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갑자기 터진 대형 스캔들은 수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작은 일도 관심의 대상이 되는 황제파 수장 데이모스 공작과 귀족파 수장 카멜리아 후작 두 사람의 스캔들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기사가 발표된 새벽부터 사람들은 끊임없이 이번 스캔들에 대해 떠들었다.
그들 대부분이 모든 여성에게 철벽을 치던 데이모스 공작을 카멜리아 후작이 어떻게 유혹했는지 궁금해했다.
아주 가끔 데이모스 공작이 유혹했을 수도 있지 않냐는 의견이 나왔지만 절대 그럴 리가 없다는 반대 의견에 밀려 금세 사라졌다.
여러 가지 추측과 상상이 오가는 가운데 데이모스 공작가와 카멜리아 후작가의 공식 입장이 발표되었다.
공식 입장은 서로 말을 맞춘 것처럼 똑같았다.
그날 데이모스 공작이 어려움에 처한 카멜리아 후작을 도와줬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고 했다.
두 가문의 입장문이 발표되자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며 혼란에 빠져들었다.
스캔들에 대해 항상 대놓고 인정하던 카멜리아 후작이 이번 스캔들에 대해 부인했다는 것과 진중하기로 소문난 데이모스 공작 역시 이번 스캔들을 부인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입장문을 믿는 사람들과 여전히 의심하는 사람들이 혼재하는 가운데 귀족들 역시 두 파로 나뉘었다.
황제파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수장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귀족파의 귀족들 중에서도 카멜리아 후작가를 따르는 귀족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라세트 공작을 따르는, 베르텐 후작을 위시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상대파의 수장과 놀아난 카멜리아 후작을 수장의 자리에 둘 수 없다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그들이 목소리를 높이면서 카멜리아 후작을 따르는 귀족들이 그들의 주장에 반발하고 나섰고 결국 귀족파는 혼란에 휩싸였다.
그리고 그 화두의 중심에 선 엘리시아는 그야말로 죽을 맛이었다.
입장문을 발표하고 쥐죽은 듯 후작저에 칩거해 있던 그녀는 2황자의 부름을 받고 어쩔 수 없이 황궁으로 입궁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가 마차에서 내린 순간부터 기다렸다는 것처럼 귀족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녀를 지지하는 귀족들은 의심하지 않는다며 힘내라고 격려를 해왔지만 라세트 공작을 따르는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것처럼 그녀를 공격해왔다.
잡아먹을 듯 달려드는 귀족들에게 엘리시아는 여유로운 웃음과 뻔뻔한 거짓말로 대처했다.
그렇게 고난의 길을 헤치고 간신히 2황자의 집무실 앞에 도착한 엘리시아는 심호흡을 깊게 했다.
지금까지는 장난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이제부터 대적할 사내와 비교한다면.
2황자의 시종장은 그녀를 보자마자 집무실 문을 열어주었다.
‘단단히 화났나 보네. 바로 들여보내 주는 걸 보면.’
엘리시아는 열린 문 안을 흘깃 쳐다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계속해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긴장감이 몰려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더스틴이 평소 이미지 때문에 점잖은 척, 고상한 척하고 있지만 그 껍데기를 벗어던지면 어느 정도나 또라이인지 잘 알고 있으니까.
별일 없기를 바라며 집무실 안으로 들어선 엘리시아는 집무실 중앙에 뒷짐을 진 채 서 있는 더스틴을 발견했다.
치켜 올라간 황금빛 짙은 눈썹과 이를 악문 듯 일자로 굳게 다물린 입매가 단단히 벼르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좋지 않은데.’
눈살을 찌푸리던 엘리시아는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재빨리 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다.
“부르셨…!”
“데이모스 공작과의 밀회는 달콤하던가, 후작.”
비아냥거림이 묻어나는 사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그녀는 멈칫했다. 절로 미간이 접혔다.
‘보자마자 하는 소리라고는. 예의는 어디 갖다 버렸나.’
짜증이 치밀었지만 꾹 참고 그녀가 변명하려 했을 때였다. 커다란 손이 그녀의 턱을 잡아 거칠게 들어 올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사납게 번들거리는 더스틴의 푸른 눈동자가 바로 코앞에서 잡아먹을 듯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이전에 궁금한 적이 있었지. 후작이 데이모스 공작 그 새끼와 뒹굴었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떤 기분인지. 실제로 당해보니 무척 더럽군. 그 새끼를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을 만큼.”
엘리시아의 그린 듯한 예쁜 눈썹이 꿈틀했다. 이상하게도 2황자의 입에서 이케르에 대한 욕이 나오니 무척이나 거슬렸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한 나라의 공작에게 새끼니 뭐니 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못마땅했지만 속마음을 입에 담을 수는 없었기에 엘리시아는 난감한 미소를 일부러 입가에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일단 이 또라이가 무슨 짓을 저지르기 전에 진정시키고 봐야 했다.
“진정하십시오, 전하. 일단 저는 데이모스 공작과 뒹군 적이….”
“역시 그날 했던 말은 거짓이었군. 정원이 아니라 침대에 있었던 모양이야? 데이모스 공작의 침대에.”
“그건 그때 상황이 어쩔 수 없어 거짓말을…….”
“그래, 어땠나? 목석같은 그 새끼의 맛은?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는 초짜라 서툴렀을 텐데 후작을 만족시키던가?”
아오, 이 미친 또라이 새끼. 사람 말도 좀 들어야 할 것 아냐!
