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내 꼬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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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내 꼬마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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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내 꼬마 아가씨
2022.08.21.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머리칼을 놓아준 뒤 동그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
이블린은 바스티안에게 궁금한 것들을 묻는 건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그런 마음을 알았는지 바스티안이 미소를 지우고는 다베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베르, 난 그대가 그대의 부친과 같은 절차를 밟게 둘 수 없어.”
그것도 이블린의 앞에서, 두 번씩이나.
다베르의 혼란스러운 눈동자가 이블린을 훑었다.
“경. 혹시 우리 어릴 때, 이런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기억을 잃은 공녀.
반려의 의식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황제의 힘을 가지고 있는 공녀.
‘설마.’
퍼즐이 맞춰지는 듯했다.
부친은, 황제를 구하려다 죽은 게 아니다.
그가 구하려던 사람은 어쩌면…….
“마음을 정하면 다시 찾아와. 그대 동료들의 처분은, 그때 정하지.”
“…….”
“베라츠 왕실의 개가 되어 대륙을 전쟁으로 몰아넣을 건지, 베라츠의 썩은 곳을 도려내고 그대 부친의 유지를 따를 것인지.”
다베르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힘이 들어간 다베르의 눈이 바스티안에게 향했다.
“얼마든지.”
바스티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의 눈과 귀로 직접 확인해. 다만, 그대가 또 칼을 겨눈다면, 그때는 오늘처럼 끝나진 않을 거야.”
“…….”
“현명한 선택을 하길 바라지.”
“……감사합니다.”
작게 읊조리듯 말한 다베르가 몸을 돌렸다.
이블린은 가늘어진 눈으로 멀어지는 다베르를 응시했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다가 다리의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이브.”
바스티안이 휘청이는 이블린을 붙잡았다.
“……긴장이 풀려서…….”
바스티안이 망설임 없이 이블린을 안아 올렸다.
“어쩌죠, 폐하.”
“응?”
“알리에타가 태교에 힘쓰라고 했는데, 오늘 결국 실패하고 말았어요.”
“아가에게 내 탓이라고 해. 내가 더 빨리 오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농담처럼 던지는 말과 달리 바스티안의 표정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처럼 무척 심각했다.
“그런 표정 하지 마세요, 폐하.”
이블린은 그만 웃어버리며 바스티안의 목을 그러안았다.
“어쨌든 다행이에요. 더 피를 보고 끝난 게 아니라서요.”
한숨을 폭 내쉰 이블린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저, 이제 좀 잘게요. 하루를 꼬박 뜬눈으로 보냈더니 더는 못 견디겠…….”
이블린의 마지막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잘 견뎠어, 이블린.”
가뜩이나 아이가 생기면서 잠도 많아졌는데, 얼마나 피곤했을까 싶어 안쓰러웠다.
속상해진 바스티안이 기절하듯 잠든 이블린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입술에 닿는 온기를 느끼고 나니 문득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바스티안은 제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두려움이었다.
또 지키지 못했다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
하마터면 이블린을 잃을 뻔했으니까.
“무사히 돌아와 줘서 고마워, 내 꼬마 아가씨.”
다시는 오늘 같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위험 요소가 될만한 것들은 전부 정리하는 게 맞았다.
“…….”
그러니까, 다베르.
그대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만 해.
바스티안은 품에 안은 이블린을 더없이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 * *
“공녀님, 일어나셨어요?”
“어, 그런데…….”
이블린은 눈을 뜨자마자 난감한 미소를 흘렸다.
침대 곁에 나란히 선 바스티안과 알리에타의 표정이 너무 심각했다.
“누가 보면 내가 큰 병이라도 생긴 줄 알겠어요.”
“하, 이블린. 지금 웃는 거야?”
바스티안이 어이없어하면서도 마음이 놓여서 머리를 쓸어넘겼다.
“그러게요, 웃음이 나오네요.”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나를 아끼는 걸 보니까요.
