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드디어 미치신 겁니까?”
허공에 대고 휘적거리던 팔과 다리가 멈췄다. 용수철이라도 단 것처럼 벌떡 일어나 앉은 엘리시아는 휙 소리가 나게 고개를 돌리며 반박했다.
“안 미쳤거든?”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그녀의 보좌관이자 오랜 소꿉친구인 루리엔 스펜서가 서 있었다.
턱 바로 아래까지 내려오는 금빛 머리카락은 공들여 손질한 듯 잘 정리되어 있었고, 새하얀 블라우스와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는 주름 하나 없이 단정했다.
소파에서 구르느라 옷이 볼품없이 구겨진 엘리시아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루리엔은 쓰고 있던 안경을 추켜 올리며 자신의 친구이자 고용주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아, 미치셨다고요. 하긴 제정신이셨다면 무단 외박 같은 건 하지 않으셨겠지요.”
그녀의 말투는 정중하기 그지없었지만 내용은 살벌 그 자체였다.
움찔한 엘리시아는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친우가 저렇게 존댓말을 쓸 때는 무조건 접고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아직 안 미쳤다니까? 그리고 무단 외박 아니거든? 사고야, 사고! 그 망할 트리엘 새끼가 감히……!”
“후작님? 새끼가 어느 나라 말일까요?”
“아니, 그 트리엘 자식이…….”
“후작님?”
“…….”
눈동자를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던 엘리시아가 조개같이 입을 딱 다물자 루리엔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리 후작님께서는 어떻게 날이 가면 갈수록 말이 험해지시는 걸까요? 예전에는 참 예쁜 말, 고운 말만 쓰시던 분인데 말이에요. 미치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지를 않나…….”
“그거야 이 세상이 험하…….”
“세상이 험한 건지 우리 후작님께서 험해진 건지. 무단 외박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바르고 고운 말에 대해서 먼저 이야기를 나눠보실까요?”
엘리시아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루리엔은 결코 화를 내지는 않지만 조곤조곤하게 말로 죽이는 스타일이었다. 지난번에도 단어 하나 잘못 썼다가 얼마나 구박을 당했었던가.
“루, 루리엔, 내가 잘…….”
“난 무단 외박부터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뒤쪽에서 음산할 정도로 가라앉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온 건지 짙푸른 머리카락의 미남자가 엘리시아의 뒤에 서 있었다.
‘이런 망할.’
엘리시아는 예쁜 얼굴을 팍삭 구겼다.
조금 전 나타난 남자, 하르 테스케는 루리엔과 마찬가지로 엘리시아의 오랜 소꿉친구이자 호위기사였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앞은 루리엔이요, 뒤는 하르라니. 이건 메가톤급 재앙이었다.
창백해진 그녀와 달리 루리엔은 싱긋 웃으며 여상하게 말을 건넸다.
“안녕, 하르. 이제 돌아온 거야?”
“아아, 어제 갑자기 사라진 누구누구님 때문에 말이지.”
으득 하고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은 기분 탓일까. 양쪽에서 폭격을 날리기 전에 엘리시아는 재빨리 두 손을 들어 올렸다.
“내가 잘못했어. 험한 말 쓴 것도 잘못했고 무단 외박도 잘못했어. 하지만 나도 억울하다고. 칵테일에 헤리스가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지. 너희도 연회 식재료 리스트 같이 확인했었잖아.”
그러니 한 번만 봐주라, 응?
엘리시아는 배시시 웃으며 애교부리듯 눈웃음을 살살 쳤다.
말로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잘 알기에 나름대로 최대한 먹힐 만한 방법을 쓴 것이었지만 그들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한 시간 뒤, 엘리시아는 너덜너덜해진 정신을 부여잡은 채 각서에 찍기 위해 인장을 들고 있었다. 각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카멜리아 후작가의 가주인 나 엘리시아 카멜리아는 오늘 이후 무단 외박을 하는 경우 보좌관 ‘루리엔 스펜서’와 호위기사 ‘하르 테스케’의 사직에 동의한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 옆에 차마 인장을 내리지 못하고 있자 루리엔이 선심 쓰듯 그녀의 손을 꼭 눌러 찍었다.
