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라세트 공작은 엘리시아 카멜리아가 후작위를 승계받자마자 그녀를 귀족파의 수장으로 내세웠다.
그녀가 정계에 나서면 카멜리아 후작가를 따르던 귀족들이 어쩔 수 없이 움직일 거라 생각한 것이다.
모든 것은 그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반발하던 귀족들이 어린 카멜리아 후작을 보호하기 위해 나서기 시작하면서 귀족파는 빠르게 안정되어 갔다.
대신 귀족파는 둘로 갈라졌다.
카멜리아 후작가를 따르는 귀족들, 그리고 라세트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
다행히 엘리시아 카멜리아도, 카멜리아 후작가도 아직까지는 그의 손바닥 위라 문제가 되지 않지만 혹시 모를 경우를 대비해서라도 그는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그중 하나의 방법이 2황자인 더스틴과 엘리시아의 결합이었다. 결혼만큼 확실한 족쇄도 없으니까.
‘대체 그놈은 저 어린 계집 마음 하나 잡지 못하고 무엇을 하는 건지.’
라세트 공작은 얼마 전 보고받았던 것을 떠올리고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더스틴이 엘리시아에게 사용한 방법은 나쁘지 않았다. 쓰고 버릴 패로 조나단 트리엘 남작을 선택한 것도 괜찮은 수였다.
문제는 결과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계획만 잘 세우면 뭘 하는가,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을. 그러니 귀찮더라도 일단은 엘리시아를 다독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라세트 공작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엘리시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 말게, 후작.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하지만 각하.”
“나를 믿지 못하는 건가?”
“……아닙니다.”
두 눈 가득 베르텐 후작에 대한 불만을 담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말에 한발 물러서는 엘리시아의 모습에 라세트 공작은 만족감을 느꼈다.
그는 적절한 위로금을 그녀에게 주기로 마음먹었다. 로켄드 산맥 아래의 작은 사파이어 광산 정도면 오늘의 수모에 대한 위로는 될 터였다.
“내일 공작저에 잠깐 방문하게. 자네에게 줄 것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그럼 각하만 믿고 있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서서 걸어가는 엘리시아를 보면서 라세트 공작은 생각했다.
이대로만 말을 잘 들으면 이번 카멜리아 후작은 제 어미처럼 급사하는 일 없이 제 명대로 살 수 있을 거라고.
⚜ ⚜ ⚜
“믿기는 뭘 믿어. 차라리 지나가던 개를 믿겠다. 웃기지도 않아.”
라세트 공작과 베르텐 후작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온 엘리시아는 입매를 심술궂게 비틀었다.
처음은 연기로 시작했지만 베르텐 후작이 라세트 공작을 믿고 적반하장격으로 뻔뻔스럽게 나왔을 때는 정말 열불이 치밀었다.
목구멍 아래까지 치밀어 오른 욕을 입 밖으로 내뱉지 않고 간신히 참아낸 자신이 대견할 정도였다.
다행히 라세트 공작이 끼어들어 일이 커지지는 않았지만 베르텐 후작에 대한 그녀의 분노는 여전히 풀리지 않고 있었다.
“두고 봐. 언젠가 그 인간 제대로 혼쭐을 낼 테니까.”
한참을 씩씩거리며 걷던 엘리시아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째서인지 주변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여긴 어디야?”
멈춰선 그녀는 주변을 살폈다. 정말로 모르는 곳이었다.
화가 치밀어 발길 가는 대로 걷다 보니 평소 그녀가 다니던 길이 아닌 이상한 길로 빠진 것 같았다.
길을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는지 둘러 보았지만 사람은커녕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자 엘리시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별수 없나? 온 길로 돌아가는 수밖에. 이게 다 그 재수 없는 두 인간 때문이야.”
라세트 공작과 베르텐 후작을 싸잡아 욕하며 그녀가 몸을 돌리려 했을 때였다.
갑자기 옆쪽 수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뭔가 싶어 돌아본 엘리시아는 두 눈을 깜빡였다.
수풀 속에서 나온 것은 놀랍게도 목검을 든 미소년이었다.
황금으로 뽑은 듯한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달빛을 머금은 은빛 눈동자가 신비스럽게 빛났다.
햇살에 그을린 갈색 피부가 아니었다면 요정으로 착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소년이었다.
크면 대단한 미남이 되겠다고 감탄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순간 멈칫했다.
‘잠깐만. 금빛 머리카락에 은빛 눈동자? 왜 기시감이 들지?’
그녀의 머리가 빠르게 굴러갔다. 소년의 머리카락 색은 2황자의 머리카락 색과 똑같았다. 그리고 눈동자 색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소년의 눈동자 색이 황후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엘리시아는 왼쪽 팔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머리를 숙였다.
말로만 들었던 3황자가 바로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라시안 루케 체르만 황자 전하.”
제국에서는 황족에 대한 인사가 정해져 있었다. 기본 문구는 똑같고 그 속에 들어가는 명칭만 달라지는 형태였다.
황제는 하늘, 황태자는 태양, 황자는 작은 태양, 황녀는 달이었으니 황자인 라시안은 작은 태양이라 칭하는 것이 맞았다.
라시안은 엘리시아가 자신을 알아보자 놀란 듯했다.
“날 어떻게 아는 거지?”
경계심이 가득한 소년의 물음에 엘리시아는 몸을 살짝 숙여 시선을 맞추며 답했다.
