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식사야 후작저에 돌아가서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올려다보았다.
“곧 점심시간이니 돌아가서 먹으면 됩니다. 신경 쓰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각하.”
“……그런가? 어쩔 수 없지.”
엘리시아는 이케르가 순순히 시녀를 내보내자 보이지 않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한시라도 빨리 후작저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침대에서 내려오기 위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졌다.
‘지금 내가 뭘 입고 있는 거지?’
옷은 그녀의 허벅지 중간까지밖에 오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야 느낀 것이지만 무척이나 헐렁했다. 게다가 옷 중앙에 달린 단추들은…….
자신이 남성용 셔츠를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엘리시아의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굴렀다. 이 상황에서 남성용이라면 한 사람 것밖에 없지 않은가.
그녀의 시선이 이케르에게로 향하자 그는 덤덤하게 답해왔다.
“드레스의 얼룩이 심해 어쩔 수가 없었네.”
무슨 얼룩인지는 묻지 않아도 짐작이 갔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은 엘리시아는 헐렁한 소매를 들어 보였다.
“그럼 이 옷은……?”
“옷이 마땅치 않아 내 옷을 입혔다네. 공작저에 여자 옷이라고는 시녀들 옷밖에 없더군.”
그냥 시녀 옷을 입히시지 그러셨습니까! 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엘리시아는 꾹 눌러 참았다. 어쨌든 지금 죄를 지은 건 그녀 쪽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이케르의 말에 그녀는 화들짝 놀랐다.
“원한다면 디자이너를 불러주지. 바로 입을 만한 옷 정도는 가지고 올 수 있을 거야.”
디자이너? 이 남자가 지금 제정신인가? 동네방네 소문낼 일 있어?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선 엘리시아의 눈매가 치켜 올라갔다.
“미치셨습니까?!”
성격을 이기지 못하고 저질러버린 그녀가 뒤늦게 후회했지만 이미 말은 그녀의 입을 타고 흘러 나가버린 뒤였다.
당연히 상대가 화를 낼 거라 생각했다. 배려해서 한 말에 미친 거 아니냐고 했으니 화를 내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이케르의 반응은 그녀가 예상한 것과 달랐다. 그는 여전히 부드러움이 깃든 금안으로 그녀를 보며 느릿하게 답했다.
“아직 미치지는 않았네만, 후작.”
“아, 그게…. 죄송합니다. 디자이너를 부르면 아무리 입을 잘 막아도 소문이 날 것 같아서…….”
“음, 그렇군.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어.”
뭐야? 이 남자. 성인군자야? 왜 화를 안 내?
당혹감에 젖은 엘리시아는 눈앞의 사내를 이계의 생물 보듯 쳐다보았다.
그녀가 하는 말은 다 들어주는 데다 욕을 해도 화내지 않으니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 보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르지 않은가.
물론 의회장에서도 쏘아붙이는 쪽은 대부분 엘리시아 쪽이고 눈앞의 남자는 묵묵히 듣고 있는 편이었다. 하지만 뒤에 가서는 꼭 반박하기 어려운 논리로 치고 나와 상황을 역전시키는 것이 그의 화법이었다.
솔직히 지금 같은 경우도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그녀가 과하게 말한 것은 사실이니까.
그런데 이런 온화한 반응이라니. 헤리스의 부작용은 아무래도 그녀가 아니라 공작에게 나타난 것 같았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고개를 휘휘 저은 엘리시아는 재빨리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문제는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자신의 저택인 후작저까지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제국 최고의 인기남이라 불리는 데이모스 공작이다 보니 공작가 주변에 항상 파파라치들이 잠복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후작저에도 마찬가지로 붙박이들이 있었으니까.
평소에는 2황자에게 보이기 위해 파파라치 앞에서도 당당하게 남자들을 끼고 다녔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귀족파 수장인 그녀가 연회 다음날 아침에 황제파 수장인 데이모스 공작의 저택에서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난리 날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그녀를 따르는 귀족들이야 어떻게 잘 얼버무려 넘어간다 해도 라세트 공작과 그 측근들이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2황자도 마찬가지이고.
그러니 어떻게든 비밀리에 후작저까지 돌아가야만 했다.
‘시녀복은 안 돼. 머리카락을 감출 수 없으니 들킬 수가 있어. 역시 그걸로 가야 하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엘리시아는 이케르를 흘깃 쳐다보았다. 솔직히 지금의 모습과 의회장에서 봤던 모습 사이에는 큰 괴리감이 있었다.
의회장에서의 그는 무뚝뚝한 데다가 냉철하게만 보였는데 지금은 그녀가 하려는 부탁 정도는 들어줄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엘리시아는 잠시 망설이다 그를 불렀다.
“각하.”
“왜 그러나, 후작.”
역시나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금안은 이상하리만큼 부드러웠다.
‘설마 하룻밤 보냈다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그런 남자들은 많았다. 몸을 섞고 나면 마치 자신의 여자라도 된 것처럼 행동하는 남자들 말이다.
살짝 눈을 가늘게 뜨고 이케르를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지 않은가.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는 다른 사람도 아닌 데이모스 공작이었다.
‘그랬다면 아까 애칭을 부르지 못하게 했을 때 기분 나쁜 내색을 했겠지.’
제멋대로 판단하고 안심한 그녀는 뻔뻔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혹시 제게 맞는 시종 옷을 얻을 수 있을까요?”
“시종 옷? 후작저로 돌아가는 것이 걱정되어 그러는 건가?”
어머, 눈치도 빠르시지.
엘리시아는 자신의 의도를 바로 알아차린 공작을 속으로 칭찬하며 답했다.
“네, 시녀 옷은 아무래도 들키기 쉬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각하께서도 저와 얽혀서 신문 1면에 기사가 나면 곤란하실 것 아닙니까.”
