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각하…? …… 읏!”
공작의 입술이 그녀의 귓불에 닿아왔다. 온몸이 달아올라 있어서인지 닿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저릿해졌다.
“열이 오른 것처럼 뜨겁군.”
나직하게 혀를 차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더니 그의 두 손에 의해 오픈 숄더 드레스가 벗겨져 내려갔다.
이제 그녀의 몸을 가리고 있는 것은 몸의 굴곡이 은은하게 비치는 얇은 슈미즈뿐이었다.
자신의 몸 아래 깔린 여인을 내려다보는 공작의 황금빛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응… 빨리, 하아…….”
한번 달아오른 몸은 쉽게 식지 않았다.
그녀의 내부를 태워버릴 것처럼 타오르는 열기에 엘리시아는 몸을 뒤틀었다. 눈앞의 사내가 빨리 이 뜨거운 열기를 잠재워줬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급하게 두 손을 들어 올린 엘리시아가 한 손으로는 공작의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벌어진 셔츠 속으로 파고들어 탄탄한 가슴을 더듬었다.
보기 좋게 박힌 근육을 관능적으로 쓰다듬는 작고 하얀 손의 부드러움에 몸을 굳힌 공작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렇게 보채면 곤란한데. 지금도 인내심의 끝자락을 구경하고 있으니. 그러다가 내 인내심이 바닥나면 그대가 감당하기 힘들 거야.”
인내심? 그런 게 지금 왜 필요한데?
이미 사고가 마비된 엘리시아는 공작을 향해 입을 삐죽였다. 빨리 들어와 그녀의 몸을 채워줬으면 좋겠는데 애만 태우니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보챔에 공작의 황금빛 눈동자가 욕정으로 짙게 물들었다. 그는 엘리시아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이 닿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열에 들떠 발그스레한 입술에서 새어 나온 뜨거운 숨이 그의 입술을 간지럽혔지만 그것마저도 유혹하는 것 같았다.
“정말 사람 미치게 만드는군……. 잊지 말게, 엘리. 그대가 내 고삐를 끊은 거야.”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인 공작은 자신을 유혹하는 엘리시아의 입술을 거침없이 집어삼켰다.
⚜ ⚜ ⚜
붉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달뜬 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기도 전에 사내의 입술 속으로 사라졌다.
“응…….”
사내의 키스는 결코 잘한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몇 번 키스해보지 않은 것처럼 서투름이 간간이 느껴졌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것조차 달큰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그녀를 내려다보는, 열기에 젖어 흐릿한 사내의 황금빛 눈동자 때문인지도 모른다. 항상 진중하던 그 눈동자가 지금처럼 흐트러진 적이 없었으니까.
엘리시아 역시 지금 이 치밀어 오르는 열기가 부작용 때문인지 그녀의 몸을 탐하고 있는 사내 때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하아…… 미치겠군.”
사내가 낮게 신음을 토해냈지만, 고개를 한껏 젖힌 채 강렬한 쾌감에 취해 있는 그녀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도대체 이 사내 아래에서 몇 번이나 절정을 맞은 건지. 거짓말 하나 보태지 않고 기운이 개미 눈곱만큼도 없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까무룩 정신을 놓았다.
⚜ ⚜ ⚜
“후…….”
이케르는 거친 숨을 고르며 엘리시아를 안고 있던 팔을 풀었다. 그녀는 이미 정신을 잃은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나답지 않군. 이렇게까지 계속해서 몰아붙이다니.”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거칠게 쓸어 올리며 그는 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알고 있었다.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헤리스의 부작용이 풀리는 순간부터 그녀의 몸이 서서히 식어 내렸으니까.
그걸 알면서도 그는 멈추지 못했다. 사탕을 처음 먹어본 어린아이처럼 그 역시 그녀의 몸이 주는 달콤함에 완전히 취해버렸다.
“…….”
그는 잠들어 있는 엘리시아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의 시선이 둥글고 예쁜 이이에서 그려놓은 듯한 눈썹, 긴 속눈썹을 거쳐 오뚝한 코로 찬찬히 움직였다.
평소에도 예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하나하나 뜯어봐도 나무랄 곳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붉은 입술에 시선이 닿았을 때 이케르는 자신도 모르게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자신과의 키스로 인해 부어있는 입술을 보는 순간 그의 하체가 묵직하게 반응해온 것이다.
“…내 인내심을 후작에게 시험받을 줄 몰랐는데. 후…….”
고개를 숙여 엘리시아의 목에 얼굴을 묻고 그녀의 체향을 강하게 들이마신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에게서 몸을 뗐다.
달빛 아래 새하얗게 빛나는 나신을 쳐다보던 그는 욕망을 억지로 억누르듯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의 옷은 침대 아래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손목이 풀린 후 엘리시아를 안으면서 거추장스러워 벗어 던진 것이었다.
셔츠를 입던 그의 시선이 옅은 자국이 남은 자신의 손목에 머물렀다. 엘리시아에 의해 끈으로 묶였던 자리였다.
솔직히 그가 조금만 거부했더라도 엘리시아는 그를 묶을 수 없었다.
