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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26/133)

26화

그녀와 라시안의 실랑이를 지켜보고 있던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낮고 깊은 묵직한 목소리에는 사람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상대방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부탁은 강요나 마찬가지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다행히 3황자는 이케르의 말에 곧바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녀에게 자신이 과했다고 사과해왔다.

그렇게 되자 머쓱해진 것은 엘리시아 쪽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괜찮다고 이제 그만 돌아가 보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때 이케르가 어떻게 했던가.

잠깐 기다리라고 한 그는 그녀를 향해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고작 한걸음인데도 다리가 길어서인지 어느새 그는 그녀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갑자기 너무 가까워진 거리에 당황한 엘리시아가 자신도 모르게 주춤 물러서려 했을 때 그가 그녀를 향해 손을 올렸다.

이제는 익숙해진 그의 체향이 훅 밀려들면서 길쭉하고 남자다운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아왔다.

순간 엘리시아는 답지 않게 얼어붙고 말았다.

그저 살짝 닿았을 뿐인데도 그의 손가락이 머문 곳을 시작으로 묘한 전율이 짜릿하니 그녀의 몸을 타고 흘렀다.

그녀의 얼굴에 고정되어 떨어지지 않는 강렬한 황금빛 눈동자 때문일까, 언제 달아올라도 이상하지 않은 관능적이고 위험한 분위기가 그들 사이에 흘렀다.

이건 위험하다고 엘리시아가 생각한 순간 그의 손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잠시 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그의 손가락 사이에는 작은 나뭇잎이 잡혀 있었다.

엘리시아를 내려다보던 사내의 눈매가 나른하게 접혔다.

[사격할 때 묻은 모양이군. 이 녀석도 후작의 솜씨에 반한 모양이야. 멋진 실력이었어. 조심해 돌아가게.]

분명 정중한 미소였다. 항상 그렇듯 군더더기 하나 없는 깔끔한 미소.

그런데 이상하게도 야하게 느껴졌다. 몸속 깊은 곳 숨어 있는 그녀의 음심을 자극할 만큼.

‘정말이지 알 수 없는 남자야. 그런 쪽으로 타고 난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이성에 대한 경험치가 절대적으로 높은 건 엘리시아 자신인데 어째서 매번 그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건지.

“아, 몰라. 앞으로 얽히지만 않으면 되지.”

생각을 털어버리려는 것처럼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 엘리시아는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부디 앞으로는 그녀의 삶이 조용하기를 바라며.

하지만 세상일은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법.

엘리시아가 후작저로 돌아가던 그 시각, 제국을 시끄럽게 만들 사건이 수도의 한 술집에서 조용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미친 들개’ 라 불리는 파파라치 허드슨 맥컬린은 생각에 잠긴 채 손에 쥐고 있는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같으면 벌써 비었어야 하는 그의 잔엔 술이 그대로 채워져 있었다.

‘왜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지 모르겠군.’

황실에서 열린 연회의 다음 날, 공작저에서 나오던 한 청년을 떠올린 허드슨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모자를 눌러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크지 않은 키에 말랐다고 생각될 정도로 가늘고 호리호리한 체격의 청년이었다.

6개월 넘게 데이모스 공작을 밀착 취재하고 있는 그로서도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새로 온 시종인가?’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리려던 그는 뭔가가 신경에 거슬린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시 한참을 살피고서야 그는 그가 느꼈던 묘한 느낌이 무엇인지 찾아냈다.

청년이 입고 있는 옷, 그것은 평소 데이모스 공작이 입고 다니는 옷과 재질이 똑같았다.

한마디로 시종이 입을 옷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순간 촉이 왔다. 평범한 자가 아니라는.

청년의 얼굴을 확인해 봐야 할 것 같다고 허드슨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가 움직이기 전에 청년은 마차를 잡아타고 떠나버렸다.

‘누구였을까, 그 청년은? 데이모스 공작과 무슨 사이지?’

