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뒤섞인 두 개의 거친 숨이 허공으로 빠르게 흩어나갔다.
엘리시아의 위에서 움직이는 사내는 그야말로 짐승 같았다. 체력이 무한하기라도 한 건지 조금의 쉴 틈도 없이 그녀를 몰아붙였다.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엘리시아의 목에 얼굴을 묻고서 거친 호흡을 토해내던 사내가 숨을 고르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만족감에 늘어져 있던 엘리시아의 시선이 그를 따라 움직였다. 지금까지 느꼈던 것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강렬한 쾌감을 준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서였다.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그녀의 두 눈이 사내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부릅떠졌다.
신이 정성 들여 빚은 것 같은 조각 같은 외모, 그리고 그녀를 담고 있는 강렬한 금안.
자신의 몸 위에 있는 사내가 누구인지 깨달은 엘리시아는 너무 놀라 눈을 번쩍 떴다.
“헉!”
얼마나 놀랐던지 단번에 초점을 찾은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정신없이 굴렀다.
악몽도 이런 악몽이 없었다.
많고 많은 사내 중에 하필이면 상대가 데이모스 공작이라니. 평소 공작을 보고 욕정을 느낀 적도 없는데 이게 웬 개꿈이란 말인가.
그나마 꿈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손을 들어 올려 이마로 가져가려던 엘리시아는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선명해진 시야에 들어온 천장은 그녀의 방 천장과 완전히 다른 모양이었다.
“……!”
놀란 엘리시아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용수철이라도 단 것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녀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끄으으으으…….”
웬만해서는 끄떡도 없는 그녀의 몸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근육통이라도 온 것처럼 쑤시지 않는 곳이 없었다.
“침대에서 몇 라운드라도 뛰었나, 왜 이리 몸이 쑤셔…….”
예쁜 얼굴을 찡그리며 투덜대던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아무래도 뛰었나가 아니라 뛴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하복부에 느껴지는 이질감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어느 놈과?’
자신이 누군가와 뒹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개꿈이라고 치부했던 것과 함께 몇 가지 영상이 더 추가되어 떠올랐다.
침대 머리 장식에 손목이 묶인 사내가 그녀를 난처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조각같이 수려한 얼굴은 둘째 치더라도 황금을 짜 넣은 듯한 눈동자는…….
[곤란한 상황인 것 같은데, 필요하다면 한 번 더 빌려주겠네.]
이케르의 목소리까지 떠오르자 엘리시아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침대에 그대로 머리를 박았다.
“이런 망할……!”
아무리 급했다고 하지만 하필 왜 데이모스 공작이란 말인가. 더구나 그에게 먼저 몸으로 달려든 건 그녀였다.
“……트리엘 이 새끼, 기필코 죽여 버리고 만다.”
거듭되던 키스로 인해 아직까지 부어있는 엘리시아의 붉은 입술 사이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어제저녁, 그녀가 먹고 마신 음식들 중 하르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그녀에게 건네졌던 칵테일 한 잔.
그걸 건넨 자가 계속해서 추파를 던지던 트리엘 남작이라는 것이 찝찝하기는 했지만 설마 황실 연회에서 무슨 짓을 했을까 싶었다. 그런데 정말로 헤리스가 사용된 칵테일을 가져왔을 줄이야.
엘리시아는 이를 바득 갈았다.
그녀가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트리엘 남작이 그랬는지는 일단 제쳐두더라도, 하르가 시키는 대로 아무것이나 주워 마시지 않았다면 이런 환장할 사태에 직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를 우습게 봤다가 당한 것에 대한 쪽팔림과 분노가 물밀 듯이 밀려 들어와 그 속에서 그녀는 한동안 허우적거렸다.
그 모든 감정이 지나가고 나자 찾아온 것은 뒷수습에 대한 걱정이었다.
“젠장, 다른 사람도 아니고…….”
스스로를 벌주듯 침대에 머리를 쿵쿵 박고 있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이마가 침대 매트리스가 아니라 따뜻한 무엇인가에 막히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웃음기 어린 부드러운 저음이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
“아무래도 머리를 박는 건 침대 위에서의 습관인가 보군. 의회장에서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이케르……?”
