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미하엘은 또다시 의문에 휩싸였다.
어째서? 무엇 때문에 각하께서 그런 조무래기를 직접 심문하신단 말인가.
‘정말로 조나단 트리엘에게 뭔가 숨겨진 거대한 흑막 같은 것이 있는 건가? 그럼 그자의 몸에 묻어 있던 흙도 평범한 흙이 아니라는?’
역시나 이 사건에 괜히 발을 들였다고 미하엘이 후회하고 있을 때 부관을 혼란에 빠트린 이케르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조나단 트리엘이라는 이름이 미하엘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엘리시아와 그녀의 호위 기사가 당혹한 눈빛을 떠올리는 것을 보고 짐작은 했었다.
두 사람이 조나단을 찾아 보복했으리란 걸. 그런데 설마 땅에 묻었을 줄이야.
’후작답군. 뒤처리만 잘하면 되는 건가.’
이케르는 입매를 느슨하게 늘어트렸다.
그가 조나단 트리엘의 심문을 직접 하겠다고 한 것은 그자의 입에서 혹시라도 엘리시아의 이름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런 사소한 일로 그녀를 구설수에 오르게 할 생각은 없었다. 그 더러운 입에 그녀의 이름을 담는 것이 짜증 날 것 같기도 했고, 그리고…….
‘확인해 둬야겠지. 그녀를 위해서라도.’
조나단 트리엘이 실수로 엘리시아에게 칵테일을 건넸을 리는 없었다.
부작용이 있는 사람의 경우 참석하려는 연회의 식료품 리스트를 전달받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니까.
엘리시아 역시 그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그 정도로 헤리스에 심한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면.
그러니 그녀가 마신 칵테일은 조나단 트리엘이 밖에서 몰래 반입해 들어온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헤리스에 부작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자가 어떻게 알았는지 의심스럽군.’
보통의 귀족들은 음식에 부작용이 있더라도 말하지 않는다. 잘못하면 그것이 악용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실제로 수사국에 들어온 사건 중에도 땅콩 부작용을 이용해 살인을 저지른 경우도 있지 않았던가.
그날 밤 누군가를 찾아 황궁을 돌아다니던 2황자의 부하들을 떠올린 이케르의 금안이 서늘하게 식어 내렸다.
단순히 조나단 그자의 소행만은 아니라고 그의 감이 말하고 있었다.
날카롭게 빛나던 이케르의 눈빛은 우연인 것처럼 가장해 만났던 엘리시아를 떠올리면서 부드럽게 바뀌었다.
술잔을 능숙하게 돌리던 희고 가는 손가락, 새초롬한 얼굴, 끊임없이 그를 살피던 보랏빛 눈동자.
그를 향해 툭툭 말을 던지던 붉고 도톰한 입술을 그대로 집어삼키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아냈다는 걸 그녀는 모르겠지.
그녀를 떠올린 것만으로도 하반신이 금세 묵직해져 오는 것을 느끼며 이케르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아무래도 내가 제대로 발정이 난 모양이야.”
“예?”
“그만 가지.”
몸을 돌려 느긋한 걸음걸이로 걸어가는 상사의 뒷모습을 보며 미하엘은 두 눈을 껌벅였다.
조금 전 뭔가 이질적인 단어가 들려온 것도 같았지만 그는 자신이 잘 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고귀하고 우아한 각하의 입에서 ‘발정’ 같은 그런 상스러운 단어가 나올 리 없지 않은가.
고개를 휘휘 저은 미카엘은 급히 이케르의 뒤를 따랐다.
⚜ ⚜ ⚜
적막함이 감도는 집무실에 서류 넘어가는 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렸다.
“…….”
서류가 한 장 한 장 넘어갈 때마다 엘리시아의 미간이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주 미세하게 꿈틀거렸다.
지금 그녀는 자꾸만 구겨지려는 자신의 미간과 힘겨운 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안건이 거지 같더라도 2황자의 앞에서 대놓고 인상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평등한 기회 좋아하네. 참 골고루도 심어 놨다.’
욕이 절로 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은 엘리시아는 서류를 덮고는 자신을 집요하게 쳐다보고 있는 2황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더스틴 루케 체르만.
