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황족을 상대로 불경한 말을 하면서도 하르의 눈빛에는 두려움도 망설임도 없었다. 원한다면 손목이든 목이든 베어다 주겠다는 태도였다.
짧지만 묵직한 하르의 위로에 엘리시아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됐어.”
“후회하지 말고.”
“그랬다가 황족 시해 죄로 무슨 꼴을 당하려고. 그딴 자식 손모가지가 아니라 목을 준다 해도 하르 너하고는 안 바꿔.”
기분이 좋아진 엘리시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이 세상 전부와 친우들 중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녀는 망설임 없이 친우들을 선택할 터였다.
엘리시아의 얼굴에 웃음기가 도는 것을 확인한 하르는 검 손잡이를 받치고 있던 엄지손가락을 내렸다. 달칵 소리와 함께 검날이 검집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들고 있던 검을 의자에 내려놓은 하르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후작저로 돌아갈 거냐?”
“응.”
“알았다.”
하르가 마부석으로 통하는 창을 통해 마부에게 말을 전달하자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리는 마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내다보며 엘리시아는 생각에 잠겼다.
오늘 더스틴이 그녀에게 보였던 모습은 스캔들이 터진 날 루리엔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2황자는 분명 널 협박해 올 거야. 귀족파의 수장 자리를 유지시켜주는 대신 자신의 여자가 되라고 하겠지.]
엘리시아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더스틴의 여자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자신 역시 조신하지는 않으니 방만한 사생활은 그렇다 쳐도 음습하고 이기적인 데다 자신밖에 모르는 그 더러운 성격을 어떻게 참아준단 말인가.
‘차라리 죽는 게 낫지. 그딴 미친 또라이의 여자가 되느니.’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던 엘리시아는 루리엔의 말을 떠올렸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냐는 그녀의 물음에 대한 대답이었다.
[지금으로서 가능한 방법은 단 하나야. 데이모스 공작과 연인이 되는 것.]
[……!]
[스캔들처럼 네가 데이모스 공작의 연인이 된다면 수장 자리에서 내려오더라도 2황자의 손을 피할 수 있어. 황제파의 수장이자 수사국의 국장인 데이모스 공작을 자극하는 건 2황자도 라세트 공작도 피하려 할 테니까. 그렇게 시간을 끌면서 힘을 키울 수밖에. 시간은 지금보다 오래 걸리겠지만 그래도 안전하게는 갈 수 있겠지]
루리엔이 내민 방법에 당황하면서도 엘리시아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걸.
그녀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던 걸까, 루리엔은 표정을 풀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방법이 꼭 하나뿐이라고 해서 그걸 선택해야 한다는 법은 없어.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마음이 가는 대로 해, 엘리. 어떤 일이 있어도 우리는 끝까지 널 지킬 거니까.]
우리는 끝까지 널 지킬 거니까…….
그녀는 루리엔의 마지막 말을 곱씹었다.
부모님을 잃은 그녀의 옆으로 친우들이 돌아오면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었다.
그 이후 정말로 친우들은 그녀를 지금까지 지켜오고 있었다. 카멜리아 후작가를 따르는 귀족 가문들과 함께.
하지만…….
엘리시아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는 부모의 장례식에서 기댈 곳을 잃고 눈물만 쏟던 소녀가 아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를 이끄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번 역경을 이겨내야만 했다. 루리엔이 말해준 것처럼 데이모스 공작을 이용해서라도.
‘나 자신을, 내 사람들을 지켜내야 하니까.’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하르를 쳐다보았다.
“하르.”
“……?”
“데이모스 공작 각하께 비밀리에 연락을 넣어줘. 이번 스캔들에 대해 상의하고 싶은 것이 있다고.”
단단하게 벼려진 엘리시아의 짙은 보랏빛 눈동자엔 굳은 결심의 빛이 깃들어 있었다.
⚜ ⚜ ⚜
엘리시아를 보낸 후 잠시 자리에 앉아 있던 더스틴은 몸을 일으켜 곧바로 라세트 공작가로 향했다.
그가 저택 앞에 도착하자 뒤늦게 연락을 받은 집사가 황급히 튀어나와 허리를 숙였다.
“공작은?”
“집무실에 계십니다. 오셨다고 말씀…….”
“됐어. 내가 직접 가지.”
더스틴은 집사의 뒷말을 잘라버리고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겼다.
데이모스 공작에 대한 격렬한 불쾌감이 용암처럼 들끓어 그는 지금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감히 내 것에 손을 대?’
엘리시아가 다른 사내들과 놀아나는 걸 지켜보면서 짜증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무시할 수 있었다. 별 볼 일 없는 것들이니까.
하지만 데이모스 공작은 얘기가 달랐다.
두 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낫다는 평을 받는 사내였다. 더스틴이 그보다 나은 건 황족이라는 신분, 그것 하나밖에 없었다.
그런 자가 엘리시아에게 손을 뻗은 것이다.
정말로 도움만 준 건지 몸을 섞은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둘 사이에 접점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더러웠다.
집무실에 도착한 더스틴은 노크도 없이 곧바로 문을 쾅 소리 나게 열었다. 뒤에서 집사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간 그는 소파에 앉아 있는 라세트 공작과 베르텐 후작을 발견하고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여기 다들 모여 계셨군.”
