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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유일한 혈육 (92/95)


92. 유일한 혈육
2022.08.17.



‘뭐지? 이건 내 기억 속에 있는 건가?’

이블린이 의아해하며 주변을 눈으로 훑을 때였다.

문득, 또 하나의 장면이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피에 젖은 금발의 사내였다.


‘다베르 후작?’

이블린이 곧장 앞에 있는 후작의 머리로 시선을 옮겼다.


“경. 혹시 우리 어릴 때,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바쁜 와중에 엉뚱한 질문을 하는 이블린에 다베르가 숨을 고르며 짜증스레 대답했다.


‘그렇지? 그럴 리가 없지.’

피에 젖은 금발이 똑 닮았지만, 조금 전 떠오른 사내는 지금의 후작보다 더 나이가 들어 보였다.


“!”

다베르의 금발에 정신이 팔려있던 이블린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멈춰요! 이쪽으로 가면 절벽이 나올 거예요.”

이블린이 곧장 발에 힘을 주고 버티며 다베르를 멈추게 했다.

바스티안처럼 모든 지형을 꿰뚫을 정도는 아니지만, 대략적인 느낌이 있었다.


“뭐 하시는 겁니까?”

“그냥 절 믿어요, 경. 어제 의식 장소에 다녀왔잖아요. 힘이 조금 강해졌어요.”

“…….”

“그리고 내 검을 줘요. 뒤에 쫓아오는 인원이 있어요.”

다베르의 눈에 담긴 건 의심이었다.


“어서요. 내게는 후작이나 저들이나 마음에 안 드는 적이지만, 그래도 그나마 후작과 손을 잡는 게 더 안전할 것 같거든요.”

이블린이 손을 까딱이는데, 아래에서 쫓아오는 사내들의 외침이 들렸다.


“봐요. 이미 늦었어요, 이대로 도망쳐도 소용없을 거예요.”

“……지금 그 몸으로 검을 쓰겠다는 겁니까?”

“그럼 혼자서 상대하게요? 나까지 지킬 수 있는 실력은 되고요? 나한테 상처 하나라도 생기면 폐하와 협상하는 건 어려워질 텐데요.”

“…….”

입술을 짓씹던 다베르가 어쩔 수 없이 이블린의 손을 풀어준 뒤 검을 건네주었다.

이블린이 검을 뽑자 그 위로 옅은 녹색의 빛이 감쌌다.


“!”

다베르의 놀란 표정을 눈치챈 이블린이 씩 웃었다.


“그동안 폐하께 배웠어요. 황궁에 있으면서 놀기만 한 건 아니거든요.”

그래도 오래 쓸 수는 없을 거다.

이것도 지금 힘이 잠시나마 증폭된 탓에 가능한 거고.


‘아가, 미안해. 그래도 조금만 도와줘.’

이블린이 배를 부드럽게 두드린 뒤 검을 고쳐 쥐었다.


“경이 왼쪽을 맡아요. 내가 오른쪽을 맡을 테니까.”

이블린은 포위망을 좁혀 오는 인기척을 노려보았다.

.
.



‘생각보다 더 많은데?’

이블린은 검을 고쳐 쥐며 거친 숨을 토해냈다.

점점 힘에 부치는 게 느껴졌다.


‘너무 힘을 몰아서 썼나.’

익숙하지 않은 힘을 썼더니 평소보다 피로함이 더했다.

이블린은 무거워진 검을 휘두른 뒤 다베르 쪽을 확인했다.

후작의 움직임도 둔해져 있었다.


‘피를 많이 흘렸으니.’

이블린이 혀를 차며 달려오는 적을 베어냈다.

제국에 숨어든 첩자들이 이렇게 많았다니.

나 혼자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이블린이 조금 무력해진 기분으로 몰려오는 사내들을 눈으로 좇을 때였다.

갑자기 땅에서 솟아오른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이 채찍처럼 사내들을 휘감았다.


“!”

“……이블린?”

“폐하!”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난 건, 그토록 기다렸던 바스티안이었다.


“이블린.”

바스티안이 빠르게 이블린의 상태를 확인했다.

군데군데 피가 묻어 있기는 했지만, 조금 지쳐 있는 걸 빼면 괜찮았다.

바스티안의 시선이 이블린을 지나 온몸에 피 칠갑을 한 다베르에게 향했다.