어쩌면 아주 잠깐 세간에 돌았던 소문처럼 데이모스 공작이 남색가고 그 청년이 공작의 애인일지도 모른다는 추측을 하던 그는 피식 웃고 말았다.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데이모스 공작이 남색가라니.

그랬다면 일찌감치 스캔들이 터졌을 것이다. 공작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은 허드슨만이 아니었으니까.

한숨을 내쉰 허드슨이 술잔을 들어 올려 입으로 가져갔을 때였다. 누군가가 그의 맞은편 의자를 끌어당겨 털썩 앉았다.

“아, 피곤해 죽겠네. 요새 왜 이렇게 사방이 조용한 거야.”

헤롤드 타임즈 신문사에 다니는 그의 친구 에디 머핀이었다.

“마감은?”

“간신히 끝냈지. 편집장은 여전히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지만 어쩌겠어. 낼 것이 없으니 그거라도 내야지. 여기 한 잔!”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크게 외친 에디는 지친 듯 몸을 축 늘어트리며 투덜거렸다.

“요새 카멜리아 후작이 조용하거든. 그녀가 연애를 해야 쓸 만한 기사가 나올 텐데. 쯧.”

가십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신문인 헤롤드 타임즈에게 있어 엘리시아 카멜리아 후작은 그야말로 중요한 기삿거리였다.

신문에 그녀의 스캔들을 싣기만 해도 판매 부수가 몇 배나 올라가니 연연할 수밖에.

“곧 생기겠지. 한 달 이상 옆자리를 비워둔 적이 없다고 하지 않았나?”

“맞아. 곧 생기겠지.”

허드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던 에디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늘어져 있던 몸을 바로 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좀 이상한 일이 있기는 했어.”

“이상한 일?”

“며칠 전 아침에 카멜리아 후작가로 나갔는데 한 청년이 후작가로 걸어오고 있는 거야. 그런데 어쩐지 느낌이 묘해서 일부러 가서 부딪쳤지. 얼굴을 확인하려고. 그런데 놀랍게도 카멜리아 후작이었어.”

흘러내린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 당혹감에 젖은 신비스럽고 매혹적인 보랏빛 눈동자.

급히 모자를 눌러써 얼굴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에디는 충분히 그 청년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에디의 말에 허드슨의 눈빛에도 의문이 떠올랐다.

“이상하긴 하군. 카멜리아 후작이 남장을 하다니.”

“그것만이 아니야 모자를 푹 눌러써 얼굴도 가렸더라고. 카멜리아 후작이 그렇게 얼굴을 가리고 다닐 여자가 아니거든.”

모자로 얼굴을 가렸다는 말을 들은 허드슨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쩐지 기시감이 들어서였다.

자신 역시 데이모스 공작저 앞에서 모자로 얼굴을 가린 청년을 보지 않았던가.

가만 생각해보니 체격이 남자라기보다는 여자에 가까운 것 같기도 했다.

잠시 침묵하던 허드슨은 에디를 향해 물었다.

“그날이 언제였나?”

“황실 연회 다음날이네.”

날짜까지 일치한다는 것을 확인하자 허드슨의 얼굴이 굳어졌다. 다시 묻는 그의 목소리에는 초조함이 어려 있었다.

“그날 카멜리아 후작의 복장을 상세하게 말해보게.”

“응? 그건 왜?”

“어서.”

“모자는 남색 베레모였고 흰 셔츠에 검은 바지 차림이었지 아마? 근데, 자네 표정이 왜 그런가?”

기억을 더듬으며 대답하던 에디는 허드슨의 얼굴을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친구는 마치 길 가다가 금덩이라도 주운 듯 입꼬리를 귓가까지 길게 끌어올리고 있었다.

“허드슨?”

“편집장님 퇴근하셨나?”

“음? 내가 나올 때까지도 계셨으니 아직 계시지 않을까 싶긴 하네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대답하던 에디는 허드슨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자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바지 주머니에서 술값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허드슨은 술집 밖을 눈짓하며 말했다.

“일어나게. 지금 당장 편집장님을 만나야겠네.”

“갑자기 왜?”