“제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갑작스러운 그의 방문에 놀란 베르텐 후작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하지만 라세트 공작은 조금의 놀란 기색도 없이 천천히 일어나 비어있는 상석을 가리켰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성큼성큼 걸어 라세트 공작이 말한 자리에 털썩 앉은 더스틴은 오만하게 다리를 꼰 채 두 사람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표정을 보니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하던 모양이야.”
“그렇지 않아도 카멜리아 후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차부터 한 잔 드시지요.”
라세트 공작은 손을 뻗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찻주전자를 들고는 더스틴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따랐다.
빈 찻잔에 차가 채워지는 것을 보며 더스틴은 짙은 눈썹을 꿈틀했다.
공작은 그가 올 것이라는 걸 이미 짐작한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찻잔이 미리 놓여 있을 리가 없었다.
찻주전자를 내려놓은 라세트 공작은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런 기사가 신문에 났으니 전하께서 심기가 편하실 리 없지요. 카멜리아 후작을 만나고 바로 오실 거라 짐작했습니다. 그래, 카멜리아 후작은 뭐라 합니까?”
“아무 일도 없었다고 잡아떼더군. 도움을 받은 것뿐이라고.”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모르겠지만 그 데이모스 공작이니 사실일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런 것이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전하의 손에 곧 들어올 텐데 말입니다. 그때 가서 마음껏 품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조곤조곤 달래는 라세트 공작의 말에 주름이 잡혀 있던 더스틴의 미간이 천천히 펴졌다.
공작의 말대로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을 엘리시아를 생각하자 기분이 급격히 나아진 것이다.
화려한 붉은 머리카락을 새하얀 이불 위에 흐트러트린 채 매혹적인 보랏빛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것을 상상만 해도 하복부가 저릿해졌다.
그 길고 늘씬한 다리를 잡아 벌리고 깊숙이 파고들면 얼마나 황홀할 것인가.
쾌감에 젖어 발그스레해진 눈매와 항상 사무적인 말만 쏟아내던 도톰하고 예쁜 입술에서 흘러나올 교성을 떠올리자 급격하게 갈증이 치밀어 더스틴은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훑었다.
물 따위로 풀 수 없는 갈증임을 알면서도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베르텐 후작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쪽은 준비가 잘 되어가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카멜리아 후작을 따르는 자들은 반대를 하겠지만 저희 쪽이 반수가 넘기 때문에 다수결로 하면 문제는 없습니다.”
“그래야지.”
자신만만한 베르텐 후작의 대답에 만족스레 고개를 끄덕이던 더스틴은 이어지는 후작의 말에 짙은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다만 전하께 확인받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뭐지?”
“공작 각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카멜리아 후작에게 하신 제안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카멜리아 후작이 어느 쪽을 선택하든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귀족파의 수장 자리는 제게 돌아올 거라 믿어도 되겠습니까?”
베르텐 후작의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물음에 더스틴은 피식 웃었다.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이었다.
“물론이네, 후작. 난 내 여자를 밖으로 돌릴 생각이 없어. 그러니 그 부분은 걱정할 필요 없네.”
“전하의 말씀, 믿겠습니다.”
충성을 다하겠다는 듯 고개를 깊숙이 숙이는 베르텐 후작을 쳐다보며 더스틴은 찻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갔다. 그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혀 있었다.
오랜 시간 비워두었던 황자비의 자리를 드디어 채울 시간이었다.
⚜ ⚜ ⚜
묵직한 장검이 소리 없이 허공을 갈랐다.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의 빠른 속도였다.
검이 궤적을 그려낼 때마다 단단하게 짜인 팔의 근육이 움직임을 따라 꿈틀거렸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앞머리 사이사이로 비치는 금안은 상대를 찌를 듯 날카롭게 빛났다.
수백 번 허공을 베어낸 검이 어느 순간 조용히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굳게 다물려 있던 사내의 입술이 열리며 깊이 눌러두었던 숨이 흘러나왔다.
“후우……,”
검을 휘두르는 것만큼이나 마지막 호흡을 마무리하는 것도 중요하기에 이케르는 잠시 서서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잡념을 털어내기 위해 검을 휘두르다 보면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이 흘러가곤 했다. 지금처럼.
“또 늦었나.”
쌓여있는 업무 서류들을 떠올리며 한숨을 내쉰 이케르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올릴 때였다.
갑자기 날아든 살기에 느슨하게 풀려 있던 그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혀들었다.
“…….”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이케르는 연무장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검집으로 다가갔다.
검집을 들어 검을 집어넣은 그는 한 손에 검을 들고 연무장을 빠져나왔다.
그의 발걸음은 저택이 아닌 연무장 뒤쪽에 위치한 후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을 향해 살기가 날아든 곳이었다.
느긋하게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던 이케르는 거대한 고목에 기대 서 있는 짙푸른 머리의 청년을 발견하고는 입매를 살짝 휘었다.
“정문으로 들어와도 환영했을 텐데, 테스케 경.”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그가 입을 열자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던 하르가 몸을 바로 세워 그를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