“루리엔, 진짜 이럴 거야?!”
방심하다 그대로 인장을 찍은 엘리시아가 발끈해 각서를 잡으려 했지만 이미 각서는 하르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무단 외박하지 않으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어려워?”
하르의 말에 엘리시아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그래도 미련이 남은 그녀는 낮게 구시렁거렸다.
“이번처럼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런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잖아. 그 정도는 예외 조항에…….”
“기각. 그래서 어제 술과 음료는 내가 가져다준 것만 마시라고 했지? 그런데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아무거나 냉큼 받아 드신 분이 누구더라?”
“설마 트리엘 그 자식이 가져온 칵테일에 헤리스가 들어있을 줄은 몰랐지.”
“그래서 말했잖아. 쥐새끼도 물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이번 일은 전적으로 네 부주의야, 엘리.”
“……젠장.”
두 사람에게 갈굼 당해 죽기 전에 짜증으로 먼저 죽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욕설을 나지막하게 내뱉었다. 아무래도 오늘 제대로 마가 낀 것 같았다.
‘이 모든 게 다 트리엘 그 자식 때문이야!’
고의인지 우연인지는 모르겠지만, 물론 그녀는 고의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트리엘 남작이 아니었다면 무단 외박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공작과 얽히지도 않았을 것이다.
루리엔과 하르에게 이렇게 폭격을 맞지도 않았겠지.
“……역시 없애 버려야겠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음산한 말이 흘러나오자 루리엔과 하르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래. 묻어버리는 거다. 목만 남기고 땅에 묻어버리면 되겠지.
엘리시아가 음산하게 웃기 시작하자 하르와 루리엔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너무 몰아세웠나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두 사람은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이 정도로 강하게 하지 않으면 들어먹을 인간이 아니었다. 저 엘리시아 카멜리아는.
“그래서 어제 누구랑 보냈어?”
한숨을 내쉰 루리엔의 물음에 엘리시아의 음산한 웃음이 뚝 끊겼다. 당혹감이 어린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천천히 자신의 친우이자 보좌관에게로 향했다.
“뭐?”
“상대가 누구였냐고.”
“…….”
엘리시아의 두 눈동자가 잘게 떨리다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입술에 풀이라도 바른 것처럼 입을 꾹 다문 그녀를 지켜보던 루리엔의 눈이 순식간에 가늘어졌다.
저 반응은 결코 같이 밤을 보내서는 안 되는 상대와 일을 쳤다는 소리였다.
옆에서 지켜보던 하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하는 표정으로 눈살을 찌푸린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의심이 짙게 깔린 낮은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귀에 파고들었다.
“너 설마 2황자 그 자식과 일 친 건…….”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미쳤어? 그 재수 없는 자식과 일을 치게!”
하르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엘리시아는 버럭 화를 냈다. 아무리 갖다 댈 인간이 없다 해도 2황자는 너무하지 않은가.
귀가 더러워졌다는 듯 양손을 들어 두 귀를 후벼 파는 그녀의 모습에 루리엔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랬다면 그런 별명이 생기지는 않았겠지.”
카멜리아 후작 부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2황자는 엘리시아에게 대놓고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를 피하려고 엘리시아가 선택한 방법은 그럴듯한 남자들을 계속해서 자신의 옆에 두는 것이었다.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엘리시아는 짧으면 1개월 길면 3개월마다 상대를 바꿨다. 그렇게 2년 정도 지나자 어느새 그녀는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로 소문나 있었다.
그런 별명을 얻어가면서까지 2황자를 피했던 엘리시아였으니 2황자와 잤냐는 말에 발끈하는 것도 루리엔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하르를 보며 말했다.