그는 황후가 아닌 1황비에게서 태어난 황제의 두 번째 아들이었다. 라세트 공작이 그의 외조부이기도 했다.
제국의 두 공작가 중 하나인 라세트 공작가의 공녀가 황후가 되지 못하고 제 1황비가 되었던 것은 황제가 그녀가 아닌 다른 여인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현 황제는 황위에 오르고 나서도 황후를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고 한다. 후사를 봐야 한다는 귀족들의 말을 한 귀로 흘리거나 무시하곤 했었다고.
라세트 공녀를 비롯해 많은 귀족 영애들이 접근했지만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모양이었다.
그랬던 그가 결혼을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은 사교계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로델린 아르만 백작 영애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이었다.
한 떨기 수선화처럼 청순하고 아름다운 그녀를 보자마자 황제는 곧바로 춤을 신청했다. 그가 황제로 즉위한 후 누군가에게 춤을 신청한 것은 처음이라 모두가 경악했다고 한다.
늦사랑에 빠진 황제는 3개월이 지나기도 전에 아르만 백작 영애를 황후로 맞이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국혼이 있은 지 1년 후 황후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1황자 에드먼드 루케 체르만을 낳았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도 잠시뿐, 얼마 지나지 않아 아르만 백작가는 거대한 규모의 횡령죄에 휩쓸리고 만다. 제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사건이 터진 지 얼마 되지 않아 황제는 갑자기 라세트 공녀를 1황비로 맞이하겠다고 선언했다.
그 이후 아르만 백작가는 낮은 수위의 처벌만을 받고 빠져나오게 되었다고.
그래서 세간에서는 라세트 공작이 황제에게 자신의 딸을 황비로 맞이하는 대신 아르만 백작가를 구해주겠다는 거래를 제안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었다.
혹자는 라세트 공작이 일부러 아르만 백작가를 함정에 빠트린 것이라고도 했는데 진실은 본인들만이 알 일이었다.
확실한 건 황제가 1황비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항상 그녀를 냉랭하게 대하는 데다 정해진 합방일 이외에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그것마저도 바쁘다는 핑계로 넘어갈 때가 많았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1황비는 그 작은 가능성을 움켜쥐고 임신에 성공했고 2황자인 더스틴을 낳았다.
그때부터 라세트 공작은 2황자를 황태자의 자리에 올리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하지만 황제는 틈을 주지 않았다.
결국 1황자가 황태자로 임명되면서 라세트 공작의 야망은 꺾이는 듯 보였다. 다음 해 겨울 1황자가 갑작스러운 병으로 급사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때 2황자의 나이가 스무 살이었다.
라세트 공작은 귀족들을 동원해 황태자를 새로 임명해야 한다고 황제를 압박했지만 황제는 눈도 깜짝하지 않았다.
1황자가 25세에 황태자가 되었으니 2황자 역시 25살이 되면 생각해보겠다며 일언지하에 잘라버린 것이다.
덕분에 황태자 자리는 벌써 4년째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3황자가 이제 열네 살이 되었나?’
1황자가 16살, 2황자가 10살이 되었을 때 황제는 황후와의 사이에서 세 번째 아들을 보았다. 늦둥이 아들이었다.
하지만 태어나자마자부터 모두에게 내보였던 1황자와 달리 귀족들 중 누구도 3황자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었다.
병약하다는 이유로 3황자가 궁 밖으로 나온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크려면 아직 멀었네. 게다가 몸이 약하다고 하니 2황자와 맞서기도 어려울 것 같고.’
2황자를 견제할 만한 대상이 없다는 것에 속으로 한숨을 내쉰 엘리시아는 더스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그녀가 집무실로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할 일이 없는 건지 사람 감상이 취미인 건지. 저런 진득진득한 시선을 감상이라고 말하기에는 우스운 감이 있지만.’
지금처럼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기까지 처음에는 무척이나 힘들었었다.
고상한 척, 너그러운 척하는 시선 아래에는 그녀를 탐하고 싶어 하는 욕망이 짙게 깔려 있었으니까.
고문 같은 그 시선을 잘 버텨낸 어린 시절의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며 엘리시아는 일자로 닫혀 있던 입매를 살짝 휘었다.
싫은 인간을 앞에 두고 미소를 지어 보일 수 있는 지금의 모습 역시 부단한 노력으로 이뤄낸 결과였다.
