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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133)

8화

부관 미하엘 오스턴은 보고서를 내밀면서 소파에 걸터앉아 긴 다리를 꼬고 있는 자신의 상사, 이케르의 분위기를 살폈다.

그의 상사는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미하엘은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이런, 저기압이시네. 황궁의에게 꽤나 시달리셨나 본데?’

자세한 건 몰라도 전말은 대충 알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관심도 없던 그의 상사가 어떤 여자를 공작저로 데리고 왔으며, 몸이 좋지 않다는 핑계로 오전에 잡혀 있던 의회를 내일로 연기시켰다는 것 정도는 말이다.

덕분에 황제 폐하께서 황궁의를 보내셨고 그의 상사는 한 시간 넘게 황궁의에게 시달렸다고 했다.

‘대체 어떤 여자분이기에 각하께서 의회까지 연기하셨을까. 아니 그 전에 대체 어떤 밤을 보내셨기에…….’

나름대로 상상의 날개를 펴던 미하엘은 상사의 목소리에 흠칫 놀랐다.

“조나단 트리엘?”

이케르는 보고서에 적힌 남자의 이름을 보며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저기압으로 보이는 상사가 그러고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긴장된 미하엘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렇습니다. 남작위를 가진 자인데 현재 귀족들 사이에서 암암리에 거래되고 있는 불법 밀수품의 유통을 담당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조나단 트리엘이라……. 그렇군.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예?”

미하엘은 순간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자신의 상사인 공작의 입가에 어려 있는 것은 희미하지만 분명 미소였다.

‘뭐지? 보고서에 각하가 기분 좋으실 만한 내용이 있었나?’

갑자기 저기압이 풀린 상사를 보며 미하엘은 눈을 깜빡였다. 보고서의 내용은 모두 그의 머릿속에 빠짐없이 기억되어 있는데 상사가 미소 지을 만한 포인트는 어디에도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있던 미하엘은 이케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밀수 루트를 알아내려면 일단 이 자를 잡아야겠군.”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럼 바로 기사들을 보내서…….”

“아니,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예? 각하께서 직접 말씀입니까?”

“그래.”

이케르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자 미하엘은 화들짝 놀라 옆으로 비켜섰다.

조금 전 미소도 그렇고 지금의 행동도 그렇고 평소 그가 익숙한 상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이런 작은 일에 각하께서 직접 가신 적이 있었던가?’

미하엘은 혼란스러웠다.

조나단 트리엘은 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잔챙이였다. 그리고 그의 상사는 몸을 두 개로 나눠도 부족할 정도로 바쁜 사람이었다.

이케르 데이모스 공작은 황제파의 수장이며 수사국의 국장이기도 했으니까.

‘설마 트리엘 남작 뒤에 엄청난 배후가 있는 건가? 각하께서 직접 가셔야만 할 정도로?’

그것 말고는 갑작스러운 상사의 행동을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단순한 사건이라 생각하고 신나서 가장 먼저 이 사건 파일을 낚아챘던 미하엘의 얼굴이 단번에 구겨졌다.

기분이 바닥을 친 부관과 달리 이케르는 기분이 좋았다. 그답지 않게 살짝 들뜨기까지 했다.

평소 같으면 나서지 않았을 일에 그가 직접 나선 것은 ‘트리엘’이라는 성 때문이었다.

그는 엘리시아가 자신의 위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내뱉었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트리엘 그 새끼…… 반드시 죽여 버린다.]

집사가 가져온 코트를 걸치던 이케르의 황금빛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그의 가슴 위로 쏟아져 내리던 붉은 머리카락, 안개가 낀 듯 몽롱하면서도 신비스러운 짙은 보랏빛 눈동자, 탐스러운 붉은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던 뜨거운 숨결까지.

그녀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이케르는 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헤어진 지 몇 시간 지나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갈증을 없애려면 목을 축여야겠지.’

죽여 버린다고 했으니 엘리시아의 성격에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후작저로 돌아간 그녀는 분명히 조나단 트리엘이라는 자를 찾아 나설 것이다.

