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133)

32화

[널 끌어내리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하긴 만년 2등이니 1등하고 싶을 만도 하지. 이 소집장을 데이모스 공작이 보지 못한다는 것이 아쉽네. 밀서로 슬쩍 보내볼까?]

이케르와 이야기가 잘 되었다고 엘리시아가 말한 이후로 루리엔은 임시회의에 관심을 끊어버린 듯했다.

그런 거 걱정할 시간에 사업을 하나라도 더 하는 게 낫다는 말과 함께.

엘리시아는 그런 루리엔의 태도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수장에서 내려오게 되면 라세트 공작과 2황자 쪽에서 압박이 들어오기 시작할 테니 그 전에 최대한 할 수 있는 일들을 해놓으려는 것 같았다.

‘그런 면에서 루리엔은 철저한 타입이니까.’

루리엔이 보좌관을 맡아줘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던 엘리시아는 하르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그는 뭘 그리 고민하냐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걱정할 거 없어. 네가 수장 자리에서 내려온다 해도 그 자식들이 네게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할 테니.”

그러면서 여차하면 베어버리면 된다고 여상하게 덧붙이는 것이 아닌가.

어이가 없음과 동시에 긴장감이 풀어진 엘리시아는 피식 웃으며 말을 던졌다.

“뭐만 하면 벤대. 누가 보면 하르 너 내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 처리하려고 유학 갔다 온 줄 알겠어.”

“맞는데.”

“……어?”

“그러려고 다녀온 거야.”

“…….”

예상치 못한 대답에 잠시 침묵했던 그녀는 고개를 붕붕 젓고는 하르에게 다시 물었다.

“하르 네 꿈이 뭐더라? 제국 최고의 검사였나?”

“네 호위기사.”

“아니, 네가 검을 잡은 원래 이유 말이야. 분명 어릴 때 나한테 검사가…….”

답답한 표정으로 말하던 엘리시아의 말이 끊겼다. 잊고 있던 어린 날의 기억이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다.

그녀와 하르, 그리고 루리엔이 여덟 살이었던 해, 하르가 검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녀의 부모님은 바로 검술 선생을 붙여주었다.

처음 검술 수업을 받고 돌아온 어린 소년에게 아직 어린 소녀였던 그녀가 물었었다.

[하르, 넌 커서 뭐가 되고 싶어.]

[네 호위기사.]

[에~ 꿈이 너무 작은 거 아냐? 제국 최고의 검사 이런 거 안 하고?]

[그런 거 필요 없는데.]

[안 돼! 남자가 꿈을 크게 가져야지. 자, 따라해 봐. 제국 최고의 검사!]

[싫어.]

무슨 고집이 그렇게 센지, 어린 하르는 불퉁한 표정으로 끝까지 그녀의 말을 따라 하지 않았었다.

‘결국 화가 나서 네 멋대로 하라고 소리치고 삐졌었지. 뭐, 30분도 못가기는 했지만.’

과거 친우들과의 기억을 떠올리자 엘리시아의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친우들은 참 한결같았다.

루리엔 역시 어릴 적 꿈을 묻는 질문에 카멜리아 후작이 된 그녀의 보좌관이 되겠다고 답했었다. 그리고 유학을 다녀오더니 정말로 그녀의 보좌관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녀는 항상 친우들에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자신을 지켜주려는 마음 때문에 친우들이 더 높이 올라갈 수 있는데도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내가 없었다면 두 사람의 꿈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또다시 들기 시작한 의문으로 인해 엘리시아가 우울해지려 했을 때였다.

딱 소리와 함께 이마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얏!”

당황해 고개를 들자 손바닥이 보이게 손을 펴서 들고 있는 하르가 보였다.

“무슨 짓이야? 아프잖아!”

분명 붉게 변했을 이마를 문지르며 엘리시아가 버럭 화를 내자 하르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서.”

“뭐?”

“내가 아니었다면, 이딴 생각 했지?”

“…….”

하르가 자신의 생각을 정확하게 꿰뚫어 본 것에 당황해 엘리시아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또다시 손바닥으로 이마를 때릴 자세를 취했다.

“쓸데없는 생각 날려버리게 한 대 더 때려줘?”

“아니, 그냥 생각 안 할게. 회의 생각. 회의 생각할 거야.”

엘리시아는 재빨리 두 손을 내저었다. 한 대 맞은 것만으로도 잡념에서 빠져나오기에는 충분했다.

하르도 그렇고 루리엔도 그렇고 자신의 머릿속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마를 문지르는 사이 마차는 라세트 공작가의 대저택에 도착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하르의 손을 잡고 땅에 내려선 엘리시아에게 공작가의 집사가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해왔다.

“어서 오십시오, 카멜리아 후작님. 각하께서 오늘 회의는 플랜드 홀에서 진행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하네.”

엘리시아는 하르와 함께 집사의 안내를 받으며 플랜드 홀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회의장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녀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며 딱딱하게 굳어갔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 해도 오늘 안건이 안건인 만큼 신경 쓰일 수밖에 없었다.

불안한 마음과 긴장을 풀기 위해 속으로 조용히 심호흡을 하던 그녀는 문득 이케르를 떠올렸다.

