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세상에. 데이모스 공작이라니.”
어느새 루리엔은 심각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머리가 꽤나 복잡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괜스레 일거리를 만든 것 같아 미안해진 엘리시아는 소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헤리스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래도 2황자보다는 낫잖아.”
“엘리.”
“응?”
“네 말대로 2황자보다 낫긴 한데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뭘?”
“데이모스 공작, 그쪽으로 정말 깨끗하거든.”
“그쪽?”
엘리시아가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쳐다보자 루리엔은 피식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들어 까닥거렸다. 그녀답지 않게 꽤나 불량스러운 느낌이었다.
“이거. 여자관계.”
눈앞에서 움직이는 손가락을 쳐다보던 엘리시아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녀의 직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혹시 쓸데가 있을까 싶어 내가 몇 번 뒤져봤는데 사귄 여자는커녕 스쳐 지나간 여자조차 나오지 않았었어. 그런데 첫 여자가 너라니 이걸 대체 어떻게 받아들…….”
“자,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응?”
갑자기 말을 끊고 들어오는 엘리시아를 루리엔은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녀의 친우는 어째서인지 당황한 듯 보였다.
“지금 뭐라고 했냐고.”
“쓸데가 있을까 싶어 몇 번 뒤져봤다고.”
“아니, 그거 말고.”
“사귄 여자는커녕 스쳐지나간 여자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거?”
“아니, 아니, 가장 마지막에 한 말!”
“첫 여자가 너라는 거?”
루리엔의 대답에 엘리시아는 순간 멍해졌다.
아니 이게 무슨 개 같은 소리란 말인가. 그 인간에게 내가 첫 여자라고?
안 그래도 새하얀 그녀의 얼굴이 살짝 창백해졌다.
“……농담이지, 루리엔?”
제발 그렇게 말해달라고 간절하게 엘리시아가 쳐다보았지만 돌아온 것은 충격적인 확인 사살뿐이었다.
“농담 아닌데? 너야말로 어젯밤에 못 느꼈어? 처음인 거?”
“…….”
네가 더 잘 알지 않냐는 루리엔의 시선을 받은 엘리시아는 재빨리 어젯밤의 기억을 더듬었다. 잠시 후 그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사라졌다.
정신을 잃기 전 느꼈던 쾌감이 너무나도 강렬해서 잊고 있었지만 분명 처음에는 묘하게 서툴렀었다. 더듬는 사내의 손길도, 파고드는 움직임도, …키스도.
이후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변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내가 처음이었다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 데이모스 공작이? 이게 말이 돼? 아니, 다 떠나서 사람이 짧은 시간에 그렇게 능숙해질 수 있는 거야?’
엘리시아의 입이 자신도 모르게 스르륵 벌어졌다. 너무 어이가 없다 보니 머릿속까지 새하얗게 변하는 느낌이었다.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녀는 루리엔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아니, 어떻게 그게 말이 돼? 데이모스 공작, 제국 최고의 인기남 아니었어?”
지나가는 여자들을 붙들고 제국에서 누가 가장 멋지냐고 물어보면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모두 이케르 데이모스 공작을 입에 담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동정이라는 걸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하지만 그녀의 친우는 잔인했다.
“뭐가 말이 안 돼. 제국 최고의 인기남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 있어? 자신의 신념일 수도 있는 거지. 실제로 공작에게 접근했던 여자들은 셀 수 없이 많았을걸? 그런데 칼같이 다 쳐낸 모양이야.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으론 여자 손도 잡은 적이 없다고 하던데?”
“…….”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대체 어떻게 그 철벽 공작을 침대에 넘어트린 거야?”
아, 진짜 미치겠네.
머리가 어질어질한 것을 느끼며 엘리시아는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자신이 데이모스 공작의 첫 여자라니.
절로 욕이 흘러나왔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루리엔의 잔소리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엘리?”
빨리 대답하라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루리엔을 손가락 사이로 흘깃 본 엘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엘리시아는 얼굴을 덮고 있던 손을 내리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술 때문인 거 같아.”
“술?”
의외라는 듯 되물어 오는 루리엔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자신의 아래에 있던 이케르를 떠올렸다. 그때 그는 분명 이렇게 말했었다.