완전히 눈이 돌아 살기 어린 얼굴로 다그치는 더스틴의 모습에 엘리시아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대로라면 무척이나 위험했다. 그래서 그녀는 태도를 바꿔 사무적이고 조곤조곤한 투로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전하, 데이모스 공작과는 아무 일도 없었기 때문에 하문에 대한 답을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 거짓말로 인해 기분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립니다. 그날 헤리스를 먹고 공작에게 도움을 받기는 했지만 그 사실이 알려지는 경우 지금처럼 시끄러워질 것 같아 차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오랜 기간 봐 왔기에 엘리시아는 더스틴의 성격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눈앞의 사내는 상대가 자신을 두려워하거나 겁에 질린 것 같으면 동정심을 느끼기는커녕 더 흥분해 그대로 짓누르고 잡아먹어 버리는 스타일이었다.
그러니 그를 상대할 때는 눈을 똑바로 맞춘 채 당당하고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야 먹잇감이 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다행히 그녀의 대응이 먹혔는지 더스틴은 잠시 침묵했다.
잠시 후 그의 입이 열리며 탁하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그 기세만큼 살기등등하지는 않았다.
“……도움이라. 후작은 몸으로 도움을 받나 보지? 그럼 내 도움도 거부하지 않겠군.”
분노와 살기로 번뜩이던 푸른 눈동자에 다른 의미로 감정이 이글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흠칫 몸을 굳혔다.
당장이라도 그녀의 옷을 벗기고 판을 벌이고 싶어 하는 그런 눈빛이었다.
위험을 알리는 경고음이 머릿속에 강하게 울리는 것을 느낀 엘리시아는 정색한 얼굴로 그의 손을 뿌리치며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안 그래도 고양이 같던 눈매가 올라가며 입매가 일자로 굳어지자 서늘한 도도함이 그녀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
“이 이상 저를 모욕하시는 건 곤란합니다. 데이모스 공작과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씀드렸고, 설사 있다 해도 저를 추궁하실 자격을 전하께서는 가지고 계시지 않습니다.”
엘리시아의 냉랭함을 띤 단호한 말에 더스틴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삐딱하게 기울어진 고개와 그녀의 턱이 빠져나갔음에도 들려 있는 손이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 속에서 들고 있던 손을 느릿하게 내린 더스틴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자격, 자격이라. 그렇지. 내게 후작을 추궁할 자격은 없지. 그럼 자격을 만들어야겠군.”
엘리시아의 미간이 살짝 접혔다. 저 또라이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나 싶어서였다.
더스틴은 그런 그녀의 우려를 저버리지 않았다.
“내 여자가 되라, 후작. 그러면 지금의 자리를 지키게 해주지.”
더스틴의 말에 엘리시아는 그대로 굳어졌다.
지금까지 그가 은근슬쩍 흘린 적은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협박하듯 말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내 옆자리를 주겠다는 거다. 미래의 황태자비, 그리고 언젠가는 황후가 되어 내 아이를 낳을 기회를.”
“……!”
당혹감에 젖어있는 엘리시아를 향해 더스틴이 한 발 내디뎠다.
바로 코앞에 다가온 그의 얼굴에 놀란 엘리시아가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그의 손이 더 빨랐다.
커다란 손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녀의 뒷목을 움켜쥐며 날 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입술 위에 닿았다. 여전히 분노와 광기가 일렁이고 있는 푸른 눈동자가 찌를 듯 바로 코앞에서 그녀를 직시하고 있었다.
분명 조각처럼 아름답고 잘생긴 얼굴인데 왜 이리 소름이 끼치는지.
뱀이 온몸을 칭칭 감고 옥죄는 듯한 섬뜩한 느낌에 엘리시아가 눈살을 찌푸리는 사이 진득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잘 생각하는 것이 좋을 거야. 후작이 먼저 내 침대로 들어와 지금의 자리를 지킬 건지, 아니면 지금의 자리도 잃고 내 손에 끌려와 강제로 안길 건지.”
“…….”
“어차피 결과는 같으니 조금이라도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지. 후작의 선택 기대하고 있겠네.”
입술을 늘이며 잔혹하게 웃는 더스틴의 악마 같은 얼굴이 엘리시아의 보랏빛 눈동자를 가득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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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미친놈 같으니. 어차피 수장 자리를 뺏을 생각이면서.”
2황자의 집무실에서 빠져나온 엘리시아는 나직하게 욕설을 내뱉었다.
닫힌 문을 매섭게 노려본 그녀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정문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제안을 가장한 2황자의 협박에 생각해보겠다며 얼버무리고 빠져나오기는 했지만 그의 욕망 어린 시선과 끈적거리던 숨결이 아직까지 얼굴에 남아있는 것 같아 무척이나 불쾌했다. 빨리 돌아가 깨끗하게 씻어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마차로 가는 동안 마주친 귀족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올 때와 같이 귀족들이 달라붙었다면 엘리시아는 표정 관리에 실패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2항자의 궁을 나서자 마차 옆 나무에 기대 서 있던 하르가 곧바로 다가와 마차 문을 열어주었다.
“고마워, 하르.”
하르의 손을 잡고 마차에 올라탄 엘리시아는 의자에 앉자마자 늘어졌다.
안심할 수 있는 곳에 도착하자 2황자와 귀족들을 상대하느라 온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긴장감이 일시에 풀어진 것이다.
마차 문을 닫고 엘리시아의 맞은편에 앉은 하르는 그 모습을 발견하고 눈매를 매섭게 좁혔다.
“그 자식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거냐?”
살기가 감도는 친우의 물음에 비척비척 상체를 바로 세운 엘리시아는 바로 고자질했다.
“어. 내 턱을 두 번이나 잡았어, 그 미친 또라이가.”
하르는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엄지손가락으로 검집에 들어있는 검 손잡이를 밀어 올렸다.
잘 버려진 검날이 살짝 모습을 보임과 동시에 그는 서늘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잘라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