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창가에 기대선 이케르의 시선이 저택을 나서는 한 청년에게 머물렀다. 정확히 말하자면 청년의 모습을 한 엘리시아였다.
그의 옷을 몸에 맞게 수선하고 모자까지 푹 눌러쓴 그녀의 모습은 제법 그럴듯해서 멀리서 볼 때는 여자라는 것이 조금도 티 나지 않았다.
그녀를 계속해서 지켜보던 이케르는 그녀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시선을 내렸다.
불현듯 자신의 셔츠를 입은 그녀가 길어서 축 늘어진 팔을 흔들던 모습을 떠올렸다.
좀 길다는 그의 말에 많이 길다고 하며 황당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어찌나 귀엽던지. 세상에 저렇게 사랑스러운 생물체도 있었구나 싶을 정도였다.
“아무래도 내 눈에 콩깍지라는 게 씌워진 모양이야.”
이케르는 피식 웃었다.
누군가를 사랑스럽기는커녕 귀엽다고 생각한 적도 없던 그였다. 그런데 엘리시아가 하는 행동은 무엇이든 예쁘게 보였다. 심지어 밥 먹는 모습조차.
물론 그전에도 의회장에서 끝까지 의견을 굽히지 않는 그녀가 예쁘다고는 생각했었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지금 같아서는 그녀가 해달라는 것이라면 뭐든지 해줄 것 같았다.
“문제는 엘리가 나를 남자로 보지 않는다는 건데….”
그녀가 그러는 이유는 잘 알고 있었다. 황제파의 수장인 자신과 얽히고 싶지 않은 거겠지. 스캔들이 나게 되면 피곤해지는 건 자신보다 엘리시아 쪽이니까.
‘2황자 쪽에서도 가만히 있지 않을 테고.’
과거의 귀족파는 지금처럼 특정한 누군가를 지지하고 있지 않았다.
귀족들의 이권을 중시하기는 했지만 황권이 지나치게 강해지지 않도록 견제하고, 황제파와의 상호 토론을 통해 제국의 부흥에 도움이 되는 안건들을 만들어 내는 데 힘을 쏟았었다.
그런데 라세트 공작가가 합류하면서부터 분위기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귀족파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라세트 공작가가 대놓고 2황자를 지지하기 시작한 것이다.
당연히 반발이 뒤따랐다. 그리고 그 가문들의 중심에는 귀족파의 수장인 카멜리아 후작가가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반발은 사그라지고 대부분의 귀족 가문들이 입을 다물었다.
카멜리아 후작이 불의의 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구심점이 사라지자 귀족 가문들이 흩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렇게 귀족파는 2황자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바뀌어버렸다. 황제파와 사이가 나빠진 것도 그때부터였다.
이케르는 엘리시아의 어머니인 전대 카멜리아 후작과의 마지막 만남을 떠올렸다.
마차 사고로 인해 카멜리아 후작이 부군과 함께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지 않았다면 지금 자신과 엘리시아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라세트 공작가의 움직임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던 전대 카멜리아 후작은 귀족파의 수장 자리에서 내려와 중립으로 돌아설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위해 그녀는 이케르에게 손을 내밀었었고 그 역시 그 손을 잡았었다.
이케르가 후작 부부의 죽음을 사고사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런 중대한 발표를 바로 코앞에 두고서 갑작스러운 마차 사고를 당한다는 것이.
졸지에 가주를 잃어버린 카멜리아 후작가는 그 이후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후작위가 외동딸인 엘리시아 카멜리아에게 승계되었다는 소식뿐이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후 엘리시아가 카멜리아 후작이자 귀족파의 수장으로서 처음 의회에 모습을 나타냈다.
높게 올려 묶은 붉은 머리카락, 고양이처럼 매혹적으로 치켜 올라간 눈매, 그 속에서 당당하게 빛나던 짙은 보랏빛 눈동자.
처음으로 의회장에 들어선, 이제 막 성인이 된 젊은 여자가 조금의 주눅도 들지 않고 당돌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던 모습은 지금까지도 그의 뇌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어쩌면 그때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자꾸만 그녀에게 시선이 가게 된 것은.