[오늘따라 폐하께서 이국의 술을 계속 권하시더군. 거절할 수도 없고 해서 마시다 보니 나도 취했던 것 같네. 공작저에 돌아가려고 홀을 나와 걷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멱살을 쥐고 방으로 끌어들이더군.]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폐하께서 계속해서 이국의 술을 권했대. 마시다 보니 취했던 것 같다고. 그때 내가 지나가던 공작의 멱살을 쥐고 끌어당겼다고 하던데.”
그냥 들은 대로 전달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자신을 쳐다보는 루리엔과 하르의 표정이 묘하게 변하자 엘리시아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그런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지 그녀가 물으려 했지만 친우들이 더 빨랐다.
“데이모스 공작의 멱살을 쥐었다고? 엘리 너 진짜 눈에 보이는 게 없었구나.”
루리엔은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고,
“정말로 그 사내가 취한 건가. 그렇게 쉽게 잡혀줄 리가 없을 텐데.”
하르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었다는 것처럼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아니, 살다 보면 누군가의 멱살도 잡을 수도 있지! 그게 데이모스 공작이었을 뿐인데 어쩌라고!
친우들의 반응에 엘리시아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사고를 친 입장에서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입을 삐죽이며 속으로 구시렁거리던 그녀는 루리엔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그런데 이상하긴 하네. 술에 취해 방심하다가 멱살을 잡혔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네게 끌려가 침대에 누웠다고? 제국 최고의 마검사이자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데이모스 공작이? 혹시 만취 상태였어?”
대체 얼마나 취했기에 네게 당하냐는 루리엔의 눈빛에 엘리시아는 결국 발끈했다.
“내가 어떻게 알아. 정신 차리고 보니까 이미 올라타고 있었는데. 그전에는 정말 기억나지 않는다고.”
그녀 역시 그날의 진실을 진심으로 알고 싶었다.
솔직히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대체 어떻게 데이모스 공작을 침대에 묶었는지.
그가 그 단단하게 근육 잡힌 팔 한 번만 휘둘러도 튕겨 나갔을 것 같은데 말이다.
‘헤리스에 힘이 세지는 부작용도 있나?’
다시 한번 부작용에 대해 알아봐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던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말에 그대로 굳어졌다.
“자랑이다. 그런데 올라탔다니 하는 말인데 너 그 취미 나온 거 아니겠지?”
“…….”
또다시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구르기 시작했다. 말로 하는 것보다 더 명확한 대답이었다.
“했구먼. 했어.”
루리엔이 혀를 쯧쯧 차자 듣고 있던 하르가 물어왔다.
“취미?”
“몰라? 침대에다가 상대를 묶어놓고 올라타는 거.”
“아, 그 악취미.”
악취미… 라고 말할 것까지야. 그냥 개인적인 취향이지.
엘리시아는 또다시 보이지 않게 입을 삐죽였다. 그녀가 그런 자세를 좋아하는 것은 사내에게 휘둘리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상대가 애타게 하는 것이 즐겁지 상대로 인해 애타는 것은 그녀의 취향이 아니었으니까.
어쨌든 이대로 놔뒀다가는 이야기가 상당히 이상한 방향으로 흐를 것 같아 엘리시아는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말을 돌렸다.
“흠흠, 어쨌든 데이모스 공작에게 이걸로 약점잡지 않겠다고 약속은 받았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띄지 않은 것 같고. 특히 기자들. 그러니까 대충 넘어가지?”
이제 그만 심문 끝내자는 그녀의 눈빛에 루리엔은 어깨를 으쓱하며 다시 물어왔다.
“뭐, 그랬다면 다행이긴 한데. 그 약속, 언제 받은 거야?”
“침대에서 한 번, 아침에 깨어나서 한 번.”
“그럼 가까운 시일 내에 한 번 더 받아놔.”
“두 번이나 받았는데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까?”
도리어 긁어 부스럼 아니냐고 묻는 엘리시아를 보며 루리엔은 딱 잘라 말했다.
“데이모스 공작의 평소 인격을 봤을 때 그 정도면 충분할 거 같기는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니까. 특히 치정 관계는.”
그 데이모스 공작이 술에 취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지만 어려웠지만, 술에 취했다고 하더라도 순순히 엘리시아에게 어울려 준 것이 루리엔으로서는 솔직히 이해 가지 않았다.
