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그런데 여기 휴식할 만한 공간이 많은 건가? 카멜리아 후작도, 공작 각하도 갑자기 사라지다니.”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두 분 다 황궁에 출입이 잦은 분들이시니 자신만의 비밀공간이 있으실 수도 있겠지요.”
“흠, 설마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엘리시아는 소리 없는 신음을 흘렸다.
블랭키 백작이 별생각 없이 던진 말이 그녀의 양심을 사정없이 찌른 것이다. 같이 있는 걸 넘어서 지금 그녀는 이케르의 품 안에 안겨 있었으니까.
‘설마 들키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던 그녀는 하더린 자작의 말에 안심했다.
“후작은 한참 전에 왼쪽으로 갔습니다. 데이모스 공작 각하가 어느 쪽으로 가셨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앙숙 관계인 두 사람이 같이 있을 리가 있겠습니까?”
“하긴, 그럴 리가 없지. 자, 의회가 다시 개최되기 전에 어서 화장실이나 다녀오세.”
두 남자의 발소리가 다시 들려오기 시작하며 복도 너머로 천천히 멀어져갔다.
완전히 소리가 사라지고 난 후 안도의 숨을 내쉬던 엘리시아는 귓가에 들러붙는 저음에 흠칫 몸을 굳혔다.
“내 멱살이 후작의 마음에 든 모양이군.”
“예?”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고개를 번쩍 든 엘리시아는 자신의 두 손이 아직까지 이케르의 멱살을 잡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헉!”
불에라도 데인 듯 급히 손을 떼고 뒤로 물러서려던 그녀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몸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천천히 아래로 향한 엘리시아의 당혹한 시선이 자신의 허리에 감겨 있는 사내의 단단한 팔에 머물렀다.
“이런, 실례했네.”
자신의 팔에 닿은 그녀의 시선을 느낀 것일까, 이케르가 팔을 풀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질척거림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담백한 태도였다.
너무 깔끔하다 보니 할 말도 없어 엘리시아는 헛기침하며 답했다.
“흠흠, 괜찮습니다. 덕분에 곤란한 상황은 피했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그런데 내게 무엇을 물으려했던 건가? 멱살까지 쥔 걸 보면 급한 건으로 보이던데.”
“아니, 그러니까 멱살을 쥔 건……!”
변명할 만한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입술만 몇 번 달싹이던 엘리시아는 한숨을 내쉬고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괜찮네. 그리 나쁜 기분도 아니었고. 그래서 말하려던 게 뭔가?”
뭐지, 이 남자 정말 성인군자인가? 왜 화를 안 내?
너그러운 이케르의 대답에 잠시 멍해졌던 엘리시아는 재빨리 정신을 되찾았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아까 의회에서 제가 상정한 안건에 대해 왜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던 겁니까?”
그녀의 물음에 이케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그 안건에 대해 내 의견이 필요했던 건가?”
“평소에는 제가 안건만 상정하면 곧바로 반박의견을 던지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오늘은 가만히 계시니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케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 위로 조용히 내려앉았다.
질문 의도를 살피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눈빛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고 뜨거운 것이었다.
자신도 모르게 엘리시아가 눈을 내리깔았을 때 대답이 아닌 질문이 돌아왔다.
“이상하군. 내가 가만히 있으면 후작, 그대에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뒷말은 없었지만 엘리시아는 이케르가 무엇을 묻는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안건이 통과될 기회가 있는데 왜 굳이 쫓아와 그 기회를 내던지려 하냐는 것이었다. 그녀가 눈앞의 사내라고 해도 충분히 가졌을 만한 의문이었다.
‘이 남자, 그 안건이 어떤 안건인지 정말 모르는 거야?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아니면 정말 나 때문인가?’
엘리시아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의 눈빛과 표정만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가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의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각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이 저 때문은 아니겠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저와 하룻밤을 보낸 것 때문에 봐주시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겁니다.”
이케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무척이나 매력적이지만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미소였다.
“그러니까 내가 그대와 하룻밤을 보낸 것 때문에 의회 시간에 침묵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는 거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날 쫓아온 거고.”
“뭐, 정리하자면 그렇습니다만.”
“그게 문제가 되나?”
“예?”
“내가 그대를 봐주는 것 말이야. 아까도 말했지만 도리어 기꺼워해야 하는 것 아닌가? 안건이 무사히 통과될 기회인데.”
엘리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케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정치판은 거짓말은 기본이요 권모술수가 판치는 곳이었다.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그러니 그의 말처럼 기회로 여기고 기뻐하는 것이 맞았다.
만약 이번 건이 통과시켜도 될 만한 건이었다면 그녀 역시 이게 웬 기회야 하고 모른 척했을 것이다.
문제는 이번 안건이 통과시켜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눈에 힘을 빡 주고는 단호하게 말했다.
“제가 싫어서 그렇습니다.”
“음?”
“지난번에 말씀드린 것처럼 업무에 사적인 감정이 섞이는 걸 싫어해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안건이 통과된다면 제 기분이 더러울 것 같습니다.”
너무 세게 말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살짝 들었지만 어쩐지 눈앞의 사내라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 그날 밤 이후부터 그녀에게 유하게 굴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설마 미소까지 지을 줄이야.
선이 뚜렷한 매력적인 입술이 느슨하게 늘어지는 것을 엘리시아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별걱정을 다하는군. 말하지 않았나. 일에 감정을 섞는다면 그건 미숙한 것이라고.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안심해도 되네.”
