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흐음~ 베라무스가 이렇게 움직인단 말이지.”
서류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던 루리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헬리오스의 확장세가 빨라서인지 베라무스의 움직임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베라무스.
제국 뒷골목을 지배하고 있으며 밀수, 마약 등의 불법적인 사업을 비밀리에 자행하고 있는 가장 큰 암흑조직.
문제는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모두 라세트 공작가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베라무스 암흑조직의 실제적인 주인이 라세트 공작가였으니까.
3년 전 그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루리엔은 솔직히 놀라움보다 희열을 느꼈다.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던 라세트 공작가의 수입원을 드디어 찾아냈다는 것에 대한 기쁨이었다.
솔직히 남부의 오르테 영지와 작은 루비광산만을 가지고 그렇게 자금을 끝없이 써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오르테 영지 속에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도 숨기고 있지 않은 한.
그래서 그녀는 하르와 의논해 엘리시아의 지원 하에 헬리오스를 만들었다. 베라무스의 세력을 잡아먹고 엘리시아에게 힘을 심어주기 위한 새로운 암흑조직이었다.
헬리오스를 만들고 키우는데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면서 카멜리아 후작가의 가세 회복이 예상보다 3년 정도 늦어졌지만 후회는 없었다.
생각보다 하르가 헬리오스를 잘 이끄는 덕분에 이제는 베라무스가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자리를 잡았으니 말이다.
“이제 슬슬 치고 나가야겠어. 적어도 베라무스와 비등하게, 아니 그 이상으로 올라서야 의미가 있으니까.”
이번 일을 포함해 지금까지 2황자와 라세트 공작이 엘리시아를 손에 넣기 위해 던져왔던 함정들이 떠오르자 루리엔은 서늘한 눈빛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그런 더러운 놈들의 손이 자신의 친우에게 닿는 것을루리엔은 가만히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그건 하르도 마찬가지일 터.
후작 부부가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엘리시아가 후작위를 계승 받았을 때, 그녀와 하르는 후작 부부의 위패 앞에서 굳게 맹세했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엘리시아와 카멜리아 후작가를 지켜내겠다고. 그리고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겠다고.
자신들을 어둠의 수렁 속에서 꺼내어 사람으로 살게 해준 엘리시아의 작고 하얀 손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헬리오스가 베라무스를 누를 수 있도록 성장시켜야 했다.
라세트 공작가의 금전적인 압력을 이겨내고 카멜리아 후작가가 원래의 권세를 되찾는다면 2황자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엘리시아에게 쉽게 손을 댈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서둘러야겠지.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진행될 수 있도록.’
머릿속으로 헬리오스를 움직일 다음 계획을 세우고 있던 루리엔은 벌컥 하고 집무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누구인지 궁금해할 필요도 없었다. 노크도 없이 저렇게 문을 마음대로 열고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이 저택의 주인이자 그녀의 친구인 엘리시아밖에 없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성큼성큼 책상으로 걸어가는 친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표정이 불퉁한 것으로 보아 짜증이 나 있는 듯했다.
“고생했어.”
“어.”
루리엔의 인사치레에 짤막하게 답한 엘리시아는 책상 의자에 앉자마자 그대로 추욱 늘어졌다. 2황자와 독대한 시간이 무척이나 피곤했다는 표현이기도 했다.
“별일은 없었고?”
“거지같은 안건 하나랑 지겨운 잡담.”
여전히 축 늘어진 채 답하던 엘리시아는 더스틴이 마지막에 물었던 질문을 떠올리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 그리고 그 자식이 그날 밤 내가 어디에 있었는지 묻더라.”
“그날 밤이라면 황실 연회의 밤?”
“응. 이야기를 하려고 찾았는데 안보이더래. 진짜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욕을 잔뜩 해줬지.”
“잘했어. 변명도 의논했던 대로 잘한 거지?”
“당연하지. 헤리스 부작용이 나타나서 홀을 나섰는데 그 이후에 정원에서 눈을 떴다고. 차림새가 딱 미친 여자 꼴이라 사람들 눈에 안 띄게 조용히 후작저로 돌아갔다고 했어.”