신대륙에서 들어왔다며 황제가 이상한 술을 자꾸 먹이는 바람에 취하기는 했지만, 방심하고 있다가 그녀에게 엉겁결에 멱살을 잡혀 침대에 눕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자 하나 제압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마 다른 여자였다면 내팽개쳤을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를 몸으로 유혹하려던 여자는 많았으니까.
하지만 창을 통해 들어온 달빛에 비친 붉은 머리카락과 바이올렛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는 얼어붙고 말았다.
결코 그를 유혹할 리 없는 여자가 그의 몸 위에 있었다. 그만 보면 고슴도치처럼 날카롭게 가시를 세우던 엘리시아가.
취했나 싶어 눈을 몇 번 깜빡여도 상대의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잠시 멍해졌던 것 같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얼떨결에 손목을 내준 건. 묶이고 나서야 그녀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그때 이미 그녀는 그의 바지를 풀어 헤치고 있었다.
쾌락에 젖은 채 그의 위에서 움직이던 엘리시아의 모습을 떠올리자 이케르는 손을 들어 또 마른세수를 했다. 아직까지 꺼지지 않은 갈증이 또다시 치밀어 올랐다.
“미치기라도 한 것 같군. 부작용은 내게 일어난 모양이야.”
나직하게 한숨을 내쉰 그는 바지를 입고 옷매무새를 바로 했다. 셔츠가 구겨졌지만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짙은 색의 연미복 재킷을 걸치자 감쪽같이 가려졌다.
옷을 모두 차려입은 그는 침대로 다가갔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에 반사되는 새하얀 여체의 굴곡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이케르는 한숨을 내쉬고는 떨어져 있던 드레스를 들어 침대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몸이 동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한참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것도.
그렇다고 정신을 잃은 사람에게 손을 뻗을 만큼 그는 파렴치하지 않았다.
손에 들린 구겨진 드레스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던 그는 엘리시아에게 드레스를 입혀주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옷을 다시 입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돌아가서 깨끗이 씻기고 새 옷으로 갈아입히면 될 터였다.
그 과정에서 부드럽고 매끄러운, 아기같이 촉촉한 그녀의 피부에 손이 닿을 때마다 그의 미간이 조금씩 찌푸려지며 굳게 다문 입매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여자에게 처음 드레스를 입혀봐서인지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어쨌든 대충이라도 입힐 수 있었다.
그녀는 그가 옷을 다 입힐 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색색거리며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잘 자는군. 이런 모습을 여태까지 다른 놈들이 봤다는 건가.”
이케르는 지금까지 엘리시아와 염문설이 있던 자들을 떠올렸다. 일명 카멜리아 후작의 남자들이라 불리던 자들이었다.
그들 역시 자신처럼 엘리시아의 몸을 탐했을 거라 생각하자 기분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어째서인지는 그도 알지 못했다.
“…….”
생소한 감정을 애써 다스리며 이케르는 옆에 놓아두었던 망토로 엘리시아의 얼굴과 몸 전체를 감쌌다.
그와 엘리시아의 키 차이가 있다 보니 다행히도 발이 살짝 보이는 것 빼고는 모두 가릴 수 있었다.
“프란.”
망토에 쌓인 그녀를 안아 든 채 침대에서 내려온 그가 나직하게 이름을 부르자 하나의 인영이 스스륵 허공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온 몸을 검은 천으로 감싼 자였다.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한 그를 내려다보며 이케르는 입을 열었다. 엘리시아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무감정한 말투였다.
“밖에 누군가 있나?”
“지금은 없습니다만 약 한 시각 전에 2황자의 심복들이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2황자의 심복들?”
이케르가 눈살을 찌푸리자 후안은 고개를 숙인 채 나직하게 답했다.
“예.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라…….”
헤리스 부작용에 시달리던 후작과 황궁 복도를 돌아다니던 2황자의 심복들. 그것이 과연 우연이었을까.
무엇보다 2황자가 엘리시아에게 끊임없이 집적대고 있다는 건 그도 잘 아는 사실이었다.
이케르의 금안이 순간 시리게 빛났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프란이 움찔했을 정도였다.
“하마터면 미친개에게 물릴 뻔했군.”
이케르는 자신의 품 안에 안겨 있는 엘리시아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를 잡아챈 걸 천운이라 여겨야 할 거야, 엘리.”
아무것도 모르고 무방비하게 잠든 그녀를 보고 있으니 서늘하게 굳어졌던 그의 입매가 이내 부드러워졌다.
“공작저로 돌아간다. 마차를 대기시키도록. 그리고 주치의에게 연락해 피임약을 준비하라고 해라.”
자신의 주인에게서 나올 거라 생각지 못했던 단어에 당황한 프란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지만 주인과 눈이 마주치자 그는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다행히도 주인은 화내지 않았다.
“내일 아침까지 내 집무실로 가져오도록.”
“예, 주군.”
프란은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나타날 때처럼 허공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원치 않는 임신을 하게 할 수야 없지.”
나직하게 중얼거린 이케르는 엘리시아를 안아 들고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