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제국의 꽃, 제국의 황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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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 제국의 꽃, 제국의 황후로
2022.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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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차피 내 얼굴은 보이지도 않을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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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께서 보시잖아요! 아이참, 가만히 좀 계셔 보세요.”
이블린이 포기하고 입을 다물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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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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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구머니나!”
입구에서 들리는 낮은 목소리에 알리에타가 경기를 일으키듯 허리를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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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죠, 폐하? 아직 준비가 덜 끝났는데요.”
다가오는 바스티안을 거울 속에서 발견한 이블린이 난감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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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런. 하녀장, 그만 내 신부를 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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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럼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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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 내가 늦을 거라고 했잖아.”
이블린이 짓궂게 알리에타에게 속삭였다.
지금은 바스티안이 구원자처럼 보였다.
조금 있으면 진짜 남편이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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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휴, 정말.”
한숨을 쉰 알리에타가 마무리 점검을 한 뒤 하녀들을 데리고 한꺼번에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바스티안이 픽 웃으며 이블린의 등 뒤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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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늦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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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적절한 때에 와 주셨어요, 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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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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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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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러지?”
제가 내민 손을 빤히 보기만 하는 이블린을 본 바스티안이 의아함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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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예전 기억이 떠올라서요. 폐하의 생일 연회 때, 이렇게 데리러 오셨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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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럼 가실까요, 영애.”
같은 기억을 떠올린 바스티안이 조금 더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이블린이 그 손을 잡고 일어서며 씩 웃었다.
불과 몇 달 전 일인데, 무척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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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말이에요.”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에스코트를 받아 계단을 내려가며 조용히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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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의 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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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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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척 뜨겁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블린이 조금 민망해하며 말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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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바스티안이 손을 더 꼭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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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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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평생 그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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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바스티안이 낮게 웃자 이블린도 따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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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블린.”
바스티안의 다정한 목소리에 이블린이 고개를 빼꼼 옆으로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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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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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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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절 애칭으로 부르지 않으시는 건가요?”
예전에는 늘 이브라고 부르셨잖아요.
과거의 기억이 한 장면씩 불현듯 떠오를 때마다 “이브.”라고 다정하게 부르는 목소리도 늘 함께였다.
바스티안이 눈썹을 까딱이다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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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가 날 다시 애칭으로 불러준다면 고려해 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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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
이블린이 걸음을 멈추고 해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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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
한 번 더 힘을 주어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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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 네 인생을 내게 걸어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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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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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할게.”
바스티안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가 무척 예뻤다.
어린 마음에도 시선을 뗄 수 없던 어린 날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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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거 없어. 네가 내 곁에 있잖아, 이브.”
잡은 손이 끌어 당겨지고 곧 입술이 맞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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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그대야말로 후회하지 않아? 티에르 공작이 되고 싶었잖아.”
바스티안이 장난치듯 이블린의 눈을 보며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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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공작위보다 더 중요한 게 생겼거든요. 사랑하는 사람, 우리의 아이.”
이블린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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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공작보다 황후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거든요. 권력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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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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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잖아요, 저 욕심 많고 야망도 많은 거. 기억하시죠? 건국기념일 때 엄청 잘 해냈다고 디에스티 경에게 칭찬받은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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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지.”
이블린이 어깨를 으쓱하자 바스티안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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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하게 해내 볼게요. 일단은, 오늘 결혼식을 무사히 끝내는 것부터요.”
이블린이 결연한 눈빛으로 의전용 마차에 올랐다.
멀리서, 그녀의 이름을 외치는 함성이 메아리쳐 들렸다.
결혼식 장소에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더 두근거려서 이블린은 바스티안의 손을 꼭 쥐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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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도 이랬지.”
대리석으로 된 커다란 문 앞에 섰을 때였다.
바스티안이 낮게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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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연회 말이야. 그대의 손을 잡고 이렇게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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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그보다 더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걸요.”
어린 날에 뭣도 모르고 꽃반지를 나눠 낀 채 나란히 공작가의 문을 넘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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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부터 정해져 있던 미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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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이야. 처음부터, 내 운명이었지.”