“괜찮은 안건이군요. 이 정도 후보들이라면 저쪽에서도 반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다 읽은 서류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엘리시아는 마음과는 정반대의 말을 능청스럽게 내뱉었다.
더스틴이 그녀를 불러 안건을 내밀었다는 것은 라세트 공작과 이야기를 끝냈으며 의회에 올리겠다고 결정했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이미 결정된 일에 말을 얹어 2황자의 기분을 거스를 필요는 없었다. 지금이 카멜리아 후작가에 있어서 중요한 시점이기도 했고.
그녀의 평가가 마음에 들었는지 더스틴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역시 후작도 라세트 공작과 같은 의견이군. 그렇다면 의회에 상정하는 것도 반대하지 않겠지?”
“물론입니다. 사흘 뒤 있을 의회에 올리실 겁니까?”
“그럴 생각이야. 베르텐 후작이 후보자들을 제법 잘 골라왔더군.”
그의 입에서 베르텐 후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엘리시아의 눈매가 살짝 치켜 올라갔다.
마케인 베르텐.
1년 전 전대 베르텐 후작에게서 작위를 승계받고 30대 초반의 나이에 후작이 된 남자로 전반적인 능력도 괜찮은데다 외모도 제법 준수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정중하고 예의 바른 척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음흉하고 간사함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것은 뒤로 제쳐두더라도 출세를 위해서라면 웃는 얼굴로 무슨 짓이든 저지를 수 있을 만한 인간이었다.
‘그래서 끼리끼리 논다고 하는 거겠지.’
2황자와 딱 어울리는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엘리시아의 두 눈에 짜증이 스쳐 지나갔다.
더스틴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다음 동작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소파로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은 다음 거만하게 다리를 꼰 채 두 팔을 소파 위에 걸쳐놓고 말을 걸어오겠지.
그녀의 예상은 한 치도 빗나가지 않았다.
소파에 편안하게 등을 기댄 더스틴은 입을 열었다.
황금으로 뽑은 듯한 금빛 머리카락 아래 오만함을 담은 푸른 눈동자가 그녀에게로 향했다.
“신경 쓰이나?”
데이모스 공작과 비교했을 때 좀 뒤떨어질 뿐이지 더스틴도 껍데기는 훌륭했다. 제국 인기남 순위에서 2위를 뺏겨본 적이 없을 정도의 외모이니까.
“쓰이지 않는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요.”
속이 껍데기의 반 정도만이라도 쓸 만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엘리시아가 여상하게 답하자 더스틴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내의 커다란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베르텐 후작이 일을 제법 잘하기는 하지만 신경 쓸 것 없어. 그대만큼 하려면 아직 멀었으니까.”
겉에서 본다면 그저 격려하는 것처럼 보일만 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깨를 감싼 엷은 셔츠 위로 은근슬쩍 움직이는 손가락들은 명백한 의도를 띄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안건, 가져가서 좀 더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싱긋 웃은 엘리시아는 곧바로 몸을 숙여 테이블 위에 놓아둔 서류를 집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내의 손이 그녀의 어깨에서 떨어져 나갔다.
분명 그가 유혹하는 걸 느꼈을 텐데도 서류를 들어 올리는 그녀의 얼굴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평온하기만 했다.
더스틴의 입꼬리가 못마땅함을 띄고 살짝 비틀렸다. 하지만 그는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차피 의회에서 후작이 발표해야 할 안건이니 꼼꼼히 봐두는 게 좋겠지.”
“감사합니다. 그 외에 또 하실 말씀은 없으십니까?”
“한 가지 있긴 한데.”
“하문하십시오.”
서류를 챙긴 엘리시아는 더스틴을 쳐다보았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는 기분이 무척 좋지 않았다. 그가 집적거렸던 어깨에 남아있는 불쾌한 촉감 때문이었다.
그렇게 나올 줄 예상하고 서류를 테이블 위에 올려두기는 했지만 매번 당할 때마다 기분이 더러웠다.
‘돌아가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
오늘 입었던 셔츠를 아예 태워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더스틴의 물음에 흠칫 몸을 굳혔다.
예상치 못했던 질문이 그녀의 귀에 날아와 박혔기 때문이었다.
“그날 밤 후작, 어디에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