“가서 말해주지. 어서 따라오라고.”

앞서 나가는 허드슨을 보고 에디는 한숨을 쉬며 따라 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 헤롤드 타임즈 1면에 모두를 경악시킬만한 기사가 대서특필되었다.

수도를 발칵 뒤집어 놓을 대형 스캔들의 시작이었다.

⚜ ⚜ ⚜

하르와 함께 새벽 훈련을 마치고 기분 좋게 돌아오던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호출을 받았다.

아침부터 무슨 일인가 싶어 서둘러 응접실로 온 그녀에게 루리엔은 심각한 표정으로 신문을 내밀었다.

신문을 흘깃 본 엘리시아는 의아한 표정을 떠올렸다.

“헤롤드 타임즈 아냐? 나 요새 스캔들 만든 거 없는데.”

“일단 봐.”

루리엔의 말에 신문으로 시선을 내린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가 풍랑을 만난 듯 거세게 동요했다.

헤롤드 타임즈의 1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고 있는 헤드라인때문이었다.

[귀족파의 수장 카멜리아 후작, 황제파의 수장 데이모스 공작과 밀회하다?!]

“이런 미친!”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은 엘리시아는 다급히 신문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빠르게 읽어 내려가던 그녀의 입매가 바르르 떨렸다.

연회에서 사라진 자신이 다음 날 오전 데이모스 공작가에서 청년의 모습으로 나왔다는 것과 곧바로 후작저로 돌아갔다는 것까지 마치 본 것처럼 쓰여 있지 않은가.

심지어 삽화까지 들어가 있었다. 모자로 머리카락을 감추고 남장한 차림새 그대로를 그린 삽화였다.

무엇보다도 기사의 끝을 장식하고 있는 말이 가관이었다.

[여성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데이모스 공작마저 리스트에 포함 시킨 희대의 바람둥이 엘리시아 카멜리아 후작에게 경의를 표하며. 과연 데이모스 공작은 일회성 파트너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세기의 연인이 될 것인가.]

희대의 바람둥이는 둘째 치더라도 세기의 연인은 무엇이란 말인가. 기가 막히다 못해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뒷골이 강하게 당겨와 자신도 모르게 뒷목을 잡은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거야?”

아니, 어떻게 된 거냐고 물어도 내가 알 리가…….

당혹감에 젖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그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잊고 있던 기억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설마 그 남자인가?’

연회 다음 날 마차를 잡아타고 공작저를 출발한 그녀는 후작저에서 좀 떨어진 곳에서 내렸다.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들어가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누군가와 부딪치면서 모자가 떨어졌고 붉은 머리카락이 드러났었다.

과장될 정도로 허리를 굽신거리며 사과하던 그 남자, 아닌 척하면서 빠르게 그녀를 훑어내리는 모습에 최근에 온 파파라치나 신문사의 기자 같다는 생각을 했었지.

하지만 그녀가 어디에서 왔는지는 모를 거라 생각하고 넘어갔었는데 어떻게 알아낸 걸까?

이해가 되지 않아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던 엘리시아는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루리엔과 하르의 시선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날 후작저 앞에서 어떤 남자랑 부딪쳤었어. 그 충격으로 모자가 벗겨지면서 머리가 드러났었고. 그 남자가 기자였던 모양이야. 머리카락 색을 보고 내 정체를 알아차린 거겠지. 하지만 내가 공작저에서 왔다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어.”

엘리시아의 대답을 들은 루리엔과 하르는 생각에 잠겼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역시나 루리엔이었다.

그녀는 신중하게 말했다.

“네 말대로 그날 후작저에서 네 모습을 본 것만으로는 이런 기사를 쓸 수 없어. 그렇다면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는 단 하나야.”

“그게 뭔데?”

“데이모스 공작저에 상주하는 파파라치나 기자가 네 모습을 유심히 본 거지. 그리고 두 사람이 이야기하다가 우연히 상황을 맞춰낸 거야. 모자나 옷차림새로 같은 사람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무슨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엘리시아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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