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뭐야, 고작 이걸로 기절한 거야?”
“원래 그 정도밖에 안 되는 놈인가 보지.”
“정말이지 이런 멍청이에게 당했다니. 기가 막혀서.”
미간을 좁힌 엘리시아가 총을 다시 허리에 찼다. 젖혀졌던 코트가 내려앉으며 은빛 총은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다.
“됐어. 생각해보니 이런 쓰레기 같은 자식, 쏴버리는 것도 내 총에게 실례네. 네 검에도 그렇고.”
“이대로 분이 풀리겠어? 한 번이면 끝나니까 잘 생각해.”
하르는 기절한 조나단의 머리를 검집으로 툭툭 쳤다. 그의 눈빛은 그녀가 원하면 언제든 목을 베어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죽일 거면 그냥 내 총으로 한 방에 끝내면 되지.”
“그럼 지저분해지잖아. 검은 깔끔하다니까.”
“그게 더 지저분하거든?”
하르와 농담처럼 말을 주고받던 엘리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됐어. 그냥 좀 더 묻어놓기만 해. 그래야 정신 차리지.”
“알았다.”
하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거두어들였다. 검집에 검을 넣은 그가 수하에게 지시를 내리는 동안 엘리시아는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링에도 장갑에도 조나단의 피가 묻어 있어 찝찝해서였다. 장갑은 새로 맞추고 링은 깨끗이 씻어내야 할 것 같았다.
코트 주머니에 링과 장갑을 집어넣은 그녀는 하르가 돌아오자 함께 그 자리를 떠났다.
수도 뒤 야산에 올라갈 때는 조나단을 끌고 가서인지 시간이 오래 걸렸는데 둘이서만 내려오니 금방이었다.
2황자가 사주했다는 증거는 잡아내지 못했지만 조나단을 묻어버려서인지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엘리시아는 발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하르와 함께 수도의 골목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갑자기 누군가와 몸이 부딪치며 몸이 휘청했다.
옆에서 걷던 하르가 놀라 그녀를 부축하려 했지만 상대의 손이 더 빨랐다. 단단한 손이 그녀의 팔을 잡아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 세웠다.
“괜찮소?”
낮은 저음의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귓가에 울렸다.
“괜찮…….”
돌덩어리와 부딪친 것 같은 충격에 미간을 찌푸리며 답하려던 엘리시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목소리였다. 아니 상당히 익숙하고, 들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은 목소리였다.
고개를 번쩍 든 그녀는 자신과 부딪친 로브 속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케르 데이모스, 데이모스 공작의 얼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금안도 함께였다.
아니, 이 남자가 왜 여기에 있단 말인가.
생각지도 못한 사람과의 조우에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갈피를 잃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곤란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이케르의 목소리가 다시 귓가에 나직하게 울렸다.
“이런, 카멜리아 후작이 아닌가.”
“……각하.”
아멜리아가 당황해 멈칫거리는 사이 하르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보기엔, 공작의 목소리에 위화감이 있었다. 마치 그녀를 만날 걸 알고 있던 사람처럼.
빠르게 뻗어나간 하르의 팔이 아멜리아의 허리를 감아 자신 쪽으로 당겼다.
그 순간 이케르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금안에 불쾌한 눈빛이 떠올랐다 사라졌지만, 하르도 엘리시아도 눈치채지 못했다.
‘뭐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몸이 옮겨진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조금 전까지 그녀를 당황하게 했던 사내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익숙한 하르의 등이 보인 것이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그녀는 나직하게 친우를 불렀다.
“하르.”
“가만히 있어, 엘리.”
“어? 응.”
뭔지 모르겠지만 하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할 때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에 엘리시아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제야 하르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데이모스 공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짙은 남색 눈동자와 황금빛 눈동자가 허공에서 직선으로 부딪쳤다.
“무슨 일이신지?”
하르는 경계하듯 손에 들고 있던 검집을 살짝 들어 보이며 물었다.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기에 그나마 예의를 갖춘 것이었다.
이케르 데이모스 공작.
제국 최고의 마검사이자 전쟁의 신이라 불리며 황제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황제파의 수장. 지금까지 그가 세운 전쟁에서의 공로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당연히 가진 권력도 부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을 듣기는 했지만 하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데이모스 공작이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과 반대의 선에 서 있는 자라는 것뿐. 엘리시아의 적은 그에게 있어서도 적이었으니까.
