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역시 이 자리를 빨리 떠야 해.’
자신이 왜 여전히 이곳에, 그것도 3황자와 데이모스 공작과 함께 있는지에 대해 엘리시아는 심각한 회의감을 느꼈다.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조합이었다. 3황자와 데이모스 공작, 그리고 귀족파의 수장인 자신이라니.
그녀는 눈앞의 황자가 자신으로 인해 다치기를 바라지 않았다.
성품도 바르고 눈빛도 올곧고 총명한 데다 이해도 빠르고 무엇보다 정신이 똑바로 박힌 것 같았다.
스승이 데이모스 공작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이대로만 잘 큰다면 3황자는 황제가 될 수 있는 충분한 가능성이 보였다. 그 망할 거지같은 2황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렇기에 더욱더 그녀는 빨리 이곳에서 퇴장해야만 했다.
지금이 그때라 생각한 엘리시아는 라시안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을 꺼냈다.
“전하, 전하를 처음 뵈었을 때 제가 주제넘게 드렸던 말씀 기억하십니까?”
그녀의 물음에 라시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기억합니다. 후작은 나보고 조심해야 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저는 귀족파의 수장이고 데이모스 공작 각하와 달리 전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해가 될 수 있는 사람이지요.”
잠시 말을 멈춘 엘리시아는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황자를 향해 정중하게 예를 취했다.
“그런 이유로 저 엘리시아 카멜리아는 황자 전하의 과분하신 제안을 거절하는 바입니다. 부디 양해 부탁드립니다.”
⚜ ⚜ ⚜
멀어지는 엘리시아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던 이케르는 라시안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스승님의 말씀이 맞았습니다. 선한 사람이더군요. 카멜리아 후작은.”
빙그레 웃는 황자의 얼굴에는 조금 전까지 어려 있던 소년의 풋풋함은 사라지고 어른스러움이 감돌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변화에도 이케르는 조금의 놀람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는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카멜리아 가문의 가주이니까요. 어떤 상황에서도 악해질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들은 것만으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후작이 정말로 더스틴 형님의 사람이었다면 내게 그런 말은 해주지 않았겠지요.”
라시안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에게 조언해주던 엘리시아의 모습을 떠올렸다.
[제가 귀족파의 수장이라는 건 알고 계십니까?]
[그걸 알고 계셨다면 제 인사만 받고 넘어가셨어야 합니다. 이렇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시는 것이 아니라요.]
말로만 듣다가 실제로 본 카멜리아 후작은 화려하게 피어난 붉은 장미처럼 무척이나 아름답고 매혹적인 사람이었다.
첫인상은 도도하고 싸늘해 보였지만 상대를 배려하는 말투나 눈빛에서 마음이 여리고 품성이 올바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스승님의 눈을 사로잡은 거겠지. 어떤 여자에게도 시선 한 번 주지 않던 저 무심한 눈길을 말이다.
라시안은 스승이 카멜리아 후작을 쳐다보던 눈빛을 떠올리며 빙긋이 웃었다.
살아남기 위해 숨을 죽이고 몸을 숙인 소년은 아직 어리지만 눈치가 빨랐고 상대의 변화에 민감했다.
그런데 어떻게 눈치 못 챌 수 있을까.
카멜리아 후작을 향하던 금안에 깃든 그 뜨거운 시선을.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사라질 찰나의 순간이었다고 해도.
한 손으로 총을 든 채 흔들림 없이 목표물을 맞혀가던 카멜리아 후작의 모습을 떠올린 라시안은 결심한 듯 이케르를 돌아보며 말했다.
“폐하께 말씀드려볼 생각입니다. 후작에게서 사격을 배우고 싶다고 말입니다. 정식으로 요청하면 후작도 거절하지 못하겠지요.”
“마음을 굳히신 겁니까?”
“언제까지 숨어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스승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이제 1년 남았으니 저쪽에서도 움직일 거라고. 당하는 것은 한 번으로 충분합니다.”
라시안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따스하고 커다란 손을 떠올렸다.
[이복형제라도 형제란다, 라시안. 언젠가 그 아이도 내 마음을 알아줄 거다.]
누구보다도 뛰어나고 누구보다도 자애로웠던, 황제의 자질을 모두 가지고 있던 그의 큰형은 결국 그 믿음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타살의 흔적을 찾을 수 없어 급사로 정리되었지만 라시안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우상이었던 형을 누가 그렇게 만들었는지.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소년이 소년다운 웃음을 잃어버리고 어른스러운 표정을 짓게 된 것은.
“저는 형과 다릅니다. 반드시 그 자리를 지켜낼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알려줄 겁니다. 그 자리는 그들이 넘볼 수 없는 자리라는 걸.”
한 마디 한 마디 힘을 주어 말하는 황자의 은빛 눈동자엔 확고한 신념이 어려 있었다.
말을 마친 라시안은 스승을 돌아보았다.
자신이 결심을 굳혔더라도 황제파의 수장인 그가 반대한다면 소용없는 일이라는 걸 어린 황자는 잘 알고 있었다.
침묵이 길어졌다. 그와 함께 담담한 표정을 짓고 있는 황자의 입술도 바짝바짝 말랐다.
혹시라도 반대하는 건 아닐까, 아직은 무리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걱정하던 라시안의 귀에 이케르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힘드실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안도가 소년의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스승님이 인정했다는 것은 그에게도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었다.
“각오했습니다. 어떤 결과가 오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결의에 가득한 라시안의 대답에 일자로 단단하게 굳어있던 이케르의 입매가 아주 살짝 느슨하게 풀어졌다.
