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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내가 어떻게 그대를 (94/95)


94. 내가 어떻게 그대를
2022.08.24.



 


“죄송합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저도 공범이잖습니까.”

“아니에요, 다트. 살려준 걸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것도 결국, 폐하께서 하신 일이지요.”

“아.”

다트가 이블린을 가만히 보다가 찻잔 손잡이를 문질렀다.


“단장님, 폐하께서 그때의 일을 숨기신 걸 너무 서운해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확히는 어릴 때 일을 숨긴 것보다 친부의 문제 때문에 심란한 거였지만, 이블린은 굳이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바스티안이 그녀에게 절대로 들려주지 않을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자신을 변명하시지 않을 것 같으니, 제가 좀 해야겠습니다.”

그래요, 다트.

내가 듣고 싶은 이야기를 해줘요.

이블린은 대답 없이 들을 준비가 되었다는 것만 표정으로 알렸다.


“폐하께서는 단장님을 살리기 위해 많은 걸 희생하셨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단장님께 숨기려 하셨을 겁니다.”

“…….”

“제국은 황제의 힘으로 안정되지요. 그 힘은 후손에서 후손에게, 대대로 물려주고요.”

황제는 반려의 의식을 치른 황후와 힘을 나누고, 그 후에는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힘을 물려준다.

하지만, 바스티안이 힘을 무리하게 사용하는 바람에 균형이 깨졌고, 그 일은 선황제의 건강이 악화하는 계기가 됐다.


“새로운 황제가 힘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 때까지, 아슬아슬한 저울질을 하는 거나 마찬가집니다.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서요.”

“…….”

“그런데, 폐하께서는 그런 걸 다 무시하신 겁니다.”

단장님을 살리기 위해서요.

다트는 말을 아꼈지만, 이블린은 생략된 뒷말을 알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폐하께서는 어린 나이부터 제국 밖을 떠돌아야 했고, 선황께서는…….”

이블린의 눈동자가 까무룩 가라앉았다.


“그런데도 폐하께서는, 많이 괴로워하셨습니다. 본인의 선택으로 단장님의 인생을 바꿔놓았다고요.”

“왜 그런…….”

“글쎄요, 목숨을 구해 준 은인이라 고마워하거나, 원망을 받거나. 그런 이유를 앞세우기보다는, 그냥 단장님께 아무 조건 없이 사랑받고 싶으셨던 거 아닐까요.”

“…….”

이블린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어 버렸다.

바스티안이 제게 가진 애정이 얼마나 큰 건지 감히 그려 볼 수 없었다.


“크흠. 제가 이런 이야기를 단장님께 한 걸 알면 폐하께서 제 목을 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트가 이블린의 눈치를 봐 가며 말을 이었다.


“많은 걸 희생하며 살아오신 분입니다. 앞으로도 황제의 무거운 책임에서 자유롭지도 못하시겠지요. 그러니, 한 군데 마음 기댈 곳은 있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

“선황께서는 황후 폐하께서 돌아가신 이후, 많이 외로워하셨거든요. 폐하께서는 좀 더 다른 삶을 사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이블린은 코끝이 찡해져서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다트가 넓은 온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요즘 폐하께서 행복하셔서 그런지, 제 온실 속 약초들도 유독 잘 자라는 것 같고요.”

“…….”

 

.
.

온실에 혼자 남은 이블린은 멍하니 약초가 심어진 화단을 바라봤다.


“단장님, 다른 곳으로 가시면 폐하께서 걱정하실지도 모르니 여기서 생각을 정리하고 가시지요. 특별히 빌려드리겠습니다.”

 
다트는 그녀를 혼자 남겨둔 채 자리를 비켜주었다.

덕분에 주변은 그저 고요함뿐이었다.


‘나 때문에 폐하는…….’

바스티안을 외롭게 만들고 제국을 위험하게 만든 원흉이 저였다는 사실이 무척 괴로웠다.


