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제멋대로였긴 했지만 무례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네.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고.”
아, 그래. 새로운 경험이었겠지. 데이모스 공작을 침대에 묶어놓고 그런 짓을 할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겠어. 미친 게 아니면.
‘어디 있긴. 여기 있잖아!’
엘리시아는 절망적으로 머리를 떨어트렸다. 자신도 모르게 평소 습관이 나와버린 것이다.
물론 그 시도는 테이블과 그녀의 이마에 끼어든 커다란 손바닥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
“좋지 않은 버릇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고칠 생각은 없나, 후작?”
“……이 정도는 부딪쳐도 죽지 않습니다, 각하.”
체면이 깎이는 느낌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중얼거리자 나직한 웃음소리가 엘리시아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죽을 정도로 부딪치면 그건 병이고. 그러고 보니 나도 궁금한 것이 있는데 물어도 되겠나?”
“궁금한 것이요?”
곤란했던 주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에 엘리시아는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자세를 바로 한 그녀는 들고 있던 술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그날 밤 난 괜찮았나?”
“……!”
기다렸다는 듯 이어지는 주제에 엘리시아는 방금 전 입에 머금었던 술을 뿜을 뻔했다.
간신히 꿀꺽 삼키기는 했지만 사레에 걸려 몇 번이고 헛기침을 하고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아니 왜 그런 걸 궁금해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이케르는 담담한 목소리로 답해왔다. 표정 역시 차 한 잔 마시는 것처럼 무척이나 담백했다.
“처음이다 보니 미숙했던 것 같아서. 그대를 만족시켰는지 모르겠군.”
“…….”
정말 처음이었어?
믿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서일까, 엘리시아는 뒤통수를 세게 한 대 맞는 느낌에 두 눈을 깜빡였다. 그의 뒷말은 아예 귀에 들려오지도 않았다.
잠시 멍해 있던 그녀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다급히 입을 열었다. 다시 한번 확인하지 않고는 믿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저기 말입니다, 각하.”
“말하게.”
“혹시 제가 처음이신 건 아니시겠지요? 여기서의 처음이라는 건 그 경험 말입니다.”
“맞네만.”
하, 미친.
곧바로 돌아온 대답에 엘리시아는 속으로 욕설을 내뱉으며 예쁜 얼굴을 구겼다.
묶어놓고 덮친 것도 쪽팔려 죽겠는데 내가 처음이란다. 저 데이모스 공작이.
‘어떻게 저 외모에, 저 체격에, 저 신분에 내가 처음일 수 있는 거지?’
따져 묻고 싶었지만 루리엔 말대로 그것도 웃긴 모양새였다.
방만하게 논 것이 문제지 조신하게 행동한 것이 문제는 아니지 않은가.
물고기처럼 입만 뻐끔뻐끔 거리던 엘리시아는 결국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다.
“그…… 죄송합니다, 각하.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울적한 마음으로 사과하자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역시나 느긋하면서도 덤덤한 목소리였다.
“사과를 듣고자 한 말은 아니야. 이미 후작은 충분히 사과했으니. 그냥 그대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궁금했다고 할까. 처음이다 보니 알아둬야 할 것 같아서.”
아 진짜!
엘리시아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처음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찔리는 단어였던가.
‘역시 그냥 없애버렸어야 했어. 총을 쓰든 검을 쓰든.’
트리엘 자작을 살려둔 것에 대한 극심한 회의를 느끼던 그녀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움찔했다.
“후작?”
엘리시아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손을 억지로 얼굴에서 떼어냈다. 지은 죄가 있으니 답변이라도 해줘야 했다.
‘그날 밤이 처음이셨다는 거지……?’
확실히 처음에는 기교가 부족하다고 느꼈었다. 어딘지 모르게 서툴렀다고나 할까.
물론 그것조차도 달아올라 있어서인지 미칠 듯이 좋았지만.
뒤로 가면서는 어땠던가. 그녀가 잘 느끼는 곳만 골라서 움직이지 않았던가. 얼마나 절륜한지 녹진하게 녹아내리다 못해 미칠 것 같은 쾌감을 느꼈었다.
만약 그것이 하면서 습득한 것이라면 이 남자는 그쪽으로는 천재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대로 말해줄 수는 없지.’
눈앞의 남자에 대해 내린 스스로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엘리시아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괜찮으셨습니다. 좀 서투시기는 했지만 뒤로 갈수록 좋아지셨고.”
“나쁘지는 않았단 말이군.”
대충 말했는데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이케르의 모습에 그녀는 살짝 양심에 찔렸다.
어쨌든 이 남자에게는 첫 경험이 아닌가. 그녀의 말이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뭐…… 솔직히 처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저 역시 충분히 만족했으니 그 부분이라면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만.”
머쓱한 기분에 그를 차마 쳐다보지는 못하고 술잔을 내려다보며 말하면서도 엘리시아는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어쩌다가 이 남자를 상대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건지.
그래도 그녀의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슬쩍 본 사내의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렸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행이군.”
만족스러움이 깃든 여유로운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귓가에 낮게 깔렸다.
고개를 들자 술잔을 느긋하게 돌리고 있는 이케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이 남자와 이렇게 앉아 이런 이야기를 하게 될 줄이야.’
세상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고 생각하며 술잔을 입에 가져가던 그녀는 아차 싶었다.