“난 상관없네만, 후작이 신경 쓰인다면 그렇게 하게.”
네? 아니 왜 상관이 없습니까? 지금 자신의 위치를 고려하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엘리시아는 또다시 입안에서 미쳐 날뛰려는 말을 꾹 눌러 집어삼켰다. 이 남자가 대체 왜 이러나 싶었지만, 여하튼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시종 옷…… .”
“하지만 시종 옷은 안 돼. 내 옷을 빌려주지.”
“각하의 옷이요?”
엘리시아는 자신이 입고 있는 셔츠를 내려다보다가 팔을 들었다. 그와 그녀의 키 차이가 나다 보니 소매 끝은 그녀의 손을 다 덮고도 남아서 펄럭이고 있었다.
“……지금 상태가 이렇습니다만.”
매우 부정적인 표정으로 그녀가 남아도는 소매 끝을 펄럭이자 이케르의 입꼬리가 살짝 위로 올라갔다.
“좀 크긴 하군.”
“좀… 이 아니라 많이 입니다만.”
“걱정 말게, 후작. 시녀 중에 바느질을 잘하는 아이가 있으니, 디자이너를 부르는 것이 걱정된다면 그 시녀를 불러 그대의 몸에 내 옷을 맞춰보라고 하지.”
“아니, 그냥 시종 옷을…….”
그녀가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이케르는 침대 옆에 매달린 줄을 다시 잡아당겼다.
‘아니 무슨 인간이 이럴 때만 동작이 빨라!’
말리지도 못한 채 입만 뻐끔뻐끔하던 엘리시아는 그녀를 돌아본 공작의 말에 완전히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니 옷을 수선하는 동안 아침 식사는 어떤가, 후작?”
⚜ ⚜ ⚜
엘리시아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아침 식사를 차리는 시녀를 쳐다보았다.
음식을 실은 트롤리가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당연히 혼자 먹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창가 옆 테이블 위에 놓이기 시작한 음식들은 모두 두 접시씩이었다.
양이 많은 것 하나, 그리고 적은 것 하나.
‘설마 각하께서 나랑 같이 드시려는 건가?’
그녀가 당혹해하고 있는 사이 음식을 모두 차린 시녀는 자신의 주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방을 나갔다.
“내려오게.”
엘리시아는 자신의 눈앞에 내밀어진 이케르의 손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어쩌다가 자신이 덮친 남자의 집에서 함께 아침밥을 먹는 상황이 되었단 말인가.
난감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호의를 무시할 수도 없어 엘리시아는 머뭇거리다가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을 잡고 바닥에 내려서는 순간 그녀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하복부에 밀려든 것이다.
‘하긴 어제 그렇게 굴렀는데 괜찮을 리가 없지. 웬만한 크기도 아니었고.’
부작용이 무섭기는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렇게 부담스러운 것을 품어낸 것을 보면. 그것도 위에 올라타서.
역시 인체는 신비롭다고 엘리시아가 생각하고 있을 때 그녀의 귓가에 저음의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괜찮은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들려온 묵직한 목소리에 그녀의 몸이 움찔했다. 목 뒤의 솜털이 쭈뼛 서는 것 같았다.
여운이 지금까지 남았을 리가 없는데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몸을 탓하며 엘리시아는 애써 태연하게 답했다.
“괜찮습니다. 신경 쓰시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군. 이쪽으로 앉게.”
“감사합니다.”
이케르가 빼준 의자에 앉은 엘리시아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로 걸어가 앉는 그를 쳐다보았다.
돌아올 대답을 알면서도 그녀는 혹시나 하는 희망을 버리지 못해 슬쩍 물었다.
“실례지만 각하께서도 저와 같이 식사하시는 겁니까?”
“그럴까 하네만. 혹시 부담스러운가?”
네, 그럼요. 엄청 부담스럽지요.
혀끝에 맴도는 말을 차마 입 밖으로 내놓지 못하고 엘리시아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지은 죄가 있는 이상 어느 정도는 상대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가 있었다.
“그럴 리가요. 함께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군. 부작용 이후의 증상은 몰라서 일단 부드러운 음식들로 준비하라고 했네.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양 말고 들게.”
먼저 식사를 시작하라는 이케르의 손짓에 엘리시아는 어쩔 수 없이 스푼을 집어 들었다.
‘조금만 먹는 거야. 인사치레로 조금만.’
몇 번이고 속으로 다짐하며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은 엘리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었다. 그것도 무척이나.
이런 부담스러운 상황에서도 맛을 느껴버리는 자신의 미각이 원망스러운 것도 잠시, 어느새 그녀의 스푼은 또다시 수프를 한가득 떠올리고 있었다.
어젯밤 무리한 몸은 열량을 필요로 했고 달라붙은 뱃가죽은 주인의 의지를 무시했다.
수프는 담백하고 고소했으며, 빵은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샐러드는 또 어떠한가. 싱싱한 어린 채소 위에 뿌려진 소스는 왜 이리 상큼한지.
카멜리아 후작가의 주방장도 제국 내에서는 손꼽히는 실력이라 생각했는데 공작가 주방장이 한 수 위였다. 공작가의 주방장을 스카우트해 오고 싶을 정도였다.
그녀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앞에 놓인 접시가 모두 말끔하게 비워진 뒤였다.
“배가 정말 많이 고팠나 보군. 내 것이라도 더 먹을 텐가.”
접시와 그녀를 번갈아 쳐다보며 말하는 공작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아래엔 웃음기가 깔려 있었다.
‘젠장…….’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정신없이 흔들렸다. 삽이 손에 있다면 당장이라도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 그녀는 손을 들어 달아오른 얼굴을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