게다가…….
하르의 짙은 남색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조금 전 데이모스 공작에게서 느꼈던 위화감도 그렇지만 그가 어젯밤 엘리의 상대였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우연히 마주쳤다고 보기에는 뭔가 찝찝한 느낌이랄까.
‘설마 엘리와 고의로 부딪친 건 아니겠지?’
하르의 눈빛에 어린 의뭉스러움을 읽은 것일까, 이케르가 낮게 웃더니 느긋함이 담긴 목소리로 말을 건네 왔다.
그가 아닌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엘리시아를 향해서였다.
“넘어질 것 같기에 잡아줬을 뿐인데 이건 숫제 불한당 취급이군. 고맙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이건 좀 심하지 않나, 후작.”
웃음기가 담긴 부드러운 이케르의 말에 하르의 뒤에 서 있던 엘리시아는 뜨끔했다.
이케르의 말에 틀린 부분은 없었다. 그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나뒹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맞을…….
‘아니지. 내가 왜 넘어질 뻔했는데.’
몸의 중심을 잃기 전으로 기억이 돌아가자 엘리시아의 눈매가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애초에 그녀가 넘어질 뻔한 것은 그와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러니 일방과실이 아니라 쌍방과실이라 해야 맞았다.
그 사실을 이케르에게 짚어주기 위해 앞으로 나서려던 엘리시아는 누군가가 급히 달려오자 다시 몸을 숨겼다.
그래서 이케르의 눈빛에 아쉬움이 스쳐 가는 것을 그녀는 미처 보지 못했다.
“여기 계셨습니까, 각하?”
차렷 자세로 선 채 이케르에게 보고하는 남자는 단정하게 정리된 갈색 머리카락에 같은 색의 눈을 지닌 훤칠한 키의 미남이었다.
엘리시아는 그가 누군지 금세 알아보았다.
‘저 남자, 데이모스 공작의 부관이잖아. 이름이 미하엘 오스턴이었던가?’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은 미하엘이 걸치고 있는 로브 사이로 살짝 드러나는 제복을 놓치지 않았다. 분명 황실기사단 제복이었다.
‘제복을 입은 부관과 함께라……. 각하께선 공무 수행 중인가 보네.’
어떤 흉악한 악당이기에 다른 사람도 아니고 수사국 국장인 데이모스 공작이 직접 나선 건지 살짝 궁금하기는 했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미하엘의 입에서 그녀가 아는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조나단 트리엘의 행적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여자와 근처 여인숙에 들어갔다고 하더군요.”
헙.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급히 들이켰다. 커다란 눈이 더 커질 수 없을 정도로 동그래졌다.
그건 하르도 마찬가지였다. 석상처럼 꿋꿋이 버티고 있던 그의 등이 아주 잠깐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살짝 움직였다.
‘조나단 트리엘? 설마 방금 전 우리가 묻고 온 그 자식을 말하는 건 아니겠지.’
당황한 엘리시아는 다급히 손을 뻗어 하르의 팔을 잡았다. 방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확인받고 싶었다. 하지만 하르의 눈동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버릇처럼 튀어나오려는 ‘이런 망할’을 간신히 입안으로 구겨 넣은 채 엘리시아는 예쁜 미간을 구겼다.
바쁘기로 소문난 데이모스 공작이 그깟 피라미를 잡으러 직접 나섰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이해는 둘째 치고 그가 직접 나섰다면 조나단의 위치가 밝혀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물론 그녀가 한 짓도 함께.
복수니 뭐니 해도 어쨌든 엘리시아가 조나단에게 한 짓은 엄연한 범죄였다.
어쩌다 보니 몸을 섞기는 했지만 어쨌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정적관계에 있는 데이모스 공작에게 치부를 잡히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쓰레기를 있던 자리에 다시 가져다 놔야 하는데…….’
시간이 문제였다. 조나단을 땅에서 파내고 데리고 와서 여관에 버릴 시간 말이다. 입단속도 시켜야 했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속도 모르고 공작과 그의 부관은 눈앞에서 태평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엘리시아는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녀가 고민하는 사이에도 이케르와 부관 사이에서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어느 여인숙이지?”
“메이즈라는 곳인데 숙박명부를 받지 않고 영업하는 곳이라 범죄자들에게 인기가 좋다고 합니다.”