의회에서의 무뚝뚝한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깊게 가라앉은 저음이라 그런지 몸 깊숙한 곳 어딘가를 자극하는 것 같았다.
‘이런 느낌, 별로 좋지 않은데.’
마음이 아니라 몸이 반응한다고 해도 어쨌든 그녀에게는 좋을 것이 없었다. 상대는 얽혀서는 안 되는 사람이니까.
엘리시아는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입니다. 그럼 제 기우였던 걸로 생각하고 각하의 의견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귀중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판에 박힌 듯한 예의 바른 말을 쉬지 않고 뱉어낸 그녀는 고개를 숙여 예를 갖추고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 했다. 이케르가 부르지만 않았더라면.
“후작.”
“예?”
그의 부름에 엘리시아는 흠칫 놀랐다.
혹시 책잡힐만한 말을 한 것이 있나 싶어 쳐다보자 이케르는 손가락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갈 때 가더라도 이건 바로 해주고 가야 할 것이 아닌가.”
그의 손가락 끝이 가리키고 있는 것은 그의 목에 매인, 거의 풀어진 채 흐트러진 은빛 크라바트였다.
이케르와 크라바트를 번갈아 쳐다보던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설마 제가 그런 것은……?”
“후작 말고 내 멱살을 쥘 사람이 있던가.”
웃음기 어린 그의 대답에 엘리시아의 입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이건 어떻게 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당황하는 사이 이케르는 손을 들어 올려 길쭉한 손가락으로 크라바트를 풀어냈다.
그가 내민 크라바트를 엘리시아가 엉겁결에 받아들자 이케르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몸을 숙였다.
“혼자서는 익숙하지 않아서 말일세. 후작이 도와주면 좋겠군.”
검은 속눈썹 아래 숨겨진 그의 강렬한 금빛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물들었다.
반면 크라바트를 내려다보는 엘리시아는 패닉상태였다.
크라바트를 손에 쥔 채 정신없이 눈동자를 굴리던 그녀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각하. 제가 크라바트를 매본 적이 없다는 건 알고 계십니까?”
초짜인 내게 맡겼다가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말을 나름대로 돌려 한 것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강적이었다.
“그런가? 그럼 이 기회에 매보면 되겠군. 기꺼이 그대의 첫 경험 상대가 되어주지.”
“…….”
손에 쥐어진 크라바트와 내밀어진 이케르의 목을 번갈아 쳐다보던 엘리시아는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설마 크라바트 하나 못 맬까.’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설마가 곧 현실이 되리라는 걸.
잘못 매어진 크라바트를 푸르는 엘리시아의 이마에 작은 힘줄이 잡혔다. 매고 푸르기만 벌써 다섯 번째였다.
‘아니, 왜 제대로 안 매지는데!’
아무리 처음 해본다고는 하지만, 손재주가 없기는 하지만, 크라바트 하나 매지 못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이를 악물고 여섯 번째에 도전했던 그녀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정말로 손재주가 없다는 것을.
이러다가는 회의가 시작하겠다 싶어 엘리시아는 크라바트 매는 걸 포기하고 입을 열었다.
계속해서 몸을 숙이고 있는 사내를 보기 무안해서인지 아니면 미안해서인지 그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소심하게 나왔다.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매본 적 없다고. 각하나 저나 이게 무슨 시간 낭비입니까.”
엉망으로 매진 크라바트를 다시 풀어 손에 쥔 엘리시아는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시녀를 불러 부탁을 하겠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이상한 소문이 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하시죠. 제가 먼저 나가서 가장 먼저 나간 시녀에게 크라바트를 건네주겠습니다. 그럼 각하께서 시간을 두고 뒤따라 나오시면서 크라바트를 잃어버렸다고…….”
“기다리게, 엘리.”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 그럴듯한 방법을 말하고 있던 그녀의 팔을 이케르의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잡아 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고개를 돌리던 엘리시아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팔에서 흘러내린 그의 손이 그녀의 손에서 크라바트를 받아가면서 손끝이 스친 것이다.
별다른 의미 없는 접촉이었음에도 닿은 곳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켜쥐던 그녀는 귓가에 내려앉는 저음의 목소리에 놀라 재빨리 손을 폈다.
“낯선 이의 손을 타는 것보다는 내가 하는 것이 나을 것 같군.”
고개를 들자 크라바트를 목으로 가져가는 이케르의 모습이 보였다. 스스로 매려는 것 같았다.
당황한 엘리시아는 커다란 두 눈을 깜빡이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에 혼자 못하신다고……?”
“익숙하지 않다고 했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
아, 망할.
이케르의 말이 기억난 엘리시아는 눈매를 살짝 일그러트렸다.
그의 말대로 그는 익숙하지 않다고 했지 못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한마디로 그녀 혼자 잘못 이해하고 추태를 벌이고 있었던 셈이었다.
‘아니, 익숙하지 않다면서 목을 내밀면 당연히 못 하는 줄 알지!’
그녀가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는 사이 이케르는 목에 크라바트를 두르고 묶기 시작했다.
느릿하면서도 섬세하게 매듭을 만드는 희고 길쭉한 사내의 손가락에 엘리시아의 시선이 닿았다. 단순한 동작임에도 묘하게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손가락에 머물러 있던 그녀의 눈이 천천히 위로 더듬고 올라갔다.
깎아놓은 듯한 턱을 거쳐 시원스레 뻗은 콧대를 지나 매력적인 음양을 드리운 깊은 눈매에 도달한 순간,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황금빛 눈동자가 그녀와 시선을 맞춰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