“알리에타, 얼굴은 또 왜 그래? 또 울었구나?”
“그럼 울지요, 제가 안 울게 생겼나요?”
소처럼 커다란 알리에타의 눈망울에 금방 눈물이 차올랐다.
“이런…… 울지 마, 유모.”
“깨어난 걸 봤으니, 잠깐 보고만 받고 올게.”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볼에 입을 맞춘 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침실을 벗어났다.
바스티안이 나가고 이블린은 뻐근한 어깨를 느끼며 알리에타의 손을 잡았다.
“유모, 나 며칠이나 잔 거야?”
“꼬박, 이틀이요.”
“정말? 음, 그만 울고, 유모. 나 지금 바로 씻고 싶은데.”
이블린이 일부러 알리에타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었다.
“네네, 지금 바로 준비할게요.”
서둘러 눈물을 훔친 알리에타가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
.
욕조에 몸을 담근 이블린은 두 팔로 다리를 감싸 안은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눈을 뜨자마자 해결되지 않은 의구심들이 차례대로 뇌리에 떠올랐다.
“네 핏줄은 그렇게 고귀하지 않다.”
부친의 비열한 목소리.
“처음부터, 황제는 당신의 힘에 대해 알고 있었어.”
다베르 후작의 말을 증명하듯 떠오르던 낯선 기억들.
바스티안을 지키려다 죽었다는 후작의 부친.
편지를 읽고 난 뒤 그녀를 보며 흔들리던 후작의 눈동자.
“그래, 맞아. 지금으로서는 그대의 유일한 가족이야.”
무언가 확신을 주는 듯하던 바스티안의 말과 태도.
“온 대륙을 헤집고 다녀도, 이렇게 똑 닮은 색을 가진 이는 없었거든.”
피에 젖은 금발머리의 사내.
문득, 루체이에서 그녀를 대신해서 여장했던 다베르의 모습도 생각났다.
“단장님과 꼭 닮은 색이라서요.”
오단이 웃으며 덧붙이던 말도.
“…….”
결론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황궁으로 오면서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지만, 친부에 대한 단서는 구할 수 없었다.
이상할 정도로, 꼭 누군가 일부러 숨기기라도 한 것처럼.
‘만약 누군가 숨긴 거라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역시 제국에 단 한 명뿐이겠지.’
생각해 보면, 바스티안은 가끔 그녀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사람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알리에타.”
“네?”
이블린의 몸에서 물기를 닦아내던 알리에타가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나 사고 나기 전에 말이야. 어렸을 때.”
“네.”
“역시, 난 폐하랑 만난 적이 있는 거지?”
알리에타의 손이 멈칫하다가 다시 움직였다.
“글……쎄요? 근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으시…….”
“왜 폐하도, 유모도 그 사실을 숨기는 거야?”
이블린이 다 알고 있다는 듯 묻자 잡아떼려던 알리에타가 당황하고 말았다.
“공녀님, 그게, 그러니까요……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건가요?”
“……대충?”
“세상에.”
알리에타가 다시 눈물을 글썽대며 거품 묻은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니까 전부 얘기해줘, 알리에타. 내 아버지에 대한 것까지도.”
.
.
이블린은 단장실 벽 한가운데 걸린 바스티안의 그림을 멍하니 바라봤다.
“죄송합니다, 공녀님.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에요. 하지만, 기억을 잃은 공녀님을 위해 내린 결정이었대요.”
“공녀님의 친부에 대해서는 저도 아는 바가 없어요.”
“정말이에요. 그냥, 지금의 공작님은 아닐 거라고 짐작만 했을 뿐이고요. 아시다시피, 마님이 그런 사내를 좋아할 리가 없으니까요.”
알리에타의 말을 들으면서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상하다 싶었지.’
굳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숨어 있는 자신을 지목해 호위기사단장직에 임명한 것도.
스캔들이 터지자 그에게 이득 없는 계약 결혼을 제안한 것도.