바로 눈앞에 나타난 황금빛 눈동자에 놀라서일까. 엘리시아는 평소 사용하던 호칭 대신 밤새도록 쾌락에 취해 불러댔던 상대의 이름을 저도 모르게 내뱉어버렸다.
“그래도 내 이름은 잊어버리지 않은 모양이군.”
“……!”
부드럽게 휘어진 금안이 너무나도 낯설어 멍하니 눈앞의 사내를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화들짝 놀랐다. 자신이 그를 이름으로 불렀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짙은 바이올렛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이케르는 그녀의 이마에서 손을 뗐다.
“자해는 좋지 않아, 엘리. 그 습관은 고치는 것이 좋겠어.”
에, 엘리?
이케르의 입에서 자연스레 흘러나온 애칭은 잠시 탈주했던 엘리시아의 정신을 순식간에 제자리로 돌려놓았다.
자신이 그를 이름으로 부른 것은 실수니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웬 애칭이란 말인가.
공작이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닌가 하는 의심에 엘리시아의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각하, 죄송하지만 각하와 제가 서로를 애칭으로 부르던 사이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애써 침착을 가장하며 입을 연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팍삭 쉬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긴 그렇게 교성을 질러대고 울어댔는데 쉬지 않은 게 이상하긴 했다.
“그런가? 어젯밤에 그렇게 불러도 된다고 허락해서 앞으로도 괜찮은 줄 알았네만.”
“……제가 말입니까?”
“그대 말고 누가 내게 그대의 애칭을 허락해 줄 수 있지?”
“…….”
너무나도 담담하게 답해오는 이케르를 보면서 엘리시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내내 그가 자신을 엘리라 불렀던 것 같기도 했다.
그녀는 머리가 지끈거리다 못해 아픈 것을 느꼈다.
태어나서 지금처럼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 대체 이 난관을 어떻게 탈출해야 한단 말인가.
달아날 방법을 찾아 끙끙거리던 그녀에게 광명처럼 한 줄기 빛이 찾아들었다.
단편적으로 떠오르는 낯 뜨거운 기억들 속에서 이케르가 그녀에게 했던 약속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약속했었다. 지난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약점으로 삼지 않겠다고.
얼굴에 화색이 돈 그녀는 이케르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각하, 어젯밤 저와 했던 약속 기억하십니까?”
데이모스 공작이 약속을 칼같이 지킨다는 건 귀족들 사이에서도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 정신없는 와중에도 약속을 받아내지 않았던가.
엘리시아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물론 기억하고 있네, 엘리.”
바로 들려오는 이케르의 대답에 안도감을 느끼며 입꼬리를 끌어올리던 엘리시아의 얼굴이 도로 구겨졌다.
또다시 뒤에 달라붙은 애칭 때문이었다.
“그…… 각하. 어젯밤이야 상황이 그러니 그랬다 치더라도 계속해서 제 애칭을 부르시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애칭은 어떤 경우에 부르는 건지 각하께서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귀족 남녀 사이에서 애칭을 부를 수 있는 경우는 몇 가지로 정해져 있었다. 부부 또는 가족이거나 가족처럼 친한 사이, 그리고 연인.
그러니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이케르가 그녀를 애칭으로 부르는 것은 옳지 않은 일이었다.
“그런가? 실례가 됐다면 미안하군, 후작.”
이케르는 그녀의 말을 이해했는지 바로 호칭을 변경해주었다.
아무리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해도 누구보다 예법을 잘 아는 그가, 지적하기 전까지 애칭으로 불렀다는 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엘리시아는 일단 만족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그녀가 그에게 저지른 짓이 있지 않은가.
“그리고 어젯밤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칵테일을 잘못 마시는 바람에 실례를 했던 것 같습니다.”
호칭이 바뀌자 그녀는 곧바로 이케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멱살을 잡은 것으로도 부족해 침대에 묶고 멋대로 몸까지 취했으니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한소리 들을 거라 생각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엘리시아는 눈앞에 작은 갈색 병 하나가 들이밀어 지자 놀라 눈을 깜빡였다.
“일단 마시게, 후작.”
“……뭡니까, 이건?”
마시란다고 뭔지도 모르고 마실 수는 없었다.
