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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23/133)

23화

오늘 의회 이후로 한동안 만날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쳤으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케르 역시 그녀와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그녀를 발견한 그의 금안에 희미한 당혹감이 깃들었다.

하지만 엘리시아는 그런 그의 반응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스승님.”

이케르를 보고 반색한 라시안이 그를 부른 호칭 때문이었다.

‘스승님?’

안 그래도 크게 떠져 있던 엘리시아의 두 눈이 더욱더 커졌다.

그러고 보니 라시안이 들고 있던 목검도 그렇고 이케르의 복장도 그렇고 훈련할 때의 모습이었다.

‘데이모스 공작이 3황자의 검술 스승이었어? 그런데 지금 이 상황, 나한테 안 좋은 거 아닌가?’

라시안과 이케르를 번갈아 쳐다보는 엘리시아의 뒷머리에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목검을 들고 있다는 건 연무장이 근처에 있다는 것이고, 연무장이 근처에 있다는 건 3황자의 궁 역시 가까이에 있다는 의미였다.

보통 황자들은 자신의 궁 옆에 연무장을 두고 있었으니까.

죽 그녀는 황궁 어딘가의 정원에 발을 들인 것이 아니라 3황자의 궁에 딸린 정원을 무단 침입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게다가 3황자의 검술 스승이 데이모스 공작이라는 비밀까지 알게 되어버린 것이 아닌가.

전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얼떨결에 알게 된 엘리시아는 곧바로 결심했다.

‘뜨자. 빨리 뜨는 게 답이다.’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갈 땐 튀는 것이 상책이었다. 잘못하다가 염탐을 하러 온 걸로 오해라도 받으면 그야말로 곤란했다.

하지만 그녀는 스스로의 상황을 정리하느라 모르고 있었다.

이케르의 금안에 어려 있던 당혹감이 어느새 사라지고 기대에 찬 즐거운 눈빛으로 바뀌어 있다는 것을.

“전하, 그럼 전 이만 돌아…….”

예를 갖추며 그만 가보겠다고 라시안에게 말하려던 엘리시아는 이케르의 목소리에 흠칫했다.

“카멜리아 후작이 여기는 웬일이지?”

“……데이모스 공작 각하.”

아, 그냥 보내주지 왜 잡고 난리야.

못마땅함에 눈꼬리를 치켜올린 것도 잠시, 그녀는 곧 눈에 준 힘을 풀고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런 상황이라면 자신이 데이모스 공작이었다고 해도 똑같이 불러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온 이유를 물어봤겠지.

튀는 건 틀렸다고 생각한 엘리시아는 순순히 입을 열었다.

“오늘 안건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아 무작정 걸었는데 길을 잃어버린 모양입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에 있더군요. 길을 물어볼 사람을 찾다가 황자 전하를 만나 뵙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라세트 공작과 베르텐 후작 때문에 화났다는 것만 살짝 바꾼 채 있었던 일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데이모스 공작을 상대하면서 어설픈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었다.

사실대로 말했는데도 믿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하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그랬군. 오늘은 그럴 만했지. 그럼 이제 기분은 괜찮아 진 건가?”

순간 엘리시아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지금 이 남자가 뭐라 한 것인가?

“예?”

아무래도 환청이 들린 것 같아 다시 물었지만 그녀의 귀에 돌아온 그의 물음은 전과 동일했다.

“기분은 괜찮아졌는지 물었네.”

“어… 음… 완전히 풀리지는 않았습니다만.”

당황해서일까. 얼떨결에 솔직하게 답한 엘리시아는 자신의 입을 때리고 싶어졌다. 이 무슨 애 같은 대답이란 말인가.

역시 이곳을 빨리 벗어나야겠다고 그녀가 생각하고 있을 때, 이케르가 라시안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전하, 카멜리아 후작이 총을 다룰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총 말입니까?”

라시안의 은빛 눈동자에 놀람의 빛이 짙게 떠올랐다. 하지만 놀란 것은 소년만이 아니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엘리시아 역시 그대로 굳어졌다.

‘내가 총을 사용한다는 걸 저 남자가 어떻게 알았지?’

그녀의 동공이 잘게 떨리는 사이 라시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케르에게 되물었다.

“카멜리아 후작이 사격을 할 줄 안다는 말입니까? 후작은 여성이 아닙니까?”

“여성이라고 해서 무기를 다루지 못하라는 법은 없지요. 어떠십니까? 편견도 깰 겸, 이 기회에 후작의 실력을 구경하시는 것은. 검이 아닌 다른 무기를 보는 것도 전하께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아니, 아니 잠깐만. 총을 사용하는 건 어떻게 알았다고 해도 갑자기 여기서 왜 내 실력 얘기가 나오는 건데.

어이가 없었지만 지금은 따지기보다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엘리시아는 재빨리 두 사람의 사이에 끼어들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저는 이만 가보…….”

하지만 이번에는 라시안이 그녀를 그대로 두지 않았다.

“총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후작?”

“예, 뭐, 어쩌다 보니…….”

“내 주변에는 사격을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어서 말입니다. 견식을 넓힐 기회를 주지 않겠습니까?”

기대 가득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소년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낭패감을 느꼈다. 거절의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조금만입니다. 저도 그리 실력이 좋은 편은 아니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내 궁은 이쪽입니다, 후작.”

