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133)

24화

총기 보유 및 사용 허가를 내어주는 곳이 수사국이기는 하지만 허가서에 찍힌 것은 황제의 직인이었다. 그러니 그녀는 당연히 황제가 승인했을 거라 생각했었다.

“원래는 폐하께서 승인하셔야 하나 귀찮으셨는지 내게 떠넘기시더군. 자신에게는 보고만 해달라면서 말이야.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가 올린 허가요청서가 들어왔었지.”

“그렇군요.”

엘리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데이모스 공작에게 보이는 신뢰가 원체 크다 보니 그냥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황제의 숨겨진 아들이 아니냐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떠도는 거겠지.’

어깨를 으쓱하던 그녀는 문득 루리엔과 하르에게 설득당해 총의 사용 허가서를 수사국에 제출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검을 쓰고 있다 보니 총은 무척이나 위험한 무기였다.

그렇기에 총을 소지하는 것은 무척이나 까다롭고 어려웠다.

총을 만들기 위해서는 마탑에 주문을 넣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국왕이 인정하는 허가서가 필요했다. 그리고 허가서를 받으려면 명확한 신분, 총을 소지해야 하는 정당한 이유가 있어야 했다.

그런 과정들을 힘들게 통과해 허가서를 받더라도 돈이 없으면 주문은 불가능했다.

총 하나를 구매하기 위해 드는 비용이 귀족 가문의 한 해 평균 예산과 맞먹다 보니 웬만한 재력이 아니고서는 주문서를 넣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엘리시아 역시 총의 가격을 알고서는 반대했었다.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신 이후 갑자기 나타난 채권자들로 인해 가문이 휘청거리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루리엔이 뭐라 했던가.

[지금 가장 중요한 건 엘리시아 카멜리아, 너야. 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가문을 재기시키는 것도, 원래의 권세를 되찾는 것도. 그러니 네 몸을 지킬 무기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해.]

그래도 엘리시아가 머뭇거리자 루리엔은 놀라운 사실을 그녀에게 알려주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카멜리아 가문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 많은 안배를 해두었다는 것을 엘리시아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런 날이 올 것을 미리 알기라도 한 것처럼 어머니가 해놓은 안배들은 그녀가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절대적인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다시 한번 깨닫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에게 하르 역시 말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힘을 키워, 엘리. 그것이 돌아가신 후작님에게 네가 해드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니까.]

루리엔과 하르의 말은 옳았다. 그녀가 살아있어야 모든 것이 가능했다. 가문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도, 과거의 명성을 되찾는 것도.

결국 엘리시아는 총기 보유 허가 요청서를 수사국에 제출했다.

반려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총을 보유하려는 이유가 단순히 몸을 지키기 위한 것뿐이다 보니 설득력이 낮았던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허가는 쉽게 떨어졌고 덕분에 엘리시아는 총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이 남자가 승인한 거라고?’

그녀는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이케르를 쳐다보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총을 손에 넣는 것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엘리시아는 문득 궁금해졌다.

왜 그런 빈약한 이유에도 그가 승인을 해 주었는지. 총기 보유 허가 요청서를 낸 사람들도 다들 그녀와 같이 적었을 텐데.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꺼냈다.

“각하,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뭐지?”

“신변을 보호하겠다는 단순한 이유였는데 왜 승인을 해 주신 겁니까?”

엘리시아의 물음에 잠시 침묵했던 이케르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때 후작이 막 성인이 되었던 걸로 기억하네.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어 가문을 이끌어가려면 자신의 몸을 지킬 무기 하나 정도는 필요할 거라 생각했었지.”

“…….”

“단순한 이유지만, 누군가에겐 절실할 수 있으니까.”

엘리시아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총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이케르의 배려 덕분이라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당황한 것이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기분 탓일까?

길게 늘어진 검은 속눈썹 아래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가 녹아내릴 듯 부드럽게 느껴지는 것은.

누군가 깃털로 심장을 간지럽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던 엘리시아는 발걸음 소리에 흠칫 놀랐다.

고개를 돌리자 그들을 향해 빠르게 걸어오는 라시안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전하께서 오시는군.”

이케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엘리시아의 앞에 도착한 황자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손에 들고 있던 총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가져왔습니다. 폐하께서 제게 선물해주신 총입니다.”

엘리시아는 라시안이 내민 총을 내려다보았다. 은색인 그녀의 것과 달리 황자의 것은 황금색이었다.

남자용이어서 그런지 사이즈도 크고 총구도 길었지만 사용하는데 크게 문제될 것 같지는 않았다.

손을 내밀어 총을 받아들면서 그녀는 노파심에 다시 한번 물었다.

“마탑에 연락은 하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마법 해제는 하고 왔고 다시 마법을 걸기 위한 주문까지 받아두었으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라시안은 엘리시아를 향해 싱그럽게 웃었다.

“그럼 잠시 빌려 쓰겠습니다.”