‘나는 그저 내 가문 하나 지키는 것만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이 더없이 창피했다.

기억조차 없이 편하게 살았는데, 그 긴 시간 동안 바스티안은 어떤 마음으로 살았을까.

그리 생각하니 그저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지금쯤 오셨을까.’

일단 몸부터 일으킨 이블린이 온실 문을 활짝 열었다.

그리고 앞에 선 커다란 그림자를 발견했다.


“……폐하.”

“이블린, 침실에서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그게…….”

조금 심술이 난 듯한 표정이면서 목소리는 다정하기만 했다.


“좀 쉬라고 기껏 기사단 업무 보고도 내게 하라고 명했는데. 위험하니까 혼자 있지 말라고 했잖아.”

바스티안이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다가와 이블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찾아다니게 만들다니.”

“…….”

“역시 내가 없으니까 잠이 안 오지?”

이블린은 자신이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따뜻하기만 한 회녹색 눈동자를 들여다봤다.

그가 왜 숨기려 하는지는 알겠지만, 그렇다고 끝까지 모르는척할 수는 없었다.


“폐하, 이제 말씀해주세요. 제게 숨기고 계신 그것.”

“이블린.”

이미 알리에타에게 상황을 전해 듣고 온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볼을 감싸 쥐었다.

모르는 척 넘기려 했지만, 역시 고집쟁이 아가씨에게 먹히는 방법은 아니었나 보다.


“이블린. 꼭…… 들어야만 해? 그냥 모른척하면 안 되겠어?”

미소가 사라진 입가에서 정확한 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폐하,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웃는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바스티안이 뒷걸음질 치는 이블린을 따라 움직였다.


“이블린.”

커다란 손이 작은 손을 움켜쥐었다.


“그대가 이럴까 봐, 자책할까 봐 숨겼어. 내 욕심에. 그대를 내 곁에 두고 싶었으니까.”

바스티안이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듯 이블린의 손을 들어 그 위에 입을 맞췄다.


“전부, 내 욕심으로 내린 결론이야.”

“그렇게…… 모든 걸 폐하의 탓으로 돌리시는 게 절 더 괴롭게 해요.”

전부 내가 그렇게 만든 거니까.

이블린은 바스티안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차가움을 유지하는 표정에 담긴 걱정과 불안이 보였다.

처음이었다.

늘 강하게만 느껴졌던 황제를, 보호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 건.

이블린이 잡힌 손을 빼내자 바스티안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폐하, 저희 좀 걷다가 들어가요.”

이블린이 손의 방향을 바꿔 다시 내밀자 바스티안이 망설임 없이 그 손을 잡았다.

.
.

천천히 방향을 정해두지 않고 얼마간 걷다 보니 두 사람은 이블린의 개인 연무장으로 연결되는 길로 들어섰다.

이미 어두워진 하늘에는 달과 별이 뜨고, 주변은 더없이 조용했다.


“이블린, 내가 그대에게 사실을 숨긴 건…….”

연신 이블린을 살피던 바스티안이 더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그제야 이블린의 얼굴이 반짝 위로 들렸다.


“두 사람의 부탁 때문이었어. 리본느와 그대의 부친.”

할 수만 있다면, 영영 모르게 하고 싶었건만.

바스티안이 쓰게 웃었다.


“두 사람이 바란 건 단 하나였어. 이블린, 그대의 미래를 지키는 것, 그대의 안전.”

“…….”

“그대가 티에르라는 이름 아래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

바스티안이 걸음을 멈추고 이블린을 마주 봤다.


“내가 그렇게 만들어 주고 싶었어. 그래서 숨겼어.”

“……폐하.”

“그대에게 진짜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어. 혼자라는 생각이 들지 않게.”

바스티안이 손끝으로 이블린의 볼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그대의 오라비를 찾아 데려와서 보호할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일이 조금…… 꼬여 버렸네.”

이런 순간에도 자책이라니.