오랜 시간 훈련으로 굳은살이 단단하게 박인 커다란 손이 황자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가 가볍게 쥐고 떨어져 나갔다.
“그렇다면 해보십시오.”
“……!”
“황제파가 전하의 검과 방패가 되어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스승님.”
라시안의 가슴에 안도가 퍼져나갔다.
앞으로 걸어갈 길이 험난하더라도 반드시 이겨낼 거라 다짐하는 황자의 얼굴에는 굳은 의지가 어려 있었다.
⚜ ⚜ ⚜
라시안과 헤어져 3황자 궁의 정원을 걸어 나오던 이케르의 입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강단 있게 자신의 의견을 말하던 황자의 모습이 제법 마음에 들었다.
“많이 컸군.”
황제가 검술 스승이라는 명목으로 3황자를 그에게 맡긴 것이 5년 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천지 분간 못하고 형의 복수를 하겠다며 날뛰던 벌거숭이였는데 어느새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자신의 적이 누구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을 만큼.
라시안의 적인 2황자 더스틴과 라세트 공작을 떠올린 이케르의 얼굴에 냉혹함이 내려앉았다.
그는 더스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라세트 공작이 뒤에 있다는 것은 둘째 치더라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만한 재목이 아니었다.
원하는 일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비열하고 음습한 자였으니까.
엘리시아 역시 그 더러운 손에 당할 뻔하지 않았던가.
그녀를 노렸던 것이 이번 한 번만이 아닐 거라 생각하자 그의 눈빛이 시리게 빛났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그들을 건드리는 것은 위험했다. 더구나 라시안이 정면으로 나서겠다고 한 이상 이전보다 더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전하께서 마음을 굳힌 이상 정국이 곧 혼란스러워지겠군. 미리 대비해두는 게 좋겠지.’
물론 그 전에 엘리시아에게 막말을 하던 블랭키 백작 정도는 처리해도 좋을 터였다.
라세트 공작이 꼬투리 잡지 못하게 움직이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입매를 짓궂게 비틀던 이케르는 인기척을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동시에 프란이 나타나 그의 앞에 부복했다.
“카멜리아 후작은?”
“무사히 마차에 타시는 것 확인했습니다. 황자 전하의 궁을 빠져나가시는 동안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습니다.”
“오늘 날아든 벌레는 몇인가.”
“두 명입니다. 모두 살수들이었습니다.”
“아무래도 애가 타는 모양이야. 좀 더 경계를 강화하는 것이 좋겠군.”
“알겠습니다.”
프란이 모습을 감추고 난 뒤 이케르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3황자의 궁은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모습뿐이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암살자들이 궁에 숨어들었고 그가 붙여놓은 그림자들에 의해 죽어나갔다.
라세트 공작의 소행이라는 심증은 있지만 증거는 없었다.
냉혹하게 빛나던 그의 눈빛이 엘리시아를 떠올리면서 다시 부드럽게 풀어졌다.
엘리시아는 모르고 있지만 그녀가 라시안과 만나게 된 것이 우연만은 아니었다.
그는 가까운 시일 내에 그녀를 라시안과 만나게 해 줄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의회 쉬는 시간, 그녀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가진 후 더욱 강해졌다.
엘리시아가 라세트 공작과 2황자의 그늘에서 빠져나오려 하고 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으니까.
그녀는 개인적인 감정이 섞이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며 핑계를 댔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진짜 이유를 눈치채지 못할 그가 아니었다.
의회가 끝나고 3황자의 검술을 봐주면서 언제쯤 만나게 해줄까 고민하고 있던 그에게 엘리시아가 길을 잘못 들어 3황자 궁으로 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고민할 필요도 망설일 이유도 없었다. 그는 라시안을 그녀가 있는 곳으로 보냈다.
그 결과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조금씩 길을 만들어 주면 되겠지. 빠져나올 수 있는 길을. 그녀는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가 만들어낸 과녁을 흔들림 없이 날카롭게 응시하던 매혹적인 짙은 보랏빛 눈동자. 빈틈없이 맞물린 도톰한 입술, 자신만만한 눈빛.
이케르는 엘리시아가 쳐다보고 있던 분수대의 조각을 떠올렸다.
커다란 날개로 자신을 보호하듯 감싸고 있던 붉은 새.
아마도 그녀는 그 새에게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묶고 있는 모든 것에서 빠져나와 접힌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른다면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렇게 되면 그녀에게 다가가기도 좀 더 쉬워지겠지.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기대를 품고 잔잔하게 빛났다.
⚜ ⚜ ⚜
등 뒤로 느껴지던 시선이 사라지고 나서야 엘리시아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녀는 어느새 3황자의 궁을 벗어나 있었다.
‘아무래도 이상해.’
뒤를 돌아보는 엘리시아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누구의 시선과 달리 따라붙어도 기분 나쁘지 않은 것은 둘째 치고,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정말 처음 맞아?’
루리엔은 분명 데이모스 공작이 여자와 사귄 적이 없다고 했었다. 맨손으로 여자의 손도 잡은 적이 없었다고.
그런데 어째서 만나면 만날수록 점점 더 선수같이 느껴지는 걸까.
조금 전 자신에게 했던 이케르의 말과 행동이 떠오르자 엘리시아의 눈이 조금 더 가늘어졌다.
사격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부탁을 엘리시아가 정중하게 거절했음에도 3황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졸라대는 소년으로 인해 난감해하고 있던 그녀를 구해준 것은 이케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