눈이 마주치자 바스티안은 참지 못하고 이블린의 입술을 훔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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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국의 꽃, 제국의 황후로]
다베르는 신문 1면에 실린 바스티안과 이블린의 결혼식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봤다.
서로 마주 보고 웃는 두 사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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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도 웃을 수 있는 사람이었군.”
다베르는 한때 자신의 상관이었던 사내를 보다가, 뒤늦게 존재를 알게 된 동생을 바라봤다.
그가 막 제국을 떠나기 직전, 이블린은 그를 찾아왔다.
그가 망쳐놓을 뻔했던 건국기념일 행사를 무사히 치른 직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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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오고 싶었는데, 폐하께서 허락하지 않으셔서요.”
농담처럼 바스티안을 가리킨 이블린은 그 후 말없이 그의 얼굴을 빤히 보기만 했다.
그러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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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의 아버지를 빼앗아서 미안해요. 경이 원망해야 할 상대는, 제국도 아니고 황실도 아니었어요. 나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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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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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경의 복수를 당해줄 수는 없어요. 지켜야 할 것도 많고, 제가 없으면 슬퍼할 사람들이 많아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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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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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약속할게요. 감히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날 살려 준 그분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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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의 선택이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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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경과 함께, 만나러 가고 싶으니까요.”
언제든 돌아올 자리를 만들어 놓겠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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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베르는 피곤한 눈을 꾹꾹 눌렀다.
베라츠로 돌아온 그는 뜻이 맞는 이들과 함께 왕실 개혁을 계획하고 있었다.
지지부진한 이곳 상황과 달리 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제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와 동료들이 애써 만들어 놓은 빈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바스티안이 그를 위해 일부러 봐 주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게다가 얼마 전에는 칼리아노 티에르의 사형 집행일이 정해졌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귀족들의 권력 구조가 바뀌고, 황권은 강화됐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진행되고 있었다.
마치 그에게 보란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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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베르. 다베르 어디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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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일이야.”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다베르가 신문을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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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이상한 소문이 돌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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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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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엘레모트 제국의 황후에게 베라츠의 피가 섞여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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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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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문이 진짜라면, 제국을 무너뜨려야 한다는 베라츠 왕실의 주장도 힘을 잃겠지.”
다베르의 시선이 곧장 신문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결혼 소식이 여기까지 흘러와 기사에 나는 데는 아무리 짧아도 며칠이 걸린다.
결혼식과 동시에 소문이 흘러가도록 퍼뜨린 거다. 의도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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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못 이기겠군요.’
다베르가 웃고 있는 두 사람을 보다 픽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선택을 지지하고 지원하겠다는 말은 진짜였나 보다.
한편으로는 그의 움직임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다는 뜻일 테고.
제국은 베라츠를 받아들이기로 했으니, 약속을 지키라는 재촉이기도 했다.
* * *
1년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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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하, 베라츠에서 그간 저지른 일들이 있는데 대륙 연합에 받아주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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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과거에 머무를 겁니까, 제국이 대인배의 모습을 보여야지요! 게다가, 따지고 보면 우리 황후 폐하께서도 베라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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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누군가 기침을 하자 시끄럽던 회의장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평화롭던 귀족회의가 요란해진 건 베라츠에서 보낸 사절단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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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도 없는 싸움은 그만하고, 차라리 직접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떻겠습니까.”
바스티안이 꺼낸 말과 동시에 회의장 문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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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절단의 대표로 온 다베르 카디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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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으로 들어서는 이를 본 일부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베라츠의 왕이 바뀌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도 기가 막혔다.
다른 이도 아니고, 한때 바스티안의 보좌관이었던 이였다.
그런데, 심지어. 베라츠의 왕이 사절단의 대표로 온다고?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귀족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회의장을 가득 메웠다.
전후 상황을 전부 알고 있는 디에스티 경이 기가 막힌다는 듯 앓는 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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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언제 계획한 일이신가.’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니, 늘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물론, 이러고도 결과가 더 좋다는 게 기가 막혔다.
지난 일 년간, 황제 부부가 제국을 안정화하며 이룬 성과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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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빨리 왔군, 다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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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님의 첫 생일이 되기 전에는 정리하라고 하셨으니까요. 기한을 맞추느라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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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랬었나.”