다시 한번 확인받을 기회라고 좋아했는데 예상치 못한 질문에 놀라 하마터면 까먹을 뻔한 것이 아닌가.
마침 기분도 좋아 보이니 슬쩍 물어보면 될 것 같아 엘리시아는 잔을 슬슬 돌리며 농담처럼 말을 던졌다.
“이번일, 정말로 의회에서 약점잡지 않으실 거지요?”
“약속하지 않았던가. 걱정하지 말게.”
역시나 담백하게 대답해오는 이케르를 보며 그녀는 다행이라 생각했다.
내친김에 마음에 걸리던 것까지 확인받기로 마음먹은 그녀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말입니다. 처음이라고 책임져 달라 이런 말씀 하시지는 않겠지요?”
가볍게 묻고 지나가기 위해 농담처럼 던졌다. 그런데 돌아온 것은 그녀가 예상한 대답이 아니라 무척이나 진지한 물음이었다.
“그게 책임지라고 말할 수도 있는 부분인가?”
도리어 궁금하다는 듯 물어오는 이케르를 보며 엘리시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농담하는 것이라고 보기에는 그의 표정이 너무나도 진지했다.
뭐지, 이 인간? 저 나이에 정말로 남녀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닐 테고, 날 놀리는 건가?
살짝 당황한 엘리시아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뭐, 누군가에게는 첫 경험이 소중한 것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말을 하다 보니 뭔가 이상했다. 책임지라는 말 따위 하지 말라고 꺼낸 말이었는데 도리어 빌미를 잡을 수 있게 말해주고 있는 꼴이 아닌가.
아니나 다를까 돌아온 대답에 엘리시아는 또다시 머리를 박고 싶어졌다.
“그렇군. 그렇게 생각한다면 책임지라고 할 수도 있겠군.”
아니, 왜 그렇게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건데.
스스로 무덤을 팠다는 생각에 그녀는 재빨리 말을 돌렸다.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옛날에는 ‘같이 자면 결혼’ 이런 분위기였으니 그런 것이 먹혔을지 모르겠지만 요새는 그런 것이 잘 먹히지 않습니다. 자유로운 연애 사상이 만연해 있으니까요. 연회만 봐도 미혼의 남녀들이 어둠이 깊어지면 쌍쌍이 어디론가 사라지지 않습니까.”
사라진 남녀들이 무엇을 할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어디선가 뒤엉켜서 구르고 있겠지.
결국 장소만 다를 뿐이었다. 손님방 아니면 정원 깊숙한 곳. 뭐, 가끔 술에 취해 떡이 되어 복도에서 일을 치는 커플도 있긴 했었다.
그 정도로 정조의 관념이 희박한 곳이 그녀가 사는 이 나라였다.
그래서 엘리시아는 연회에 오랜 시간 머무르지 않았다.
바람둥이라는 수식어 때문인지 밤이 깊어지면 달라붙는 남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연회에서 실컷 즐긴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제로 그녀가 연회에서 밤을 보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구미에 맞는 사내들을 선택할 수 있는데 무엇 하러 그런 곳에서 상대를 구하겠는가.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이케르와도 얽힐 이유가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어쨌든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엘리시아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야기를 이끌기 위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고작 하룻밤 함께 보냈다고 연인이 되거나 결혼을 하지는 않는다는 거지요. 각하 역시 그렇게 생각…….”
그래도 양심이 아주 조금은 찔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이케르의 뒤쪽으로 시선을 흘렸던 그녀는 말을 하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어느새 온 건지 술집 한구석에 하르가 서 있었다. 그는 눈이 마주치자 입 모양으로 말을 전해왔다.
‘처리됐어. 그러니 그만 나와.’
엘리시아의 두 눈이 반가움에 크게 떠졌다. 드디어 이 묘한 상황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것이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려는 것을 그녀는 재빨리 잡아 내렸다. 눈앞의 남자가 이 상황을 눈치채면 곤란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표정을 유지한 채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자 하르는 곧바로 몸을 돌려 사라졌다.
‘하여간 예쁜 녀석.’
사라진 하르에게 속으로 막 칭찬을 쏟아붓고 있을 때였다. 이케르가 의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러왔다.
“후작?”
아, 나 말하던 도중이었지.
흠칫 놀란 엘리시아는 그의 눈치를 슬쩍 보며 하다만 말을 재빨리 입에 담았다.
“아,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 그보다 각하 역시 그렇게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당연히 동의할 거라 생각하고 꺼낸 말이었다. 그런데 되돌아온 이케르의 대답은 그녀의 생각과 달랐다.
“글쎄. 그건 상대에 따라 다르지 않을까 싶은데.”
“예?”
“상대에 따라 다른 것 같다고 했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왜 여기서 상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건데.
어쩐지 불길한 느낌에 엘리시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그리고 그녀의 예감은 슬프게도 빗나가지 않았다.
“그래서 말인데 난 어떤가?”
“예?”
“그대의 침대를 데워줄 남자가 필요하다면 난 어떤지 묻고 있는 걸세.”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 훅 하고 들어오자 엘리시아는 순간 멍해졌다. 방심하고 있다가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혹해하고 있는 그녀의 귓가에 저음의 목소리가 부드럽게 울렸다.
“쓸 만했다고 했으니 한번 고려해보게. 후작이 필요하다고 하면 언제든 빌려줄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