동정인 건 둘째 치더라도 그런 식으로 공작에게 접근했다가 알몸으로 내쫓긴 여자들의 이야기를 몇 개 알고 있기에 더욱더.
물론 엘리시아가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미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귀족파의 수장으로 데이모스 공작과는 정적이 아닌가. 공작에게도 부담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을 텐데 말이다.
‘약점잡지 않겠다고 약속받았다니 다행이긴 한데……. 뭔가 찝찝하단 말이지.’
어쩌면 엘리시아를 쳐다보는 데이모스 공작의 시선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루리엔은 생각했다.
평소에는 무심한 눈빛이 엘리시아를 볼 때면 아주 가끔씩 이채를 띨 때가 있었다. 찰나의 순간이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생각에 잠겨 있던 루리엔은 엘리시아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알았어. 만나게 되면 한 번 더 확인받을게. 그럼 이 문제는 여기서 끝내는 거지?”
곤란한 주제에서 빠져나갈 수 있어서인지 화색이 도는 친우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피식 웃었다.
“그래. 더 이상 묻지 않을게. 문제 안 생기게 처신만 잘해.”
“당연하지. 그보다 하르.”
“……?”
하르는 엘리시아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짙은 눈썹을 살짝 추켜 올렸다.
“트리엘 그 자식, 지금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있어?”
“수하들을 풀면 반 시각 내로. 그런데 왜?”
“묻어버리려고. 그렇지 않으면 스트레스로 내가 돌아버릴 거 같거든. 그 김에 2황자의 사주를 받은 건지도 확인하고.”
“알겠다.”
“그럼 그 자식 위치 확인 부탁해.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
입매를 심술궂게 비튼 엘리시아가 자신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자 하르는 아무 말 없이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가기 위해 현관문을 열던 그는 루리엔의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췄다.
“이번에는 진짜로 묻어버려도 아무 말 안 할게.”
“…….”
잠시 침묵했던 하르의 고개가 루리엔을 향해 돌아갔다.
진심이냐는 그의 눈빛에 루리엔은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엘리시아가 봤다면 잽싸게 도망갈 정도로 사악한 미소였다.
“제 주제도 모르고 감히 우리 엘리를 건드린 거잖아. 대가는 치러야지.”
“……접수 완료.”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인 하르는 문을 열고 나갔다. 탁 하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루리엔은 몸을 돌렸다.
⚜ ⚜ ⚜
접혀도 구겨질 것 같지 않은 매끄러운 셔츠 자락이 바지 속으로 밀려 들어갔다. 두 손에 잡힐 정도로 가는 허리를 감싼 바지가 벨트로 단단히 고정되었다.
머리를 높이 끌어올려 하나로 질끈 묶은 엘리시아는 옆에 놓아두었던 검은색 케이프 코트를 걸쳤다.
무릎까지 내려오고 모자가 달려 있어 모습을 감추기에 적합한 코트였다.
코트 단추를 잠그고 모자까지 눌러쓴 그녀는 화장대 서랍에서 검은 가죽 장갑을 꺼내 꼈다. 셔츠와 마찬가지로 얇게 재단되어 움직임에 불편이 없는 장갑이었다.
“역시 느낌은 이게 최고야.”
만족스러운 듯 주먹을 폈다 접었다 하던 엘리시아는 장갑이 들어 있던 서랍을 닫고 그 옆의 서랍을 열었다.
그 속에는 그녀가 즐겨 쓰는 은색 피스톨 하나와 손가락에 끼는 은색 링이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우연인지 고의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날 건드렸을 때는 그만한 각오는 했을 테니 이 정도는 해줘야겠지.”
엘리시아는 4개의 링을 꺼내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왼쪽 손가락 4개에 각각 끼웠다. 주먹을 몇 번 다시 쥐었다 폈다 반복한 그녀는 피스톨을 들어 벨트에 끼웠다.
피스톨은 총알 장전을 하지 않고 사용이 가능한 마도구였고,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오리하르콘으로 만든 링에는 강화마법이 걸려 있었다.
착용자의 파워를 세배 이상 높여주는 것으로 엘리시아가 아끼는 것이기도 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만족스레 웃으며 저택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