신이 나서 앞서가는 라시안의 모습에 엘리시아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였다.

느긋한 저음이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후작의 솜씨, 나도 기대가 되는군.”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자 언제 왔는지 바로 옆에 서 있는 이케르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금안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지금 딱 악당처럼 굴고 계신 것 아십니까, 각하?”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말이 곱게 나갈 리 없었다. 퉁명스러운 엘리시아의 말에 이케르는 살짝 입매를 올렸다.

“날 보고 악당이라 하니 하는 말인데. 악당들이 확실하게 상대를 입막음하는 방법, 알고 있나?”

“예? 갑자기 무슨….”

“대답해보게.”

엘리시아는 눈을 깜빡였다.

악당들이 확실하게 상대를 입막음하는 방법이라니. 이게 웬 뜬금없는 질문이란 말인가.

당황스러워서인지 대답이 조금 늦게 나갔다.

“…당연히 협박 아닙니까?”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

뭔가 싶어 미간을 찌푸리던 엘리시아는 순간 숨을 멈췄다.

그가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면서 익숙한 사내의 향기가 훅 밀려 들어온 것이다. 비 온 뒤 숲 내음을 연상시키는 깊고 은은한 우디향이 그녀의 코끝을 간질였다.

평소 그답지 않게 짓궂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를 마주한 그녀는 긴장감에 눈을 깜빡였다.

아주 짧은 침묵이 흐르고 숨결이 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

낮게 깔린 깊고 굵은 목소리는 몸의 솜털이 곤두설 만큼 자극적이고 위험스러운 것이었다. 그 내용 또한.

“상대를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

“……예?”

“그러니 따라오게, 후작.”

그녀를 졸지에 공범으로 만들어 버리고 느긋하게 걸어가는 이케르의 뒷모습을 엘리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내가 왜…….”

뭔가 상황이 단단히 꼬인 것 같았지만 지금의 그녀로서는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그녀는 이케르의 뒤를 따랐다. 더 이상 꼬이는 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 ⚜ ⚜

3황자의 궁전은 엘리시아가 생각했던 대로 그녀가 있던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파르바티였나? 3황자가 받은 궁전의 이름이. 아름다운 궁전이네.’

라시안과 이케르가 권총을 가지러 궁에 들어간 사이 엘리시아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며 주변을 구경했다.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끌려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건 그녀의 성격에 맞지 않았다. 어떻게든 되겠지가 엘리시아 카멜리아의 신조였으니까.

잘 가꿔진 궁전의 정원을 보며 그녀는 내심 감탄했다.

2황자 더스틴이 쓰는 궁보다 규모는 작았지만 구조물이나 장식에 있어 모든 것이 조화롭고 어긋남이 없었다.

특히 엘리시아의 마음에 든 것은 분수대였다.

높이 솟구쳐 보석처럼 아롱지며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도 아름다웠지만 그 아래 커다란 날개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있는 붉은 새의 조각에서 그녀는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스스로를 보호하고 있는 그 새의 모습이 마치 지금의 자신의 모습과 비슷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날아오를 수 있을 거야. 우리 둘 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리고 있던 엘리시아는 갑자기 이케르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오자 흠칫 놀랐다.

“피닉스를 보고 있나?”

당황해 고개를 돌리자 언제 왔는지 바로 옆에 서 있는 그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기척 좀 내고 오십시오. 간 떨어지겠습니다.”

불만이 가득한 엘리시아의 말에 이케르의 입매가 부드럽게 늘어졌다.

“미안하군. 습관이 돼서. 다음에는 발소리를 내보도록 하지.”

“됐습니다. 오늘 이후로 이렇게 사적으로 만날 일이 설마 또 있겠습니까?”

“너무 그렇게 확신하지 말게. 오늘만 해도 후작의 계획에 없던 일이 아닌가.”

“그런 각하께서 억지로……!”

자신도 모르게 발끈했던 엘리시아는 말을 멈추고 후우 하고 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지금 이 상황은 눈앞의 사내가 일방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기엔 어폐가 있었다.

3황자를 발견했을 때 인사만 하고 바로 돌아섰더라면 그를 만날 일도, 이렇게 끌려올 상황도 생기지 않았을 테니까.

“아닙니다. 제 잘못도 있으니 대충 넘어가지요. 그보다 황자 전하께서는요?”

“마탑에 연락하고 온다고 하더군.”

타인에게 총을 빌려주기 위해서는 마탑으로부터 주문을 받아 총에 걸려 있는 소유자 인식 마법을 해제해야만 했다. 물론 사용이 끝난 후 마법을 다시 걸 때도 마찬가지였다.

총을 소지하고 있기에 잘 알고 있는 사실이라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녀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라시안이 돌아오기 전까지 계속될 것 같았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엘리시아였다.

그녀는 이런 분위기가 무척이나 불편했다.

아무리 하룻밤 진하게 몸을 섞었다고 해서 갑자기 없던 내적 친밀감이 생길 리 만무하니 당연한 일이었다.

차라리 대화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 엘리시아는 계속해서 궁금했던 질문을 입에 담았다.

“제가 총을 사용하는 건 어떻게 아신 겁니까?”

“그대가 요청한 허가서에 승인했었으니까.”

“각하께서요?”

엘리시아는 돌아온 이케르의 대답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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