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자신도 모르게 이케르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려던 엘리시아는 아리아의 말에 흠칫했다.
“후작님, 어디 가세요?”
그녀는 고개를 숙여 아리에아게 속삭였다. 두 눈을 곱게 접어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용무가 좀 급해서요. 다녀오겠습니다.”
“아, 죄송해요. 다녀오세요.”
자연스러운 신체 활동을 방해했다는 미안함 때문인지 얼굴을 살짝 붉힌 아리아의 배웅을 받으며 엘리시아는 자연스럽게 홀을 나섰다.
그녀를 따라 움직이는 몇몇 귀족들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누군가 자신의 행방을 묻더라도 아리아가 잘 대답해줄 터였다.
‘어디로 갔지?’
홀을 나선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흔적을 찾았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걸어가고 있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우연인 것처럼 그의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는 해답을 그에게 직접 물어 얻어낼 생각이었다.
정말 상황을 몰라서 가만히 있는 건지 아니면 그녀 때문에 가만히 있는 건지는 본인이 가장 잘 알 테니까.
그의 목적지가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그 전에 따라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다행히 이케르의 발걸음은 빠르지 않았다. 아니, 평소보다 더 느리게 느껴졌다. 그녀가 조금만 더 빨리 걷는다면 따라잡을 수 있을 만큼.
어느 정도 따라붙은 엘리시아는 입을 열어 이케르를 부르려고 했다. 하지만 살짝 벌어졌던 그녀의 입술은 뒤쪽에서 들려오는 귀족들의 목소리에 다시 다물렸다.
슬쩍 돌아본 그녀의 눈에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오는 두 귀족의 모습이 들어왔다.
블랭키 백작과 하더린 자작. 모두 귀족파의 귀족들이었다. 그리고 하필이면 운 없게도 라세트 공작의 측근이기도 했다.
‘이런 망할.’
재빨리 고개를 바로 한 엘리시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가 여기서 이케르를 붙잡고 이야기를 나눈다면 곧바로 라세트 공작의 귀에 들어갈 확률이 백 프로였다.
잠시 갈등하던 엘리시아의 두 눈에 결심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왼쪽 복도로 발걸음을 틀었다.
⚜ ⚜ ⚜
복도를 걷고 있던 이케르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그를 열심히 쫓아오던 엘리시아의 기척이 갑자기 왼쪽으로 빠진 것이다.
오랜 시간 무술을 단련해 일정 경지에 오른 그는 기감만으로도 누가 따라오는지, 몇 명인지, 거리는 어떻게 되는지 바로 파악이 가능했다.
엘리시아가 자신이 있는 곳에서 빠르게 멀어져 가자 그의 눈빛이 서늘하게 내려앉았다.
‘저자들 때문인가 보군.’
그가 토론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은 엘리시아를 꼬셔내기 위함이었다. 그녀라면 분명 평소와 다른 그의 행동에 사심이 있는지 없는지 따져 물으러 올 테니까.
자신의 의도대로 그녀가 곧바로 따라나서자 그는 일부러 걸음을 느릿하게 걸었다. 그녀가 따라와 잡아주기를 바라면서.
평소 쉬는 방이 아닌 화장실 쪽으로 향한 것도 혹시라도 자신과 함께 있는 것을 들켜 문제가 생기면 그녀에게 변명할 거리를 주기 위함이었다.
조금씩 그녀와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기대감이 커지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귀족 둘의 기척이 더 느껴졌다. 엘리시아의 뒤쪽이었다.
순간 이케르는 그녀가 자신을 잡는 걸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정말로 엘리시아의 기척이 왼쪽으로 꺾어지자 여유롭게 보이던 그의 얼굴에 조용히 금이 갔다.
동시에 그녀의 뒤로 나타나 자신의 계획을 망쳐버린 귀족들에게 잔잔한 분노가 일었다.
이렇게 되면 귀찮게 황제에게 부탁까지 하면서 간식을 내리게 한 의미가 없지 않은가.
[허허, 별일이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공작 자네가 간식 이야기를 꺼내다니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비밀은 지켜줄 테니 앞으로도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하게나.]
껄껄 웃으며 말하던 황제의 모습이 떠오르자 이케르의 미간이 더 진한 선을 그리며 접혔다.
물론 황제가 그에게 후하게 구는 이유를 알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담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이쪽에서 움직여야 하나?’