이 사람은 날 위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하려는 걸까.

이블린이 어쩔 수 없다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바스티안의 손가락을 쥐었다.


“폐하, 저는 혼자도 아니었고, 지금도 외롭지 않아요.”

이블린의 눈꼬리가 웃음기에 젖어 곱게 휘었다.


“공작가의 식구들이 있었고, 황궁 식구들이 있고. 무엇보다 지금은 제 곁에 폐하가 계시죠.”

“…….”

“심지어 곁에 없는 동안에도, 절 지켜주셨던 거잖아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손을 제 볼에서 떼어내 아래로 끌어내렸다.


“제게 숨기신 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진짜 문제는…….”

이블린이 말을 멈추고 혀끝으로 건조해진 입술을 훔쳤다.


“저야말로 폐하에게서 모든 걸 앗아간 사람이잖아요. 제가…… 밉지 않으세요?”

바스티안이 황당한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깜빡이다가 한 박자 늦게 실소를 흘렸다.


“이블린, 내가 어떻게 그대를 미워할 수 있겠어.”

“한 번도 후회하신 적 없어요? 그때의 선택에 대해.”

“한 번도.”

바스티안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대가 내 곁에서 살아서 숨을 쉬고, 웃는데. 내가 어떻게 후회하겠어.”

“…….”

“그저, 그때의 내 선택이 그대를 괴롭게 한 걸까봐. 그게 걱정됐어.”

“폐하.”

“내 선택이 그대의 인생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거니까.”

이블린의 눈동자에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죄송해요, 혼자 전부 짊어지게 해서 미안해요.”

“괜찮아.”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눈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괜찮아, 이브. 전부 내가 선택한 길이야.”

“…….”

“이블린, 내가 미워?”

이블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절대 그런 약한 말을 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이 그녀에게만은 이런 약한 말을 한다.


“폐하, 정말 바보 아닌가요?”

“!”

바스티안이 귀를 의심하듯 눈썹을 구겼다가 폈다.


“폐하 곁을 떠날 것 같았으면, 처음부터 이런 고민도 안 했어요.”

“……그렇군.”

“곁에 있고 싶으니까, 신경 쓰는 거죠.”

이블린이 바스티안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같이 의논하고 결정해요. 그게 무엇이든.”

그제야 안도한 듯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어깨를 감싸 안고 그 머리 위에 입술을 묻었다.


“그럴게. 그렇게 할게, 이블린.”

이블린은 울지 않으려고 눈을 몇 번 깜빡이고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모든 진실을 알게 됐어도 달라질 건 없었다.

그저 곁에 있는 게 이 사람을 위한 거라면, 얼마든지 뻔뻔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헤쳐나가면 되겠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만 들어갈까요? 내일은 중요한 행사니까요.”

이블린이 어느새 씩씩해진 표정과 말투로 바스티안을 이끌었다.

이제는 내가 이 사람을 지켜주리라 다짐하면서.


 

* * *

두 달 후.

이블린은 제 곁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는 하녀들을 보다가 포기한 듯 눈을 감았다.


“어휴, 이거 화장으로 가릴 수 있는 걸까요?”

알리에타가 곁에서 지켜보다가 발을 동동 굴렀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아주 미세하게 작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아무도 못 알아봐, 보이지도 않아, 유모.”

“정말 속상해 죽겠네요. 그러게 왜 갑자기 바느질한다고 하셔서는!”

“아기 옷을 만들고 싶어서 그랬지.”

“커다란 검도 다루시는 분이 그 작은 바늘 하나에 다치시고!”

“알리에타, 내가 잘못했으니까 잔소리는 그만. 이러다 정말 늦겠어.”

“잠시만요, 조금만 더 가려보고요. 가장 중요한 날인데, 신경 써야지요.”

“…….”

“다른 날도 아니고 결혼식인데요!”

그러니까, 그 결혼식에 늦게 생겼다고.

이블린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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