마탑의 허락까지 떨어진 이상 사양하는 것도 우스운 모양새라 엘리시아는 총을 들어 올려 가까운 곳의 나무를 겨눠보았다.

그녀의 것보다 조금 더 무겁기는 했지만 부담스럽지는 않았다.

어떤 걸 가지고 시범을 보여줄까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케르가 나섰다.

“과녁이 될 만한 것이 필요하겠군. 만들어 주지.”

“각하께서 말입니까?”

“그 정도는 가능하거든.”

느긋한 미소를 머금은 이케르가 허공을 향해 목검을 한 번 휘두르자 놀랍게도 총을 쏘기 적당한 거리에 빛으로 된 작은 원들이 불규칙하게 나타났다.

엘리시아는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그가 마검사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눈앞에서 마법을 보니 무척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더구나 그는 정말로 그녀의 솜씨를 보고 싶은 건지 크기도 위치도 모두 다르게 빛의 원들을 만들어 놓았다.

어쩐지 호승심이 끓어오른 엘리시아는 안전장치를 풀고 총을 들어 올려 빠른 속도로 쏘기 시작했다.

총이 발사될 때마다 반발력에 의해 높이 올려 묶은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럼에도 빠른 속도로 과녁을 맞혀나가는 엘리시아의 자세에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그녀가 쏜 총알들은 하나의 빗나감도 없이 모두 빛의 원 각각의 정중앙을 꿰뚫고 지나갔다.

마지막 총알을 쏜 그녀는 총을 내렸다.

결과를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수백 번 수천 번의 연습을 통해 닦아놓은 실력은 결코 목표물을 놓치지 않을 테니까.

아니나 다를까 곧바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대단합니다, 후작.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라시안은 진심으로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대단한 사람을 보는 듯한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를 마주하고 있으니 어쩐지 머쓱해져 엘리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감탄할만한 실력은 아닙니다. 훈련하면 누구나 이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럴 리가요. 저도 가끔 연습해봐서 알지만 후작처럼 정확하게 맞추는 것은 굉장히 어렵더군요. 혹시 움직이는 것도 가능합니까?”

“예, 뭐, 과녁만 있다면…….”

“내가 만들어 주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케르는 허공을 향해 목검을 슥 휘둘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아까와 똑같은 모양의, 이번에는 움직이기까지 한 빛의 원들이 나타났다.

‘아니 왜 저렇게 빨라?!’

엘리시아는 속으로 기함했다.

공작저에서도 그러더니 저 사내는 여유로워 보이는 태도와 달리 동작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이래서야 무서워서 함부로 말도 못 꺼내겠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엘리시아는 총을 들어 과녁을 겨누었다. 멈춰있든 움직이든 그녀에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일정하고 빠른 속도로 총이 발사되며 과녁들이 하나둘씩 총알에 꿰뚫려 사라졌다.

마지막 빛의 원까지 정확하게 해치운 그녀는 또 다른 걸 시킬까 싶어 얼른 총의 안전장치를 채웠다.

옆에서 이케르의 나직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무시했다.

황자의 기대 어린 눈빛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더 이상 구경거리가 되는 건 사양이었다.

그녀가 총을 내리자 라시안이 박수를 치며 다가왔다. 황자의 두 눈은 조금 전보다 더 반짝이고 있었다.

“정말 대단한 실력입니다. 스승님의 말씀대로 무기를 다루는 것은 성별과는 관계가 없군요. 후작 덕분에 또 하나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그래서 말입니다만, 후작.”

“예, 전하.”

“사격하는 법을 제게 가르쳐주시지 않겠습니까?”

“예?

갑자기 훅 들어온 예상치 못한 제안에 엘리시아는 흠칫 놀랐다.

“아니, 그건…….”

“일주일에 두 시간, 아니 한 시간 만이라도 괜찮습니다.”

자, 잠깐만. 이야기가 왜 그렇게 흐르는 건데?

엘리시아는 진심으로 당황했다. 괜히 실력을 보였다 후회가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총을 돌려주며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나 제가 좀 많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른 분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필요하시다면 추천……은 해드릴 수 없지만 알아봐 드릴 수는 있습니다.”

갑자기 말을 바꾼 것은 그녀에게 총의 기초를 알려주었던 노장이 얼마 전 수명을 다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떠올라서였다.

만약 그가 살아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엘리시아는 황자에게 그를 추천했을 것이다. 그의 가르침 덕분에 그녀가 지금의 실력을 가질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녀의 말은 황자에게 조금도 먹히지 않았다.

“알아보는 것은 스승님을 통해서나 폐하를 통해서 나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후작만큼 실력을 지닌 사람은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듭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이라도 괜찮습니다.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라시안이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자 엘리시아는 당황함을 넘어 난감해졌다.

아무래도 황자는 데이모스 공작에게 검만 배운 것이 아닌 듯했다.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것도 그렇고 밀어붙이는 것도 그렇고 딱 닮은 모습이었다.

‘데이모스 공작이 둘이라니.’

이건 정말로 좋지 않다고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