달빛이 내려앉은 방안에서 순식간에 코끝까지 밀려든 그 특유의 체향과 입술 위에 느껴지던 옅은 숨결,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던,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던 깊고 낮은 목소리.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엘리시아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의 말을 떠올린 것만으로도 이상하게 긴장이 풀리며 불안했던 마음이 진정되었다는 것.

‘역시 알 수 없는 남자야.’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은 그녀의 어깨는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져 있었다.

⚜ ⚜ ⚜

플랜드 홀에 마련된 긴 테이블의 앞쪽에 앉아 있던 베르텐 후작은 하나 둘 씩 들어와 자리를 채우는 귀족들을 쳐다보았다.

시작 시각이 다 되어가서인지 이제 빈자리는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아직까지 오지 않은 귀족들이 누구인지 눈으로 확인하던 그의 시선이 테이블 가장 상석으로 향했다.

평소 의자가 두 개 놓여 있던 그곳에는 세 개의 의자가 놓여 있었다. 새롭게 놓은 의자를 쳐다보며 베르텐 후작은 보이지 않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카멜리아 후작이 2황자 전하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줄이야. 내게는 잘된 일이지만.’

솔직히 그는 카멜리아 후작이 황자비 자리를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의 자리를 보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향후 제국의 황후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그렇게 되면 자신이 수장의 자리에 오르는 것은 몇 달 미뤄질 테지만 불만은 없었다. 빠르든 늦든 그 자리는 이미 그의 것으로 약속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독대한 라세트 공작은 그에게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카멜리아 후작을 수장 자리에서 해임하라는 것이었다. 2황자가 참관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라는 지시도 함께였다.

그 외 별다른 말은 없었지만 라세트 공작의 눈빛에서 베르텐 후작은 눈치챌 수 있었다.

카멜리아 후작이 2황자의 제안을 거부했으며 그로 인해 라세트 공작의 심기가 무척이나 불편하다는 것을.

그건 2황자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자리를 마련하라고 하지 않았겠지.

2황자는 카멜리아 후작이 오늘 회의에서 수장 자리를 빼앗기는 걸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은 것 같았다.

생각에 잠겨 있던 베르텐 후작은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카멜리아 후작이 또각거리는 경쾌한 구두 소리와 함께 회의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탐스러운 붉은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고 정복을 입은 차림이었다.

새하얀 셔츠의 목깃에는 남자들이 하는 크라바트 대신 그녀의 머리색과 똑같은 붉은 색의 리본이 세련되게 묶여 있었다.

카멜리아 후작은 제국 최고의 미녀답게 오늘도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영리하기까지 하니 2황자가 탐을 내는 것이 당연하게 느껴졌다.

그녀의 차림새를 훑던 베르텐 후작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신비스러운 짙은 보랏빛 눈동자에 어려 있는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눈빛을 보며 그는 내심 감탄했다.

오늘 수장의 자리에서 해임당할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움도 걱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카멜리아 후작과 같은 입장이 되었다면 저런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베르텐 후작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카멜리아 가문의 후예답다고 해야 하나.’

그가 생각에 잠긴 사이 자신의 자리에 앉은 엘리시아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낀 것 같았다.

그녀의 입술 한쪽 끝이 스르륵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자신을 비웃는 것이 분명한 미소에 베르텐 후작의 눈살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눈에 준 힘을 풀었다. 이제 곧 그토록 원하던 자리가 그의 것이 될 터였고 그가 그랬던 것처럼 그녀가 그를 올려다보게 될 테니까.

회의가 끝나고 회의장을 나갈 때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어주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던 베르텐 후작은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2황자가 라세트 공작을 거느리고 홀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베르텐 후작이 일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귀족들 역시 모두 따라 일어섰다.

조금 느리기는 했지만 카멜리아 후작 역시 몸을 일으켰다.

귀족들이 고개를 숙인 가운데 2황자는 카멜리아 후작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 옆에 라세트 공작이 착석했다.

2황자는 무척이나 기분이 나빠 보였다.

짜증과 못마땅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비틀린 미소에 귀족들은 슬금슬금 시선을 피하며 자리에 앉았다.

회의 진행을 위해 서 있던 베르텐 후작 역시 2황자의 눈치를 보기는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라세트 공작이 회의를 진행하라는 눈짓을 보내왔다.

기다렸다는 듯 베르텐 후작은 회의장 안의 귀족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지금부터 카멜리아 후작의 수장 해임 건에 대한 임시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고대하던 시간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사실에 그의 눈빛은 기대감으로 짙게 빛나고 있었다.

⚜ ⚜ ⚜

“스캔들 때문에 해임이라니요. 고작 사생활이 아닙니까!”

“고작이라니요! 품위와 명예를 지켜야 할 수장이 그런 스캔들에……!”

“이전에도 수장님과 관련된 스캔들은 많았습니다! 그때는 왜 아무 말도 안 하셨던 겁니까!”

엘리시아는 두 파로 나뉘어 팽팽하게 대립하고 있는 귀족들을 지켜보며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결과가 정해져 있는데 자신을 위해 나서주는 귀족들이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해서였다.

그런데 옆에 앉은 사내는 그녀의 한숨을 잘못 이해한 듯했다.

“막상 해임될 생각을 하니 막막한가 보지?”

비아냥거리는 낮은 목소리가 엘리시아의 귀에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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