그녀에 대한 관심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깊어졌다. 그리고 어느새 그녀와의 첨예한 의견대립조차 즐겁게 느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엘리시아는 무조건 귀족파의 입장에서 우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지만 제국민을 위하는 정책처럼 보이면, 반대하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물러서곤 했다. 자신들의 잇속만 챙기려는 귀족파의 귀족들과는 묘하게 다른 태도였다.
‘그런 걸 보면 2황자나 귀족파의 행태를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지는 않단 말이지…….’
그는 엘리시아가 귀족파의 수장으로 2황자의 옆에 있는 것이 이유가 있어서라고 추측하고 있었다.
아마도 부모의 사망 후 무너져 내린 카멜리아 후작가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이리라.
그렇기에 이케르는 우연히 잡은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개인적인 접점이 없어 엘리시아에게 다가설 수 없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가능했다. 그러니 그녀를 지켜보면서 필요할 때 힘이 되어줄 수도 있을 것이다.
문득 그는 전대 카멜리아 후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다행이군요, 데이모스 공작가와 우리 카멜리아 후작가가 정적이 되지 않아서. 나중에 내 딸, 미래의 카멜리아 후작과도 만나보도록 해요. 아마도 그대는 내 딸에게 푹 빠지게 될 겁니다.]
그때만 해도 딸을 너무나 사랑하는 엄마의 근거 없는 자신감이라고만 여겼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아침 식사를 거절하던 엘리시아의 모습을 떠올린 이케르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두 번 다 거절했던 그녀는 옷 수선에 한 시간 정도 걸린다는 시녀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식사 제안을 수락했다. 세 번째 권유였다.
물론 그녀는 몰랐을 것이다. 그녀와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싶어 먹지 않고 기다렸다는 걸.
그의 몫까지 포함된 아침 식사가 차려지자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던 그 모습이 얼마나 귀엽던지. 앞에 차려진 음식을 다 비우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으며 신음을 흘리던 모습은 또 어떻던가.
평소 무뚝뚝한 사내의 입가에 어렸던 보기 드문 미소는 노크 소리와 함께 환상처럼 사라졌다.
“각하, 프란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으며 이케르는 창을 등지고 섰다. 프란은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주인 앞에 부복했다.
“그녀는?”
이케르의 물음에 프란은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무사히 마차에 타시는 것 확인했습니다.”
“의심은 하지 않던가?”
“예, 운 좋게 지나가던 마차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자는?”
“그분에게 잠시 관심을 보이기는 했으나 다행히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습니다. 공작저를 방문한 사람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군.”
나직하게 중얼거린 이케르는 몸을 살짝 돌려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정문 밖을 배회하는 남자에게 머물러 있었다.
공작저 근처에는 ‘미친 들개’라 불리는 파파라치가 거의 매일같이 상주하고 있었다.
한번 기삿감을 잡으면 절대 놓치지 않고 끝까지 쫓아가 파헤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었다.
만약 그가 엘리시아의 정체를 알아챘다면 내일 신문 1면은 보지 않아도 어떤 내용으로 채워질지 눈에 훤했다.
‘그리고 그녀는 화를 내며 펄펄 뛰겠지.’
그녀가 신경 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긴다면 최대한 덮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해놔야겠다고 생각하던 이케르는 프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각하, 황궁에서 황궁의를 보내왔습니다.”
“황궁의를?”
이케르의 짙은 눈썹이 살짝 찡그려졌다. 몸이 좋지 않아 오늘 의회 참석이 어려울 것 같다고 했을 뿐인데 황궁의라니.
불편한 주군의 심정을 눈치챈 프란이 재빨리 덧붙였다.
“황궁의의 말에 따르면 폐하께서 무척이나 걱정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아무래도 각하께서 병가를 내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니까요. 황궁의는 어제 폐하가 내리신 이국의 술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듯했습니다.”
