 정령의 기운이 강한 곳이니까, 혹 몸에 무리가 가는 건 아닌지 확인해두어야 대비를 할 테니까요.”

깐깐하기는.

바스티안이 투덜거리면서도 수긍했다.

이블린의 안전을 위해서라는데 말릴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같이 움직이지.”

“그건 안 됩니다. 폐하의 기운이 워낙 강하셔서요.”

“어차피 혼자 들어가야 하는 곳이라면서요.”

“네, 그렇습니다.”

“다트와 함께 다녀올게요, 폐하.”

이블린이 어린아이를 달래듯 나긋나긋 말하자 바스티안이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다트가 못 볼 꼴을 보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이따 봐.”

“네, 잠시 후에 저 위에서 봬요.”

작게 입 모양으로 작별을 고하는 바스티안에 이블린이 웃으며 몸을 돌렸다.

바스티안은 이블린이 다트를 데리고 입구를 들어가는 걸 본 뒤에야 디에스티 공작과 함께 반대편 입구로 향했다.

그렇게 안으로 들어갔을 때쯤, 걸음을 멈춘 바스티안이 표정을 굳혔다.


‘이건.’

의식 장소에 온 탓에 감각이 더 증폭되어 느낄 수 있는 거였다.

자연에서 왔지만, 인위적인 냄새.

바스티안이 급히 몸을 돌렸다.

동시에 멀리서 폭약이 터지는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
.

이블린은 조심조심 발을 뗐다.

바깥은 하얀 대리석으로 되어 있어 외국의 신전 같은 느낌인데, 이 안은 또 전혀 다른 세계였다.

좁은 길은 넝쿨과 온갖 식물이 자라 있어 작은 동굴 같기도 하고 오솔길 같기도 했다.


“단장님, 몸에 흐르는 기운이 느껴지십니까?”

“네, 전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천천히 몸의 상태를 확인하면서 가십시오. 그게 목적이니까요.”

“그럴게요.”

다트의 당부를 들으면서 이블린은 웃었다.

어쨌든 기분이 상쾌했다.


‘폐하는 매일 이런 걸 느끼시는 걸까.’

조금이나마 바스티안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작은 이파리들을 손으로 쓸며 걸어가던 이블린이 순간 걸음을 멈췄다.

다트와 보레아 외에 누군가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폐하?”

바스티안인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이블린이 검으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쿠구궁.

멀리서 기괴한 폭발음이 들렸다.


“!”

모두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겼나 봅니다.”

“돌아가죠.”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려 했지만, 폭발음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위험할 것 같으니, 그냥 이쪽으로 가죠.”

이블린은 어쩔 수 없이 걸어가던 방향으로 다시금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 거지. 폐하는 괜찮으신 건가.’

그리고 막 통로의 끝이 보일 때쯤이었다.

쾅! 하는 폭발음과 함께 천장 위에서 돌과 모래가 쏟아져 내렸다.


“단장님!”

보레아가 이블린을 보호하려 몸을 던졌지만, 이미 한발 늦은 후였다.

이블린은 무언가 제 몸을 낚아채는 걸 느끼고는 보레아와 다트를 있는 힘껏 밀어냈다.

동시에 이블린의 몸도 반대로 튕기듯 끌려나갔다.


“하아.”

몸에 충격이 가지 않도록 가까스로 자세를 잡고 버틴 이블린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눈앞의 통로는 흙더미로 막혀 있었다.


“보레아? 다트?”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를 짜내 외치니 흙더미 반대편에서 답이 돌아왔다.


“네, 괜찮아요.”

몸을 묶은 이것만 빼면 말이죠.

이블린은 제 몸을 감고 있는 밧줄을 내려다봤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금방 모시러 가겠습니다.”

“괜찮으니 바로 그곳부터 벗어나서 폐하께 가도록 해요. 추가 폭발이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명령이에요, 보레아.”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폐하께서도 상황을 이미 아셨을 겁니다.”

모두 무사한 걸 확인한 이블린이 한숨을 내쉰 뒤 뒤를 돌아봤다.


“그래서, 이게 무슨 짓이지요, 후작님.”

그녀를 기다린 건 뜻밖의 인물이었다.


“구하는 방법이 상당히 거친데요.”

“안 그러면, 단장님을 상대할 방법이 없어서요.”

“전부 후작님의 짓인가요.”

이블린이 손끝을 꼼지락대며 검으로 손을 뻗을 때였다.

다베르가 먼저 이블린의 검집을 빼냈다.


“해치려는 건 아닙니다. 그저, 단장님의 도움이 필요할 뿐입니다.”

“이런 방법을 쓰면서 부탁할 게 있다고요?”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거절한다면요?”

“아이를 생각하셔야지 않겠습니까.”

“…….”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런 간단한 덫에 걸려 준 건, 함부로 움직였다가 배 속의 아이에게 해가 갈까 봐서였으니까.

이블린이 다베르의 얼굴을 보며 그의 속내를 가늠할 때였다.

전보다 기민해진 감각에 가까워지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떨어져 있어도 마치 연결된 것처럼 몸을 따스하게 만드는 이의 기운.

바스티안이었다.


‘힘을 나눈다는 거, 생각보다 더 좋은 거였네.’

안도한 이블린이 눈에 힘을 줬다.


“그래요, 따르지요. 대신 내게 손 하나 대지 않는다고 약속한다면요.”

“약속드리지요. 일단, 여기를 벗어나는 게 우선이겠네요. 폐하께서 금방 찾아내실 테니까요. 실례하겠습니다.”

다베르가 이블린을 부축해 일으켰다.


“손을 풀어드릴 수 없는 건 이해해주시기를.”

다베르가 이블린을 앞장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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