“그랬더니 뭐래?”
“흐트러진 몰골이라도 그것대로 매력적이었을 거 같다나? 보지 못해 아쉽다던데?”
“미친 새끼.”
루리엔의 입에서 곧바로 욕설이 튀어나오자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나보고는 고운 말 쓰라면서.”
“이럴 땐 안 써도 돼. 그보다…….”
고개를 들어 엘리시아를 쳐다본 루리엔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조금 전 친우가 들어올 때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셔츠가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옷 갈아입었네? 또 그 인간이 집적댔어?”
작은 변화도 놓치지 않은 그녀의 예리한 질문에 엘리시아는 뚱한 목소리로 답했다.
“격려하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어깨를 잡더라고. 내 어깨가 제 것이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야. 기분 나빠서 갈아입고 왔어.”
“그 못된 버릇은 여전하네. 그래서 셔츠는 태우라고 시켰고?”
“물론이지. 그걸 내가 내버려 둘 리가 없잖아.”
엘리시아는 당연한 것 아니냐는 표정을 지은 채 책상 위에 올려 있는 찻주전자로 손을 뻗었다.
비어있는 찻잔에 차를 가득 채운 그녀는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이었다.
“그보다 빨리 새로 하나 구해야겠어.”
“뭘?”
“남자. 없으니까 더 쉽게 보는 느낌이야.”
“남자라…… 나쁘지 않지. 이번에는 어떤 스타일로 할 건데?”
“똑같지 뭐. 다른 사람들 앞에 내세우기 좋은 남자. 외모도 신분도.”
“데이모스 공작 같은?”
쿨럭.
차를 홀짝이고 있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훅 치고 들어온 루리엔의 말에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갑자기 여기서 왜 그 남자 이야기가 나온단 말인가.
엘리시아가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기침을 하든지 말든지 그녀의 친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구할 거면 그 정도 수준으로 구해. 그래야 2황자가 함부로 굴지 못하지.”
어이가 없어진 엘리시아는 기침이 멈추자마자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그 정도 남자를 구하는 게 쉬운 줄 알아?”
“어렵지 않을 것 같던데? 솔베이크 백작, 루이만 후작 영식도 그렇고 아, 켄틀러 후작도 만나 달라고 청해왔다면서. 세 가문 다 중립에 서 있는 데다 외모도 성격도 그 정도면 괜찮던데. 물론 데이모스 공작에게 견줄 바는 아니지만.”
“아니 그건……!”
어떻게 알았는지 루리엔의 입에서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던 남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나오자 엘리시아는 또다시 말문이 막혔다.
루리엔의 말대로 데이모스 공작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세 남자 다 그 정도면 괜찮은 수준이었다. 한 가지 단점만 뺀다면.
입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인상을 쓰며 투덜거렸다.
“그렇긴 한데 백작위 이상의 남자면 다루기 어렵단 말이야. 떼어내기도 쉽지 않고.”
“그것도 능력이지. 그러다 눈 맞으면 결혼하면 되는 거고. 솔직히 신경 쓰기 싫어서 항상 낮은 작위의 남자를 만나는 거잖아.”
“…….”
“2황자 때문에 제국의 바람둥이라는 칭호까지 달아 놓고서 그 정도도 못 해?”
젠장.
루리엔의 말에 정곡을 찔려 말문이 막힌 엘리시아는 얼굴을 팍삭 일그러트렸다.
그렇다고 해서 반박할 말도 없었다. 다루기 귀찮아서 낮은 작위의 남자들을 만난다는 친우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이런 흐름 좋지 않은데.’
계속해서 잔소리가 날아들 것 같은 느낌이 들자 엘리시아는 재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뭔가 자연스럽게 넘어갈 만한 다른 이야깃거리가 필요했다.
마침 그녀의 두 눈에 아직까지 손에 쥐여 있는 서류가 보였다. 검토해보겠다고 하고서 2황자에게서 받아온 서류였다.
