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카멜리아 후작의 친우이자 호위기사인 하르 테스케는 무척이나 잘생긴 청년이었다.
조각칼로 깎은 듯한 콧날과 턱선도 그렇지만 쭉 뻗은 시원한 눈매와 선이 뚜렷한 얇은 입술이 섬세한 남성미를 그려내고 있었다.
서늘함이 느껴지는 무심한 표정 역시 청년의 분위기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눈에 띄지 말라고 했습니다.”
표정만큼이나 무뚝뚝한 대답에 이케르는 피식 웃었다. 누가 그렇게 말했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그렇다면 성공한 것 같군. 그래, 후작이 전하라는 말은 뭔가?”
그의 물음에 하르는 대답 대신 쪽지를 내밀었다.
이케르가 그것을 받아들자 고개를 가볍게 숙인 청년은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제법이군.”
좀 더 친해지면 검을 맞대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이케르는 손에 들린 쪽지를 확인했다. 단아하고 깔끔한 필체였다.
[스캔들과 관련해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 밤 방문 부탁드립니다. 창문은 열어두겠습니다.
-엘리시아 카멜리아-]
엘리시아가 그에게 전달한 쪽지의 내용은 간단했다.
요약하자면 내가 공작저에 갈 수 없으니 네가 후작저로 오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창문으로 몰래.
이케르의 길게 뻗은 수려한 눈꼬리가 살짝 접혔다. 부드러운 곡선의 눈웃음이었다.
“엘리답군.”
감히 제국의 어느 누가 데이모스 공작에게 창문으로 들어오라고 말할 수 있을까. 도둑 또는 암살자들이나 하는 행동인데.
뻔뻔하다고도 생각할 수 있는 요청이었지만 그에게는 귀엽게만 느껴졌다.
입매를 부드럽게 늘어트린 그는 밤이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저택을 향해 몸을 돌렸다.
⚜ ⚜ ⚜
“시간을 정해놓을 걸 그랬나?”
엘리시아는 열린 창문을 쳐다보며 초조한 마음에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밤이 꽤 깊었는데도 이케르는 나타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아니야. 각하의 일정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그녀가 약속 시간을 밤으로 한 것은 이케르의 일정을 모르기 때문이었다.
일반적으로 밤에 일정을 잡는 사람은 없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다고 그가 방을 잘못 찾아올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늘 밤 저택의 모든 창문은 그녀의 지시로 닫혀 있으니까. 그녀의 침실 창문만 빼고.
“그럼 혹시 창문으로 와달라고 해서 기분 상한 건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자 엘리시아는 한숨을 푹 내쉬며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이케르는 모르겠지만 그 쪽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 엘리시아가 버린 종이만으로도 작은 쓰레기통 하나가 꽉 찰 정도였다.
처음에는 수도의 조용한 위치에 집을 빌려 그곳에서 만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 스캔들이 터진 이유를 생각하자 그녀는 그 생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후작저와 공작저 주변에 포진해 있는 신문 기자들과 파파라치들을 따돌리는 것도 일이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보니 돌발 변수가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연회 다음 날 아침 신문기자와 부딪쳐 모자를 떨어트렸던 것처럼.
결국 가장 안전한 장소는 카멜리아 후작저 또는 데이모스 공작저였다.
그렇다고 공작저의 정문으로 들어가자니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고, 높은 벽과 창문을 타고 넘을 자신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와달라고 한 건데 어쨌든 보기 좋은 모양새는 아니었다.
“나도 그런 부탁 하고 싶지 않았다고.”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엘리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을 때였다. 부드러운 저음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무슨 부탁 말인가, 후작?”
“헉!”
깜짝 놀란 엘리시아가 고개를 들자 언제 왔는지 창가에 기대서 있는 이케르의 모습이 그녀의 두 눈 가득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조각같이 완벽한 외모를 지닌 사내가 달빛을 받고 서 있는 모습은 그야말로 한 폭의 명화와도 같아, 엘리시아는 순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항상 단정하게 뒤로 빗어 넘겼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이마 위에 흩어져 있어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것도 한몫했다.
뭐랄까 단정하게 채워진 검은 셔츠와 더불어 금욕적이면서도 관능적인 느낌을 동시에 풍긴다고 할까.
‘앞머리를 내리는 것도 괜찮네, 하긴 저 얼굴에 무엇이든 안 어울리겠어.’
자신도 모르게 감탄하고 있던 엘리시아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후작?”
“아,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타나시니 놀라서 그만…….”
엘리시아는 말꼬리를 흐렸다.
당황한 나머지 변명을 급조하긴 했지만 말하면서 깨달은 것이다. 그가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것이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다행히 이케르는 어이없어하거나 화내지 않았다. 도리어 달빛이 내려앉은 금빛 눈동자는 즐거운 빛을 띠고 빛나고 있었다.