“봐줄 만한 상태가 아니군. 쉬고 있어, 이블린.”

혀를 찬 바스티안이 다시금 이블린을 보며 다정하게 웃었다.


“하아.”

바스티안의 말 한마디에 이블린이 검을 쥔 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이블린은 검을 지지대 삼아 바닥에 세우고, 바스티안이 습격자들을 차례로 정리하는 걸 똑똑히 지켜봤다.

물론 다베르가 뒤에서 바스티안을 습격하지 못하도록 지켜보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상태를 보니 감히 바스티안에게 덤빌 생각은 못 할 것 같지만.

바스티안은 이블린을 보호하듯 제 뒤쪽으로 한 채 사내들을 한 자리에 몰아넣었다.

무겁게 가라앉은 진회색 눈동자가 사내들을 빠르게 훑었다.

절벽의 끝. 포위한 습격자들.

끔찍할 만큼 익숙한 광경이었다.

눈과 뇌리에 새겨져 한 번도 잊어 본 적 없으니까.

바스티안의 눈빛이 곧 날카롭게 변했다.


 

.
.



“이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늦게 와서 미안.”

오래 걸리지 않아 상황을 정리한 바스티안이 한걸음에 이블린에게 다가왔다.


“안 늦으셨어요, 아주 적당한 때에 오셨거든요. 저야말로 걱정 끼쳐서 죄송해요.”

“그대가 미안할 게 아니잖아.”

바스티안은 이블린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고 이마를 맞댄 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켜냈어.’

전과는 다르게.

힘이 불안정해서 이블린의 작은 몸 하나 제대로 지켜내지 못했던 때와는 달랐다.


“폐하, 저요.”

“응?”

바스티안의 손을 꼭 움켜쥔 이블린이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마차 사고 때처럼 어떤 단편적인 기억들이 떠올랐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때도 힘을 쓴 탓에 부작용으로 기억이 떠오른 거라고 했지.’

그럼 지금 이것도 정말 있었던 일이라는 건데.

지금도 무리해서 힘을 쓴 탓에 떠오른 기억이라면.

역시 잃어버린 어린 시절의 기억과 연관이 있을까.


“이블린, 왜? 어디가 아파?”

“아녜요, 아무것도. 다시 만나서 기쁘다고요.”

이블린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그래, 이건 황궁으로 돌아가서.’

지금은 다베르의 일을 수습하는 게 먼저였다.

이블린이 다베르를 쳐다보자 바스티안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갔다.


“마음이 급했나 보군, 다베르.”

바스티안이 무릎을 꿇고 앉아 거친 숨을 몰아 내쉬는 다베르에게 다가갔다.


“아직 나에 대해 모르는 게 많으면서, 이토록 섣불리 움직이다니.”

“…….”

“돌아오라는 명령에도 복귀를 미루더니, 이게 목적이었나.”

이블린과 바스티안을 번갈아 보던 다베르의 손등에 핏줄이 돋았다.

바스티안이 여기까지 왔다는 건, 이미 아래 상황은 끝이 났다는 뜻일 터.


‘내가 늦었구나.’

다베르의 입술이 짓이겨지다 찢어졌다.


“그래, 그대의 동료들은 전부 내 손에 들어왔어, 다베르.”

바스티안이 읊조리자 다베르가 검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빠르게 검 끝을 제 목으로 가져갔다.


“!”

놀란 이블린이 손을 뻗었지만, 바스티안이 한 발 더 빨랐다.

바스티안이 발끝으로 쳐낸 검이 허공을 날아가 먼 곳에 박혔다.


“이런, 다베르. 상당히 쉬운 길을 선택하는군. 이대로 죽으면 끝이다? 실망인데?”

바스티안이 한심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정 그리하고 싶다면 그간 지내온 정이 있으니 말리지는 않겠어.”

“폐하!”

이블린이 바스티안을 만류하듯 외쳤다.


“그 전에, 이것부터 읽어보고 판단해.”

바스티안은 품에서 꺼낸 편지를 다베르 앞에 툭 던져놓았다.


“그대의 부친이 남긴 편지야.”

“……!”

다베르가 땅에 떨어진 편지를 노려보다 말도 안 된다는 듯 바스티안을 올려다봤다.


“내게 정체를 들키지 않으려고 꽤 애를 썼더군. 그러려고 내 보좌관이 되는 걸 선택했겠지만.”