엘리시아의 경계 어린 눈빛에 이케르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내 주치의가 만든 피임약이라네. 몸에 무리를 주지 않으니 안심하고 마셔도 된다고 하더군.”
엘리시아는 그가 내밀고 있는 피임약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멍해졌다.
지금까지 그녀와 만났던 남자 중 이렇게 직접 피임약을 챙겨준 남자는 없었다. 묘한 기분을 느끼며 그녀는 손을 뻗어 약병을 잡았다.
그 과정에서 서로의 손가락이 스치자 묘한 전율이 엘리시아의 등골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몸 구석구석을 쓰다듬고 만졌던 그…….
역시 미친 거야.
잠깐 접촉했다고 반응하는 자신의 몸에 욕설을 내뱉으며 엘리시아는 갈색 병의 마개를 뽑고 한 번에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평소 그녀의 주치의가 만들어준 것보다 좀 더 향긋하고 목 넘김이 좋았다.
“음? 이거 맛있네?”
엘리시아는 입안에 감도는 달콤함에 혀를 내밀어 입술에 묻은 약을 핥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아주 잠깐 나왔다 사라지는 그녀의 붉은 혀를 쳐다보는 이케르의 금안이 짙어졌다는 걸.
“약이 맛있다는 말은 처음 들어보는군. 후작이 배고파서 그런 건 아닐까?”
“제가요?”
“정오가 다 되어 가니까. 아침 식사도 건너뛰고 잤으니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네만.”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고? 눈을 깜빡이던 엘리시아는 창문 쪽을 쳐다보았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기는 하지만 사이사이 새어 들어오는 빛이 환한 걸 보니 정말 그런 듯했다.
“이런! 오늘 오전에 회의가 있었는데……!”
아, 망했다…….
그녀는 이케르의 조언도 잊어버리고 다시 침대 매트리스에 머리를 박았다.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조세를 올리는 문제에 대해 황궁에서 회의가 있었다. 그래서 어제 술을 최대한 자제해서 마시지 않았던가. 그놈의 칵테일을 먹어서 망해버렸지만.
후작위를 승계받은 후 엘리시아가 회의에 빠진 것은 처음이었다.
역시나 트리엘 남작을 죽여 버려야겠다고 이를 갈던 그녀는 문득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응? 그런데 저 인간은 왜 여기 있어?’
생각해보니 오전 회의에 참석해야 하는 것은 그녀만이 아니었다. 데이모스 공작 역시 황제파의 수장으로서 참석해야만 했다.
엘리시아는 고개를 들고 이케르에게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그…… 각하께서는 왜 여기 계십니까? 오늘 오전에 회의가…….”
“내일로 연기되었네.”
“연기요?”
“그렇다고 하더군. 그러니 걱정할 것 없네. 그보다 뭘 좀 먹는 것이 좋겠어. 얼굴이 핼쑥해.”
“아니, 괜찮…….”
그녀가 사양하기도 전에 이케르는 침대로 다가와 침대 옆에 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시녀가 들어왔다.
“아침 식사를 가져와. 속에 부담이 없는 거로.”
식사?
이케르가 시녀에게 지시하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이 상황이 하하 호호 웃으며 아침 식사할 상황이던가.
시녀가 방을 빠져나가기 전에 말려야 한다는 생각에 체면이고 뭐고 다 잊고 그녀는 다급히 외쳤다.
“가, 각하!”
“왜 그러나, 후작.”
엘리시아가 부르자마자 이케르가 바로 돌아보았다. 반응이 너무 빨라 도리어 부른 그녀가 당혹함을 느낄 정도였다.
“그…… 배려는 감사하나 아침 식사는 괜찮습니다.”
“원래 아침은 거르는 편인가?
“아, 네, 뭐, 그런 편이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아침 식사만큼은 꼭 챙겨 먹는 엘리시아였지만 그 사실을 공작에게 말할 생각은 없었다.
물론 어젯밤 무리한 밤일로 인해 뱃가죽이 등가죽에 붙었다고 생각될 정도로 허기가 느껴지는 건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덮친 남자의 집에서 밥을 얻어먹는다? 그것도 친하기는커녕 정적이나 다름없는 남자의 집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녀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