이거다 싶었던 엘리시아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루리엔에게 다가간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남자는 내가 알아서 구해올 테니 신경 쓰지 말고 넌 이거나 봐줘.”
의도가 너무 뻔히 보였던 걸까, 피식 웃은 친우는 손을 벋어 서류를 받아들었다.
“뭔데?”
“아까 말한 거지같은 안건.”
“흐음~”
루리엔의 손에서 서류가 천천히 넘어갔다.
옆에 놓인 소파에 털썩 걸터앉은 엘리시아는 그녀가 다 읽기를 기다리며 입을 열었다.
“저쪽에서 이 안건에 숨겨진 함정을 눈치챌 수 있을지 모르겠어. 이 안건이 통과되면 2황자 그 자식의 세력이 더욱 커질 텐데.”
“잠깐만. 좀 읽어보고.”
기다리라는 듯 손을 살짝 들어 보인 루리엔은 서류에 집중했다. 잠시 후 그녀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그러네. 아주 교묘하게 함정을 파놨네. 어디다 쓰려고 사람들을 재야에 묻어두나 했더니 이거였구나?”
“그러니까. 몇 개 요직을 추가했던 것도 이 안건을 위해서였더라고. 그 자리를 자신의 사람들로 채우고 싶은 거지.”
엘리시아의 의견을 들으며 마지막 장까지 꼼꼼하게 읽은 루리엔은 서류를 덮고 물었다.
“재밌네. 안건도 잘 만들었어. 이거 누가 작성한 거래?”
“베르텐 후작.”
“역시. 너와 그자 말고는 이쪽에 이 정도 안건을 만들어 낼 만한 인물이 없지. 이 정도라면 저쪽에서 모를 수도 있을 거 같아. 계속해서 지켜봐 오지 않았다면 눈치채기 어렵겠어.”
“그럼 곤란한데.”
엘리시아가 못마땅한 표정을 떠올리자 루리엔의 입꼬리가 의미심장하게 올라갔다.
“곤란하지 않게 하면 되지.”
“무슨 소리야?”
“걱정하지 말라는 얘기야. 의회에서 네 속 터지지 않게 해줄 테니까. 가서 쌓인 일이나 해.”
서랍에서 새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내 들고 무엇인가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 루리엔을 지켜보던 엘리시아는 머리를 긁적이고는 몸을 돌렸다.
‘하기야 속만 안 터지면 되지.’
루리엔이 무엇을 하려는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굳이 물어야 할 필요를 엘리시아는 느끼지 못했다.
무엇을 하던 그것은 그녀를 위한 일일 테니까.
책상으로 향하는 엘리시아의 발걸음은 집무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와 달리 무척이나 가벼웠다.
⚜ ⚜ ⚜
부리를 아래로 숙이고 날개를 접은 새가 세공된, 고급스러운 은빛 페이퍼 나이프가 우아하게 편지 봉투를 갈랐다.
열린 봉투 속에서 내용물을 꺼내 확인한 이케르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곧바로 옆쪽에 봉투와 서신을 내려놓았다.
보좌관을 통해 그가 꼭 확인해야만 하는 서신들만 추렸음에도 서신은 서른 개 이상 그의 책상 위에 쌓여 있었다.
다섯 개의 편지 봉투를 확인하고 여섯 번째 편지 봉투에 손을 뻗었던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새하얀 봉투에는 앞면에는 ‘이케르 데이모스 공작 귀하’라는 문구가, 뒤쪽에는 ‘H’ 라는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봉투의 앞뒤를 확인한 이케르는 무심한 눈빛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오랜만이군. 8개월 만인가?”
편지를 잠시 쳐다보던 이케르는 페이퍼 나이프를 들어 느릿하게 편지 봉투를 갈랐다.
봉투 속에는 새하얀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길쭉하고 굵은 남자다운 손가락이 느긋하게 종이를 꺼냈다.
아무런 무늬도 표식도 없는 평범한 종이인 것으로 보아 흔적을 남기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접힌 종이를 펼쳐 속의 내용을 확인한 이케르의 금안에 흥미로운 눈빛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