다베르가 떠나고, 키르아를 비롯한 다양한 정보망을 통해 다베르가 숨긴 정보를 확인했다.

그리고 추측은 확신으로 변했다.


“역시, 저는 폐하의 손바닥 위에서 놀고 있었군요.”

“그대가 계속 믿음직한 보좌관이었다면, 난 계속 속아주었겠지.”

다베르를 불러들여 소피엘 카디아의 아들인지 확인할 작정이었다.

그 후에 이블린에게 말해줄지 결정하려 했는데.


“안타깝군. 내 곁에 있으면서도 날 믿지 못했다니.”

“…….”

다베르는 떨리는 손으로 낡은 편지 봉투를 열었다.

[그리운 아들에게.

네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매일 같이 쓰고 있단다.

벌써 오래도록 널 보지 못했구나.

널 인질로 붙잡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제국으로 와야만 했지.

베라츠는 지금 위험한 계획을 세우고 있어.

아직 어린 네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사는 걸 원치 않아.

그저 내게 막을 힘이 없다는 게 안타깝구나.

아마 난 베라츠로 돌아갈 수 없겠지. 지금 왕은 내가 위협이 된다고 생각할 테니까.]

다베르의 눈동자에 붉은 실핏줄이 터졌다.

편지 내용에는 오늘 그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겪은 상황이 들어 있었다.

그러니까, 정말 왕국에 이용당한 것이었나.

그런 거라면 허망하고 또 허망했다.

다베르가 손에 힘을 주며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렸다.

[네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

언젠가 네가 이 편지를 받게 되면, 제국의 티에르 공작가를 찾아가거라.

리본느 티에르를 찾아가. 그 사람이 널 돌봐줄 거야.

그녀는……]

편지지를 쥔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다음 내용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이 편지가 조작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잔뜩 예민해진 다베르가 바스티안을 노려보았다.


“믿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어. 눈치 빠른 그대라서 곁에 둔 거니까.”

“…….”

“내용을 보면, 대충 상황을 짐작하겠지.”

바스티안이 이블린을 가리키듯 고개를 까딱였다.


“…….”

티에르 공작가를 찾아가라는 부친의 말.

티에르 공작가 누구에게도 없던 백금발.

그저 이블린을 보고 신기하다고 여기기만 했는데.


“그래, 맞아. 지금으로서는 그대의 유일한 가족이야. 그리고 그대의 부친은 나 때문에 죽은 게 맞아.”

“!”

다베르의 눈이 형형해졌다.


“나를 구하기 위해 동료들에게 칼을 겨눴고, 모든 걸 묻으려고 그 자리에서 자결했어. 이건 그때 내게 남긴 편지야.”

“…….”

“확인이 더 필요한가. 하지만, 그대도 의심은 하고 있을 텐데. 왜 그대의 부친이 왕족인데도 이쪽으로 와야 했는지.”

“…….”

“다베르, 제국은 전쟁을 바라지 않아. 제국이 우위에 서서 권력을 휘두를 마음도 없고.”

그건 곁에서 지켜본 그대가 제일 잘 알 테지.

힘이 빠진 다베르의 눈이 갈피를 잃고 허공을 헤맸다.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면 오펜 자작을 찾아가. 그대가 언제든 확인할 수 있도록 모아놓은 정보를 건네주도록 말해놨으니까.”

“!”

“선택해, 다베르. 이 의미 없는 희생을 반복할 건지. 지금이라도 함께할 방법을 모색할 건지.”

“……제가 ……이대로 보내주시면, 제가 다시 칼을 들고 올 수도 있지 않습니까.”

바스티안은 대답 없이 다베르를 바라봤다.


“저를, 믿지 않으셨잖습니까.”

“믿지 않았다면, 그대를 처음 의심했을 때 바로 처리했겠지.”

잔인하고 냉혹한 사람인데.

이것조차 함정일까?

다베르는 혼란스러웠다.


“다베르. 난 믿지 않는 자를 곁에 두지 않아. 무엇보다…… 말했잖아, 그대를 곁에 둔 건 그대의 머리색 때문이었다고.”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머리칼 끝을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쥐며 웃었다.


“온 대륙을 헤집고 다녀도, 이렇게 똑 닮은 색을 가진 이는 없었거든.”

“폐하?”

이블린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바스티안을 올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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