업무 수행 중 만나는 것이라면 엘리시아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운이 따라준다면 그녀와 함께 있을 기회가 생길 수도 있겠지.

“우연이 꼭 우연일 필요는 없으니까.”

이케르의 입가에 어린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 ⚜ ⚜

“금방 편하게 해줄 테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만취해 듣지도 못하는 여자에게 속삭인 조나단 트리엘은 닫혀 있던 방문을 열었다.

끙끙거리며 여자를 부축해 침대로 데려간 그는 침대 위에 여자를 눕히고서는 침대 끝에 털썩 걸터앉았다.

정신을 잃은 여자를 내려다 보는 조나단의 시선이 침대에 흐트러진 붉은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그나마 카멜리아 후작과 비슷한 색이었다. 외모가 그녀에게 한참 미치지 못함에도 술집에서 이 여자를 꼬드긴 이유이기도 했다.

그는 메고 있던 크라바트를 거칠게 잡아당겨 바닥에 던지고는 중얼거렸다.

“하기야 그만한 미모를 찾기 어렵지. 그러니 사내새끼들이 그렇게 껄떡이는 거겠지만. 그나저나 어젯밤 그 계집은 어디로 사라진 거야?”

생각지 못하게 카멜리아 후작의 약점을 알게 된 조나단은 자신이 생겼다. 콧대 높고 도도한 그녀와 뜨거운 밤을 보낼 자신이.

한시도 떨어지지 않던 그녀의 호위 기사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헤리스가 들어간 칵테일을 건네면서 얼마나 조마조마했던가.

술이 그녀의 도톰한 선홍빛 입술 사이로 들어갈 때는 희열마저 느꼈었다.

이제 부작용 때문에 비틀거리며 홀을 빠져나갈 엘리시아를 낚아채기만 하면 게임 끝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갑자기 후작이 사라져버렸다. 그 이후 그녀를 본 사람은 없었다.

“열심히 수프 쒀서 개 준 건 아니겠지.”

조나단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지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 열심히 만든 수프를 데이모스 공작이 꿀꺽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거품 물고 뒤로 넘어갈 일이었다.

다 잡은 사냥물을 놓쳤다는 생각에 짜증이 솟았던 조나단은 침대에 누워있는 여자를 보면서 마음을 다스렸다.

카멜리아 후작을 안지는 못했지만 백조 대신 오리라고 이 여자라도 안으면 어쨌든 욕정은 해결될 터였다.

“뭐, 얼굴이야 안 보면 그만이니.”

입맛을 다신 조나단이 여자의 드레스에 손을 대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쾅 하고 문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힘을 견디지 못한 방문이 떨어져 나갈 듯 거칠게 열렸다.

화들짝 놀란 조나단은 급히 문을 쳐다보았다.

“누, 누구냐?!”

당황한 그의 외침에 낮고 매력적인, 그러나 음산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잘됐네. 자르기 쉽게 벗고 있고.”

“에… 엘리시아 카멜리아……?!”

누구의 목소리인지 깨닫는 순간 조나단은 환청인가 싶었다. 생각을 너무 많이 하다 보면 들리는 환청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곧 그는 환청이 아님을 깨달았다.

“이 자식이 어디서 반말이야!”

짜증 난 목소리와 함께 바로 날아든 주먹이 조나단의 턱을 후려쳤다. 갑자기 날아든 주먹은 건장한 조나단의 몸이 나가떨어질 정도로 강한 힘을 싣고 있었다.

“크억!”

그의 입에서 신음이 절로 튀어나왔다.

바닥에 부딪힌 몸도 몸이지만 골이 뎅 하고 울리며 턱뼈가 부서지는 듯한 고통이 몰려들었다.

조나단은 맞은 부위를 움켜쥐고 신음을 내며 뒹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던 그의 머리가 고정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차가운 구둣발이 머리를 꾸욱 누른 것이다.

그제야 조나단은 신음을 멈추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네 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우스운 꼴이 됐는지 알아? 그래서 결심했지. 묻어버려야겠다고.”