다베르와 눈이 마주치자 바스티안이 능청스러운 미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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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서 지원해주신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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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고마워할 거 없어. 그대의 부친이 내 목숨을 구했으니, 나도 은혜를 갚은 것뿐이야. 무엇보다, 그대는 황후의 오라비가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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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스티안의 폭탄 발언에 귀족들의 숨이 멎었다.
베라츠의 피가, 베라츠 왕실을 의미한 거였나.
여러모로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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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까.”
다베르가 난리 통에 평온하게 웃었다.
이쯤 되면 귀족들의 뒤통수를 치는 게 취미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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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 오늘까지는 다베르 후작으로 남도록 해. 다음에는, 베라츠의 왕으로 대우할 테니.”
씩 웃은 바스티안이 미소를 지우고 귀족들을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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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그럼. 연합에 대해 이견은 없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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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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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황태자를 보러 갈 시간이라서.”
바스티안이 미련 없이 몸을 일으켰다.
황후직에 오른 이블린을 대신해 호위기사단장이 된 휴이터가 호위하듯 바스티안의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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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베르, 뭐 해, 안 따라오고.”
바스티안이 고개를 까딱이자 다베르가 고개를 내저으며 그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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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님은, 금발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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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 나와 같은 흑발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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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참, 아쉽군요.”
다베르가 무심하던 예전의 보좌관처럼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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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빨리 잠들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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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손님을 만나서 피곤했나 봐요.”
침대 위에 엎드려 누워 있던 이블린이 쿡쿡 웃으며 손끝으로 아이의 손가락을 톡 건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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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베르의 표정, 볼만했어.”
이블린의 옆에 나란히 누운 바스티안도 아이의 반대쪽 손을 톡 건드렸다.
다베르의 금발을 낚아챈 손이었다.
이블린은 턱을 괴고 흐뭇하게 아이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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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봐도 폐하랑 똑같이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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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을 때는 그대를 닮았는걸. 눈동자도 예쁜 연녹색이고.”
귀여워 죽겠다는 시선이 이블린에게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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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베르와 생각보다 괜찮아 보이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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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뭐. 그래도 함께 지낸 정이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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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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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한 상사를 모시면서 알게 모르게 느낀 동질감이라고 하면 아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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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날 욕하는 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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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리가요.”
이블린이 씩 웃으면서 바스티안의 어깨에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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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친해져 둘 걸 그랬다고 생각했어요.”
내일, 다베르와 함께 공작가의 묘지에 갈 예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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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마워요, 폐하. 친부의 시신을 수습해 어머니의 곁에 함께 있게 해준 거.”
비록 얼굴조차 모르는 아버지라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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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한 일이었어. 나였어도, 그대 곁에 있고 싶을 테니까. 그런데 이브, 아까 다베르의 제안, 어떻게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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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베라츠의 왕위계승권을 아이에게 먼저 주고 싶다는 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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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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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벌써 이 작은 어깨가 무겁겠네요. 제국의 황제에, 베라츠에, 티에르 가문까지.”
이블린이 싫지 않은 한숨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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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좋은 의미네요. 평화의 상징이 될 테니까요. 우리의 마지막 숙제를 끝낸 거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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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 이만하면 우리 완벽한 파트너지 않아?”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귀와 볼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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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부분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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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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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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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칭찬부터 해주는 건 어때?”
바스티안이 이마를 콩 부딪치며 투덜대자 이블린이 웃으며 바스티안을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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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어, 바스티. 뭘 해줄까? 무릎베개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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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다른 거.”
짓궂게 읊조린 바스티안이 이블린의 허리를 감싸 당기며 제 몸 위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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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게 비명을 지르려다 입을 막은 이블린이 바스티안의 어깨를 찰싹 내리쳤다.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음이 샜다.
이렇게 살아가겠지.
같이 웃으면서, 대화하면서, 가끔은 의견이 부딪치더라도 눈을 보면 웃고야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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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티, 그거 알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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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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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지금 너무 행복하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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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일을 이뤘을 때보다 뿌듯한 이야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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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도 행복하게 해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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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이지.”
이블린이 웃으며 바스티안의 양 볼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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