이국의 술 때문이라. 이케르는 팔짱을 낀 채 인정하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술을 마시지 않았더라면 엘리시아에게 멱살을 잡히지도 않았을 거고 그녀와의 하룻밤도 보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그녀는 그가 아닌 딴 사내와 뜨거운 밤을 보냈겠지. 아니 어쩌면 들개에게 대차게 물렸을지도 몰랐다.
“내키진 않지만 이번만큼은 폐하께 감사해야겠군.”
피식 웃은 이케르는 기대있던 창가에서 몸을 떼었다. 귀찮기는 하지만 의회를 연기시킨 대가를 치르러 갈 시간이었다.
⚜ ⚜ ⚜
엘리시아는 카멜리아 후작저에서 좀 떨어진 곳에 마차를 세우게 했다. 정문 앞까지 타고가면 좋겠지만 그랬다가는 파파라치들의 관심을 끌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잠시 창문을 통해 후작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오전이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숨어 있던 파파라치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그녀는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쓰고 있던 모자를 더 깊숙이 눌러썼다.
마차에서 내린 그녀는 후작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걸을 때마다 욱신거리는 감은 있었지만 그럭저럭 참을 만했다.
5분 정도 걸었을까, 기사들이 지키고 서 있는 정문이 눈에 들어오자 엘리시아는 안도의 눈빛을 떠올렸다. 저 문만 통과하면 더 이상 문제 될 것은 없었다.
조금 더 발걸음을 재촉하던 그녀의 몸이 순간 휘청했다. 갑자기 튀어나온 남자와 부딪친 것이다.
넘어지지는 않았지만 쓰고 있던 모자가 벗겨져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당황한 엘리시아는 급히 모자를 집어 들고 눌러썼다. 흙을 털어낼 여유조차 없었다.
다시 모자로 얼굴을 가린 그녀는 남자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아이쿠, 이거 죄송합니다. 너무 급하다 보니 미처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과장될 정도로 허리를 굽신거리며 그녀에게 사과했다.
엘리시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느낌의 남자였다.
어쩌면 최근에 온 파파라치나 신문사의 기자 같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다그쳐 물을 수도 없었다. 그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었으니까.
“……괜찮습니다.”
목소리를 최대한 낮춰 남자처럼 대답한 그녀는 재빨리 몸을 돌렸다. 등 뒤로 시선이 달라붙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만에 하나 파파라치 또는 신문사의 기자라 하더라도 그녀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할 것이다. 어딘가 몰래 다녀왔다고만 생각하겠지.
재수 없으면 신문에 남자 복장을 한 모습이 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정문을 통과해 기사들이 불러준 마차를 타고 저택에 도착한 그녀는 응접실에 도착하자마자 쓰고 있던 모자를 내던졌다.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 짜증나게.”
엘리시아는 소파로 비척거리며 걸어가 털썩 드러누웠다. 피곤해서인지 온몸이 알아서 축 늘어졌다.
멍하게 누워있던 것도 잠시 공작저에서의 기억이 떠오르자 엘리시아는 얼굴을 팍삭 일그러트렸다.
아무리 배가 고팠어도 그렇지 그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공작의 끊임없는 권유에 결국 그녀는 넘어가고 말았다.
그의 권유를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정말 조금만 먹을 생각이었다. 이미 했던 말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 결심은 수프와 빵, 샐러드를 입에 대는 순간 씻은 듯 사라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앞에 놓인 접시들을 모두 말끔하게 비운 후였다.
[배가 정말 많이 고팠나 보군. 내 것이라도 더 먹을 텐가.]
웃음기 어린 이케르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엘리시아는 두 손을 들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덮었다.
“분명 비웃은 거야. 그래, 웃기겠지! 안 먹는다고 해놓고 접시를 싹싹 비웠으니!”
황제파 수장인 공작에게 밀리지 않으려고 날을 세워온 것이 무려 2년이었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그동안 지켜왔던 모든 체면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쪽팔림과 짜증을 참지 못하고 엘리시아가 침대에서나 하는 이불킥을 허공에 대고 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등 뒤에서 냉랭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