엘리시아가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50여 미터 앞의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튼다면 그녀와 마주칠 수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 경우 어디를 가고 있었는지 그녀에게 핑계를 댈 만한 것이 마땅치 않았다.
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며 어떻게 할까 고민하고 있던 이케르의 입꼬리가 어느 순간 슬며시 올라가며 금안에 다시 즐거움이 떠올랐다.
멀어졌던 엘리시아의 기척이 다시 가까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를 향해 빠르게 다가오던 그녀가 멈춰 서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전 그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까 말까 고민했던 그 갈림길이었다.
이케르는 일부로 왼쪽 벽 쪽으로 붙어 느릿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갈림길에 접어들자 기다렸다는 것처럼 곧바로 새하얀 두 손이 튀어나와 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이케르의 입매가 느슨하게 휘어졌다.
⚜ ⚜ ⚜
‘뭐야, 왜 이렇게 쉽게 딸려 오는 건데?’
이케르의 멱살을 꽉 쥐고 있던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녀의 계획은 이케르보다 먼저 갈림길에 도착해 그를 그녀가 서 있는 복도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뒤따라오는 귀족들의 시선에서 피할 수가 있으니까.
하지만 막상 먼저 도착하고 나니 그를 끌어들일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이케르를 불렀다가는 목소리 때문에 들킬 확률이 컸고 지나가는 그의 팔을 잡거나 튀어 나가 그를 멈춰 세우면 자신의 모습이 드러날 확률이 너무 높았다.
엘리시아가 머리 아프게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그의 발걸음 소리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갈림길에 모습을 드러낸 이케르를 보는 순간 초조해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뻗었다.
그의 멱살을 쥐고서야 자신이 무슨 짓을 한 건지 강한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미 저지른 일, 그가 뿌리치지 않기 만을 바라며 엘리시아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이케르를 끌어당겼다.
그런데 예상했던 반발은 없고 온몸에 힘을 뺀 사람처럼 그가 쑥 끌려오는 것이 아닌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내 힘이 정말로 센 건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지만 공작을 침대에 묶은 것도 그렇고 지금 그의 멱살을 잡고 끌어들인 것도 그렇고 뭔가가 많이 이상했다.
혼란에 빠져 있던 엘리시아는 귓가에 속삭이듯 낮게 내려앉는 저음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후작에게 내 멱살을 쥐는 취미가 생긴 모양이야.”
온화한 빛을 띤 부드러운 금안과 시선이 마주친 엘리시아의 얼굴이 머쓱함에 달아오르며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공작의 멱살을 쥐었으니 이건 시정잡배라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였다.
“그게…… 죄송합니다. 각하께 꼭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만 무례……!”
멱살을 쥔 손을 놓을 생각도 미처 하지 못한 채 급하게 사과를 하던 엘리시아의 두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단단한 팔이 그녀의 허리를 감싸 끌어당김과 동시에 두 발이 땅에서 떨어지는 느낌이 들더니 시야가 휘익 하고 바뀐 것이다.
어느새 엘리시아는 조금 전 자신의 옆에 있던 커다란 기둥 뒤로 이동해 있었다. 그것도 이케르의 품에 안긴 채.
그녀의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새하얀 셔츠뿐이었다.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상황에 고개를 들려던 그녀는 그대로 굳어졌다. 비에 젖은 축축한 숲을 떠올리게 하는 그윽한 우디 향이 그녀의 코끝에 스며들어왔다.
연회의 밤, 그녀를 더욱더 달아오르게 했던 그 향이었다.
그때의 강렬한 쾌감을 떠올린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가 순간 흐려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정신을 차렸다. 지금 그런 걸 떠올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게 무……!”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고 화를 내려 했을 때였다.
뜨거운 숨이 귓불에 닿아오며 깊고 낮은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에 조용히 울렸다.
“쉿. 조용히 하게 지금의 모습을 저들에게 들키면 후작이 곤란해질 것이 아닌가.”
“…….”
무슨 소린가 싶어 눈꼬리를 치켜 올렸던 엘리시아는 또다른 발소리와 함께 대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오자 몸을 굳혔다.
그녀의 뒤에서 걸어오던 블랭키 백작과 하더린 자작이 분명했다.