키나 체격만 봐서는 열다섯, 열여섯이라 해도 믿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까지 솜털이 보송보송한 얼굴에는 앳됨과 순수함이 엿보였다.
“황제 폐하의 머리색과 황후 마마의 눈동자 색을 지니셨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못 알아보는 자들도 있었다.”
“어디든 눈치 없는 자는 있기 마련이니까요.”
그녀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은빛 눈동자 가득 어려 있던 경계심이 사라지며 그 자리를 호기심이 채웠다.
“……넌 누구야? 시녀는 아닌 것 같은데.”
“엘리시아 카멜리아입니다. 카멜리아 후작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네가 카멜리아 후작이라고?”
놀라는 라시안을 보면서 엘리시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도 의외였지만 왜 놀라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슨 문제라도?”
“카멜리아 후작이면은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라고 들었는데.”
“…….”
엘리시아의 얼굴에 묘한 표정이 떠올랐다.
황궁 깊숙한 곳에 숨겨진 채 보호받고 있는 황자가 자신을 알고 있다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좀 그렇지 않은가.
귀족파의 수장 이런 것이 아니라 제국 최고의 바람둥이라니. 아무리 사실이라도 이건 좀…….
‘3황자의 교육 선생이 누구지? 누구기에 이따위로 가르치는 거야?’
시간이 될 때 누군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속으로 이를 갈고 있던 엘리시아는 라시안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혹시 내 말이 실례가 되었다면 미안합니다, 후작. 그대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이미지와 너무 달라 놀랐던 것 같습니다.”
황자의 사과에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신분을 알게 된 순간부터 반말이 존댓말로 바뀐데다가 소년의 표정을 보아하니 의도적으로 던진 말은 아닌 듯했다.
‘품성이 착한 아이네.’
엘리시아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어렸다.
거지 같은 2황자만 상대하다가 아직 손때가 묻지 않은 3황자를 보자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그녀는 조금 더 황자와 말을 나눠보기로 했다.
“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기에 놀라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바람둥이라고 해서 굉장히 화려한 사람일 거라 생각했습니다. 머리도, 화장도, 드레스도.”
라시안의 대답을 들은 엘리시아는 납득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지금 그녀는 머리도 단정하게 하나로 올려 묶었고, 정복을 입었으며, 아주 간단한 화장만을 한 상태였으니까.
그래도 소년의 잘못된 인식을 잡아줄 필요는 있을 것 같아 그녀는 라시안과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바람둥이라고 해서 꼭 화려하게 꾸미지는 않습니다. 물론 저도 연회에 참석하면 꾸미기는 합니다만 제 외모 자체가 화려한 편이라 화장이나 장신구 같은 것들은 최대한 간단하게 하는 편입니다. 과한 것만큼 보기 싫은 것은 없으니까요.”
“그렇습니까?”
“예, 전하. 그리고 주제넘을 수도 있지만 한 말씀 더 드리자면 외모를 보고 그 사람을 섣불리 판단하시면 안 됩니다. 방심하셔도 안 되시고요. 앞에서는 미소를 띠고 등 뒤에서 칼을 찔러 넣는 사람들도 많이 있으니까요. 제가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라시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귀족파가 형님을 지지하고 있다는 것도.”
“그걸 알고 계셨다면 제 인사만 받고 넘어가셨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요.”
눈앞의 어린 황자가 걱정이 된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오늘 우연히 만나기 전까지 황궁에 수없이 왔다 갔다 했던 그녀도 3황자를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만큼 황제가 3황자를 잘 감추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모습을 드러내고 무방비하게 그녀와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그녀야 3황자를 해칠 마음이 조금도 없지만 라세트 공작의 측근이나 2황자를 따르는 귀족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
하지만 막상 말을 끝내고 나자 엘리시아는 머쓱해졌다. 어쩐지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서였다.
다행히 라시안은 그녀의 진심을 알아준 것 같았다.
“그렇군요. 내 생각이 짧았습니다. 말로만 듣던 사람을 직접 눈앞에서 보니 신기했던 것 같습니다. 후작의 말 새겨듣도록 하겠습니다.”
말 잘 듣는 학생을 가르치면 이런 느낌일까. 왠지 모르게 뿌듯함을 느끼던 엘리시아는 뭔가 묘한 위화감을 깨달았다.
‘그런데 황자 전하의 말투가 왜 이렇게 익숙하지? 어디서 많이 들은 말투인데.’
그녀의 미간이 살짝 접혔을 때였다. 그녀의 의문을 풀어주듯 황자의 말투와 비슷한, 그러나 소년의 음성이 아닌 사내의 중후한 음성이 그녀의 앞쪽에서 들려왔다.
“여기 계셨습니까, 전하.”
라시안의 뒤쪽 수풀에서 나오는 남자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랍게도 라시안의 뒤쪽으로 나타난 사람은 이케르였다.
그녀가 매주었던 크라바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단정하게 잠겨 있던 셔츠의 단추는 느슨히 풀려 있었다. 양쪽 팔의 소매 역시 팔꿈치 위까지 걷힌 상태였다.
정복 차림에서 재킷만 벗었을 뿐인데도 사내답게 벌어진 어깨는 물론 셔츠 위로 근육 잡힌 탄탄한 몸이 비추어 보이는 것만 같았다.
평소라면 감탄하며 감상했을 만한 완벽한 몸매였지만 엘리시아의 눈에 그런 것이 들어올 리 없었다.
‘아니 이 남자가 왜 저기서 나오는 건데?’
그녀는 진심으로 당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