“명부를 받지 않는 건 불법이지. 조나단이라는 자와 함께 여인숙 주인도 잡아들이면 되겠군.”
“지금 바로 가보시겠습니까?”
“그러지.”
이케르의 대답에 미하엘은 미리 알아둔 길로 주군을 안내하려고 했다. 검은 코트를 입은 사람이 튀어나와 주군의 팔을 붙들지 않았다면 말이다.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어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키나 가녀린 체격으로 볼 때 여성인 듯했다.
“누구냐?”
허리에 차고 있던 검 손잡이에 재빨리 손을 가져갔던 미하엘은 주군과 눈이 마주치자 슬그머니 손을 뎄다.
그의 주군은 눈빛으로 말하고 있었다. 물러서라고.
경계를 늦추기는 했지만 미하엘은 지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타인이 자신의 몸에 손대는 것을 싫어하는 주군이 팔을 잡은 로브의 사람을 내려다보며 입매를 부드럽게 늘어트리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항상 나른하고 무감정하던 금안에는 만족스러운 눈빛마저 감돌고 있었다.
‘뭐지 이 상황은? 각하께서 아시는 분인가? 체격으로 봐서는 여자인 것 같기는 한데.’
고개를 갸웃거리던 미하엘은 그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로브 쓴 미청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반 정도 얼굴이 가리기는 했지만 눈썰미 좋은 그가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저자는 테스케 경? 카멜리아 후작의 호위기사가 왜 여기에… 설마…?’
하나의 실마리가 다른 실마리로 연결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경악한 미하엘의 시선이 곧바로 코트를 입은 사람에게 꽂혔다. 그리고 그는 보고 말았다. 깊게 눌러쓴 코트의 모자 사이로 살짝 흘러나온 윤기 나는 붉은 머리카락을.
‘카, 카멜리아 후작?!’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상황상 누구인지 짐작하지 못할 미하엘이 아니었다. 그의 입이 경악으로 저절로 벌어졌다.
‘아니, 잠깐만. 카멜리아 후작이 왜 여기에, 아니 그 전에 후작이 왜 주군의 팔을, 아니 그전에 주군은 왜 저런 표정을…….’
그가 알고 있기로 그의 주군과 카멜리아 후작은 개와 고양이 같은 사이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의 주군은 가만히 있는데 후작 쪽에서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정없이 할퀴어 대는 것이지만.
어쨌든 저러고 있을 사이는 아니었다.
혼란으로 가득한 머리를 부여잡고 끙끙거리던 미하엘은 하르 테스케가 어느 순간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디로 갔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호위기사가 자신이 지켜야 할 주인을 두고 사라졌다고? 이 무슨…….’
하르가 사라짐으로써 미하엘의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이고 말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되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주군의 부름이 들렸다.
“미하엘.”
“예, 각하.”
미하엘은 옳다구나 생각하며 재빨리 대답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혼란스러움을 주군이 풀어줄 것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주군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가 기대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말이었다.
“가서 조나단이라는 자를 잡아 와.”
“예? 각하께서는…….”
“미하엘.”
멍해진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우물쭈물 말을 입 밖으로 꺼냈던 미하엘은 주군의 낮아진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닙니다. 바로 잡아서 끌고 오겠습니다.”
기합이 잔뜩 들어간 미하엘이 몸을 돌리려고 했을 때 주군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기다리게.”
그는 재빨리 멈춰 섰다.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래, 각하께서 일을 버리고 가실 리가 없지. 오죽하면 일 중독자라는 별명까지 있겠어.’
같이 가겠다는 말을 기대하고 몸을 돌렸던 미하엘의 얼굴이 구겨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자를 잡으면 수사국 본부로 끌고 가도록.”
그럼 각하께서는요?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었지만 미하엘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빨리 가라는 무언의 재촉이 담긴 주군의 눈빛을 보고 만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주군의 명대로 조나단을 잡으러 가면서도 그는 남은 두 사람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하지만 주군과 시선이 마주치고 나서는 뒤를 돌아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형형하게 빛나는 금안은 한 번 더 돌아보면 지옥 구경을 시켜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궁금하지만 목숨을 걸 수는 없지.’
아무것도 풀린 것은 없었지만 미하엘은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일단 주군이 시킨 일이 우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