두 사람이 숨을 죽이고 있는 사이 블랭키 백작과 하더린 자작이 갈림길에 가까워졌는지 대화 소리가 점점 더 크게 들려왔다.
처음부터 듣지 못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요 근래 수도를 달궜던 이슈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귀를 쫑긋 세우고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엘리시아의 몸이 갑자기 동상처럼 굳어졌다.
그들의 입에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전 우리 앞에 있던 카멜리아 후작은 어디로 간 건가? 저쪽에는 별다른 것이 없는 걸로 아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쪽에 휴식처가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엘리시아는 들킬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자신을 안고 있는 사내에게 바짝 달라붙었다.
이케르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눈치채지 못했다. 귀를 쫑긋 세운 채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뿐이었다.
다행히 그들의 주제는 그녀의 행방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바뀐 주제 역시 그녀에게 달가운 것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카멜리아 후작, 참 예쁘고 똑똑하단 말이야. 도도하고 앙칼진 것도 매력적이고.”
“카멜리아 후작님이야 제국에서 인정하는 미인이니까요.”
엘리시아의 표정이 떨떠름하게 변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 원치 않는 외모 이야기를 듣는 건 참 별로였다.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그 사이 블랭키 백작의 말이 이어졌다.
“난 그녀가 정복을 입은 모습이 드레스를 입은 모습보다 더 좋더군. 뭐랄까 적당히 풍만한 가슴도 그렇고 한 손에 들어올 것 같은 가는 허리도 그렇고, 몸매의 굴곡도 확연하게 드러나서 더 야하게 느껴진단 말이지.”
이런 미친.
자신을 상대로 한 음담패설에 엘리시아의 예쁜 얼굴이 팍삭 구겨졌다.
속으로 블랭키 백작을 욕하고 있던 그녀는 순간 공기가 서늘해지는 것 같은 느낌에 움찔했다.
이상하게도 갑자기 주변 온도가 1도는 내려간 것 같았다. 남자의 품 안에 안겨 있으니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뭐지?’
당황하던 그녀는 하더린 자작의 목소리에 귀를 쫑긋했다.
“실례지만 백작님, 그런 말씀 어디 가서 함부로 하시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린가?”
“2황자 전하께서 카멜리아 후작을 원하고 있다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카멜리아 후작에게 손대지 말라고 경고까지 하셨는데 잘못해서 전하의 귀에라도 들어가면 불벼락이 떨어질 수도 있습니다.”
하더린 자작의 말에 엘리시아의 눈매가 새초롬하게 올라갔다.
2황자가 자신을 원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저따위 말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에 절로 욕이 나왔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왜 제 거야. 그래서 라세트 공작 쪽의 귀족들이 그동안 내게 집적대지 않았던 건가?’
이케르의 멱살을 쥐고 있는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블랭키 백작에 이어 2황자까지 막말 퍼레이드가 이어지자 엘리시아의 혈압이 수직 상승한 것이다.
‘저 인간들을 그냥!’
속으로 이를 바득 갈던 엘리시아는 두 남자의 발걸음이 갈림길에서 멈춰 서자 흠칫 놀라 숨을 멈추었다.
하필이면 왜 저기 멈춰 선단 말인가.
동그랗게 떠진 엘리시아의 두 눈 속 보랏빛 눈동자가 당혹감을 담고 이리저리 움직였다.
‘설마 이쪽으로 오지는 않겠지.’
조금 전 분노했던 것도 잊어버린 채 엘리시아는 조용히 상황을 살폈다. 그녀는 자신이 여전히 이케르의 멱살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왜 멈춰서는 건가?”
블랭키 백작에 하더린 자작이 답했다. 이전보다 낮아진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깃들어 있었다.
“조금 전 저희들의 앞에 데이모스 공작 각하도 계셨습니다. 혹시나 근처에 계신가 싶어서 말입니다.”
“데이모스 공작 각하가 앞에 계셨다고? 전혀 몰랐네.”
“그러실 수 있지요. 카멜리아 후작님이 데이모스 공작 각하와 저희 사이에 계셨으니까요. 중간에 사라지시기는 했습니다만.”
“그랬군. 자네 말이 맞네. 신중해서 나쁠 건 없지. 나도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기쁩니다.”
이미 늦었거든? 다 들었거든?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삐뚜름하게 입술을 끌어올리던 엘리시아는 이어진 블랭키 백작의 말에 다시 긴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