무엇이든 반대 한 번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도와준 것도.
‘오래도록 좋아했다는 게, 이런 의미였어.’
이블린은 손을 뻗어 바스티안의 까만 머리칼 부분을 만져 보았다.
언뜻 떠오른 기억 속의 까만 머리칼은 역시 바스티안일까.
바스티안이 이 그림을 보냈을 때만 해도 그냥 짓궂은 장난을 친다고만 여겼다.
그랬는데, 어떤 마음으로 보낸 걸까.
잃어버린 기억에 대해 말하지도 못할 거면서, 자신을 떠올려줬으면 하는 바람이었을까.
‘난 바보였어.’
부친에게서 공작가를 돌려받는 것만 생각했는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있던 거다.
모친이 왜 말도 안 되는 결혼을 선택해야만 했는지 모든 것이 이해가 됐다.
그녀의 핏줄에 대한 진실이 알려지면, 베라츠를 적국으로 취급하는 제국 분위기상 역적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만약 티에르 공작처럼, 그걸 악용하는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면 더더욱.
‘바보 같은 사람.’
전부 혼자 짊어지고, 해결하려고 하다니.
이 미안함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이 책임을 어떻게 감당할까.
안쓰러운 그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내 몸에 흐르는 피가 그 사람에게 독이 되지 않으려면, 난 무엇을 해야 할까.
이블린이 눈물을 꾹 참으며 그림에서 손을 떼어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핏줄 때문에 바스티안을 떠나는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다.
그건, 바스티안에게도 상처가 될 테니까.
모든 걸 감수하고, 그녀의 눈과 귀를 가리고 혼자 해결하려던 이유를 알 것 같으니까.
이블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단장실을 벗어났다.
얌전히 침실에서 기다리라고 했던 바스티안의 명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따를 수 없었다.
바스티안의 앞에서 아무렇지 않게 웃을 자신이 없었다.
‘분명히 걱정할 테니까.’
생각을 정리할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다.
.
.
“단장님?”
“아, 다트.”
온실 구석에 있는 이블린을 발견한 다트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미안해요, 놀라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걷다 보니 여기지 뭐예요.”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난 이블린이 멋쩍게 웃었다.
다트는 왜인지 모르게 어두운 이블린의 표정을 살폈다.
게다가 납치 사건이 벌어진 게 고작 이틀 전이었다.
바스티안이 호위도 없이 이블린을 혼자 내보낼 리 없었다.
“혹시, 폐하랑 싸우셨습니까?”
“그런 건 아닌데…….”
“이 넓은 황궁 내에서 선택하신 곳이 여기라니 영광입니다. 그래도 부부는 부부군요. 곧장 여기로 오시는 걸 보면요. 정녕 제 온실을 두 분의 아지트로 사용하시려는 겁니까?”
다트의 너스레에 이블린은 그만 웃어버렸다.
“이만 가볼게요, 다트. 멋대로 들어와서 미안했어요.”
“단장님.”
다트가 떠나려는 이블린을 붙잡았다.
“차라도 한잔하고 가시지요? 아주 좋은 차가 생겼거든요.”
다트의 권유에 이블린은 조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오펜 상단을 통해 들여온 모종인데, 다행히 뿌리를 잘 내리고 꽃을 피웠지 뭡니까. 안 그래도 조만간 두 분께 선보이려던 차였습니다.”
다트가 이블린의 앞에 찻잔을 내려놓으며 설명했다.
“음, 정말 향이 좋네요.”
“그렇지요? 그런데, 단장님도 참 무르십니다.”
“……네?”
“화가 나셨으면, 어디 황궁 밖으로 확 나가셔도 될 텐데요.”
“아.”
“역시…… 어릴 때 사고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요?”
“……알고 있군요.”
“두 분이 싸우실 일이라면, 그것뿐이니까요.”
먼저 선수를 친 다트가 마른 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