“이번 건 하르 네가 지나쳤어. 엘리가 2황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잖아.”
하르 역시 자신이 과했다고 생각했는지 엘리시아를 보며 바로 사과했다.
“미안. 내가 실언했다. 어젯밤 황궁에 2황자 수하들이 보이기에 혹시나 했다.”
그의 말에 매섭게 치켜 올라가 있던 엘리시아의 눈매가 꿈틀했다.
“2황자의 수하들이라고? 확실해?”
“확실하다.”
“그런 중요한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거야?”
엘리시아가 구박하자 하르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구 때문에 잊고 있었을 것 같냐는 그의 눈빛에 엘리시아는 헛기침하며 말을 돌렸다.
“역시 2황자였나? 조나단 그 자식이 어떻게 알았나 했더니.”
“그러게. 네가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다는 거 아는 사람이 우리 말고는 2황자뿐이지?”
“응. 뭣도 모르는 시절에 실수로 말해버렸으니까.”
“어쩐지 한동안 조용하다 싶더니만 바로 뒤통수를 치네. 역시 재생 불가능한 쓰레기야.”
스스럼없이 제국의 황자를 욕하는 루리엔을 보며 엘리시아는 피식 웃었다.
“고운 말 쓰라면서.”
“가끔은 필요할 때가 있잖아. 넌 자주 해서 문제고.”
“쳇.”
엘리시아는 못마땅한 듯 입을 삐죽였다. 그렇다고 해서 루리엔에게 덤빌 용기는 없었기에 그녀는 하르를 보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하여간 다시는 그런 소름 끼치는 얘기하지 마. 알았지?”
“알았다.”
“누누이 말하지만 2황자 그 자식과 자느니 지나가던 아무 놈이나 잡고 구르고 말…….”
화가 완전히 풀린 얼굴로 어깨를 으쓱이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치고 들어온 루리엔의 물음에 그대로 돌이 되었다.
“그래서 누구야? 지나가던 그 아무 놈.”
“…….”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리다가 갈피를 잡지 못하고 데구루루 굴렀다.
젠장. 대체 쟤는 왜 저렇게 정곡을 파고드는 거야?
엘리시아의 얼굴에 짙은 곤혹감이 어렸다. 둘러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두 친우는 그녀의 모든 것을, 심지어 목숨까지도 고민 없이 맡길 수 있는 그런 존재들이었으니까.
만약 그들이 없었다면 귀족파의 수장은커녕, 카멜리아 후작가의 재기조차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결국 엘리시아는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몇 번 하고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무척이나 작았다.
“……데이모스 공작.”
“데, 뭐? 누구? 제대로 말해. 개미 소리도 그것보다는 크겠다.”
루리엔의 구박에 엘리시아는 두 주먹을 꾹 쥐며 정말 말하기 싫다는 표정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그녀의 귀는 쪽팔림으로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 지나가던 아무 놈이 데이모스 공작이라고.”
“아, 데이모스 공작…… 뭐?”
평소 잘 놀라지 않는 루리엔의 두 눈이 동그랗게 동그랗게 떠졌다. 하르 역시 잘못 들었나 하는 눈빛으로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하지만 곧 두 친우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드디어 네가 제대로 일을 쳤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아, 젠장.’
예상했던 대로의 반응이 돌아오자 엘리시아는 고개를 푹 숙였다. 트리엘 남작을 향한 살의가 절로 속에서 들끓었다.
그 미친놈이 아니었다면 데이모스 공작과 얽힐 일도 없었을 거고 이런 상황에 처하지도 않았을 터였다. 이게 웬 쪽팔림이란 말인가.
‘역시 묻어버리는 게 낫겠지. 그런 놈이 숨을 쉬어서 뭐하겠어. 그냥 머리까지 다 묻어버리자.’
2황자를 묻어버릴 수는 없으니 대신해서 조나단을 묻어버리는 상상을 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