머리 위에서 들려오는 엘리시아의 목소리는 음산하다 못해 오싹할 정도였다. 구둣발 아래 짓눌린 조나단의 몸이 두려움에 덜덜 떨렸다.

그리고 정말 그는 근처의 야산 땅속에 묻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로 목만 내놓은 채.

그를 묻기 위한 땅을 파는 사이 분이 덜 풀린 카멜리아 후작에게 몇 대 더 두들겨 맞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건 약과였다. 그의 눈앞에서는 듣는 것만으로도 공포스러운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자르고 묻으라니까 누가 그냥 묻으래.”

“지금 내 검에 저 자식의 더러운 피를 묻히라는 거냐?”

“네 검으로 자르기 찝찝하면 다른 사람 꺼 빌려서 잘라버리면 되잖아.”

조나단의 얼굴에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핏기가 사라졌다. 그는 자신이 처한 지금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내가 돌았지. 다른 여자도 아니고 왜 엘리시아 카멜리아를 건드려서…….’

그는 진심으로 울고 싶었다.

평소 그가 카멜리아 후작에게 치근덕거린 것은 맞았다. 그녀가 바람둥이이며 애인을 쉽게 바꿔치기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스스로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지금까지 카멜리아 후작이 사귀었던 남자들과 비교하면 자신의 외모가 나으면 나았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아무리 유혹해도 넘어오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 아닌가. 그러다 보니 약이라도 써볼까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곧 그는 그 생각을 버렸다.

카멜리아 후작이 웬만한 해독제는 다 들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은 데다가 실패하는 경우 뒷감당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그에게 속삭였다. 카멜리아 후작이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다고. 그러니 헤리스가 들어간 칵테일을 가져다가 그녀에게 먹이라고.

악마의 속삭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는 넘어가고 말았다.

어쩌면 밑져야 본전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약도 아니고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칵테일 재료이니 들켜도 모른다고 잡아떼면 되리라 생각했다.

설마 그것이 지옥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안 그래도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진 조나단은 이어지는 대화에 그대로 얼어버렸다.

“그러지 말고 목을 베어버리는 건? 그 정도면 내 검도 이해할 것 같은데. 루리엔도 허락해줬고.”

“뭐? 루리엔이?”

엘리시아는 믿기 어렵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 농담이겠지 싶어 그녀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정말?”

“그래. 루리엔, 열 받았더라.”

“…….”

하르의 대답에 엘리시아는 땅 위로 목만 내밀고 있는 조나단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루리엔이 허락했다는 것은 뒤처리를 완벽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허리에 차고 있던 은빛 총을 꺼내어 조나단의 관자놀이에 가져다 대었다.

조나단은 기겁했다. 차가운 금속의 느낌이 피부에 닿는 느낌도 섬뜩했지만 철컥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목소리가 음산하게 울린 것이다. 그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신의 목소리 같았다.

“그냥 없애 버릴까?”

“히익!”

진짜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조나단은 있는 힘을 다해 다급하게 외쳤다.

“사, 살려주십시오!”

“그럼 말해. 누가 알려줬어? 내가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다는 거.”

“그, 그건…….”

그가 머뭇거리자 총구가 그의 관자놀이를 조금 더 파고들었다. 섬뜩한 느낌에 화들짝 놀란 그는 이를 덜덜 떨며 재빨리 외쳤다.

“수, 술집에서 들었습니다! 로브를 써서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제게 속삭였습니다! 후작님이 헤리스에 부작용이 있다고 말입니다!”

“그게 누군데?”

“그건, 그건 정말 모릅니다! 처, 처음 보는 자였습니다!”

“뭐야, 아는 게 없잖아. 그럼 살려줄 필요도 없겠네.”

달칵하고 권총의 안전장치 풀리는 소리가 조나단의 귀에 천둥소리보다도 크게 들렸다. 결국 그는 두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그대로 정신 줄을 놓고 말았다.

입에 거품까지 문 채 기절한 그의 꼬락서니를 내려다보던 엘리시아는 다시 안전장치를 채우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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