“이런, 실례했군. 최대한 조용히 들어오려고 했는데 후작을 놀라게 한 모양이야.”
웃음기가 살짝 어린 그의 목소리에 엘리시아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그녀는 재빨리 일어서서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무리한 부탁을 드려 저야말로 죄송했습니다.”
“괜찮네. 창문을 넘는 것도 그리 나쁜 느낌은 아니군. 후작 그대의 방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수려하게 뻗은 눈매가 부드럽게 접히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순간 멍해졌다.
아니, 처음이라면서 선수 같은 저런 멘트는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란 말인가.
타고나기를 선수로 타고난 것이 아닐까 엘리시아가 의심하는 사이 그녀의 침실을 찬찬히 살펴본 이케르는 기대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그가 한 걸음 내디뎠을 뿐인데 갑자기 체향이 느껴질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동굴을 울리는 듯한 깊고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내게 하고 싶다는 이야기가 뭔지 물어도 되겠나?”
“그게…….”
자신을 담고 있는 온화함을 담은 금빛 눈동자와 마주하자 이상하게도 입이 떨어지지 않아 엘리시아는 당황했다.
의회에서는 그토록 달변을 잘 쏟아내던 입이 지금은 가출이라도 한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말이 나오지 않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내뱉고 말았다.
“그, 그러니까, 그게…… 그거 빌려주신다는 거 아직 유효한 겁니까?”
“……?”
이케르의 금안에 놀란 빛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엘리시아는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 몰라.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겠지.’
어차피 그녀가 하려던 말도 지금 한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시아는 이케르에게 몸을 바짝 붙인 채 손을 미끄러지듯 아래로 움직였다. 일단 빌려놓고 조건을 말할 생각이었다.
그래, 계획은 그랬다. 계획은.
셔츠 아래 느껴지는 갈라진 복근을 타고 내려가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이 그녀의 손바닥 아래 느껴져 왔다. 뜨거운 열기도 함께.
놀랍게도 그는 발정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는데 말이다.
‘대체 언제? 아니 무엇 때문에?’
엘리시아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체 왜 이것이 이렇게 강렬하게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화를 하는 도중에야 그럴 일이 없을 거고. 내가 갑자기 달라붙어서 본능적으로 그런 건가? 그런데 그러기에는 너무 빠르지 않나?
별별 생각이 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그녀는 계획을 실행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빌리려는 것을 칭찬한 이후에 빌리고 싶다고 말할 타이밍 말이다.
그 와중에서도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았다. 닫힌 입과 달리 그녀의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길고 가는 손가락이 능숙하게 움직임과 동시에 머리 위로 억눌린 사내의 신음 소리가 낮게 내려앉았다.
“윽…….”
본능 어딘가를 건드리는 섹시한 신음에 엘리시아는 몸을 살짝 떨었다. 몸이 달아오르며 아래로 열기가 몰렸다.
‘미친…….’
아무래도 몸이 미친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이젠 하다하다 상대의 신음 소리에까지 반응하는 건가?
충격을 받은 그녀가 잠시 손의 움직임을 멈춘 사이 사내의 따뜻한 숨결이 그녀의 귓불에 닿아왔다.
“물론 그 제안 지금도 유효하네만. 지금 이 행동은 받아들이겠다는 것으로 봐도 좋은 건가, 후작?”
평소보다 더 낮은, 열기를 띤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부드럽게 울리자 엘리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치 허락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의 숨결은 더 이상 가까워지지도 그렇다고 멀어지지도 않았다.
목 위쪽에 닿을락 말락 멈춰선 채 뜨거운 숨으로 그녀의 몸만 달아오르게 할 뿐이었다.
어쩐지 지는 것 같은 분한 기분이 들어 엘리시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능숙하게 움켜쥐었다.
그녀의 손에 들어온 것은 일부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또다시 억눌린 낮은 신음 소리가 으르렁거리듯 귓가에 울렸다.
자신의 손놀림에 이케르가 반응해 오자 엘리시아는 이제야 뭔가 균형이 맞춰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뭐, 이 정도면 빌려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잃었던 여유를 되찾은 그녀는 귀한 물건을 감정하듯 손가락을 부드럽게 놀렸다. 하지만 그녀의 여유로움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군. 지금 바로 사용해 볼 텐가?”
“그것도 나쁘지 않…… 예?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별생각 없이 답하던 엘리시아는 흠칫 놀라 급히 고개를 치켜들었다.
그러자 부드럽게 휘어진 입매가 보였다. 형형하게 빛나는 황금빛 눈동자도.
그리고……,
“지금 바로 사용해 볼 건가 물었네. 빌렸으면 사용해야 하지 않겠나.”
귓가에 다시 내려앉는 저음의 목소리까지, 눈앞의 사내는 모든 것이 위험할 정도로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